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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시인 Oct 14. 2024

냥평생, 이리 취해본 적이 없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밤 11시가 되면 집사가 고른 음악이 방안 가득 퍼지기 시작한다. 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선율이 어우러진 곡을 좋아하는데 유키 구라모토와 리처드 용재 오닐의 'warm affection'은 늘 첫째로 빠지지 않는 연주이다. 30분 전만 해도 상모 돌리는 사람처럼 흔들던 몸을 저리 차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서운 것은 저렇게 있다가 갑작스레 돌변한다는 점이다. 눈이 마주치지 않게 책상 밑에 누워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연주가 들리고 30분 남짓 흐르면 장작 타는 듯한 키보드 소리가 따라 나온다. 타닥- 자판 소리 위로 남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집사는 사계절의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떨리는 바이올린 소리에 맞추어 애절함이 느껴지는 부분에서 미간을 찌푸림과 동시에 타자 소리가 빨라졌다.


이어서 들리는 드뷔시의 '달빛'은 앞선 음악에 비해 전반적으로 조용했다. 나긋하게 들리는 음악이 밤이 깊어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음악이 멈추자 남자는 조용히 일어난다. 목이 마른 지 사과 하나를 꺼내어 껍질까지 먹고는 먹을 게 더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궁금해져 그의 곁으로 간 나를 남자가 주시하고 있었다.


[설이야, 선물이 왔네]

[냥]


그의 손에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흔들어도 소리 없는 것을 보면 굉장히 가벼워 보이는 듯했다. 

[캣닢이라고 들어봤어? 나도 처음 사보는데 이게 그렇게 중독성이 강하다는데 설이는 어떠려나.]


비닐팩으로 포장된 무언가를 들고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다. 간식인가 싶어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데 흠칫 낯선 향기가 코끝을 아리고 지나갔다. 처음 본 향기가 싫지 않았기에 그 자리에 멈추었다. 집사의 손에 들린 물건에서 나는 향기였다. 작은 가루가 떨어졌고 이후 잠깐의 기억이 없어진 듯 무언가에 홀려 정신없이 가루를 핥고 있었다. 빠르게 훑고 지나갔지만 분명 위험한 물건임에 틀림이 없었다. 낯설지만 친숙한 향기가 코끝에서 시작하여 꼬리까지 파르르 떨게 만들었다.


[설이, 왜 이렇게 좋아해. 행복해? 즐거워? 무슨 맛이 나? 나도 먹어볼까? 또 줘?]


시작된 질문 쇄도에도 나의 관심은 오로지 남자의 손에 가 있었다. 입가에 깻잎의 쌉싸름한 맛과 향을 닮은 것이 싫지 않게 남아있었다. 일전에 남자가 삼겹살을 구울 때 옆에서 깻잎을 받아먹은 적이 있다. 먹는 게 신기했는지 이것저것 건네는 집사의 손에서 조금씩 떼어주는 푸른 이파리의 맛이 제법 일품이었다. 종종 상추란 놈을 섞어주면 질리지 않은 만찬이 되곤 했다.


두 번째 캣닢에서는 싱그러운 허브 향이 가득이었다. 휘둥그레진 건 나와 나를 바라보는 저 바보 같은 남자의 눈 모두였다. 생애 처음 느끼는 상쾌한 기분에 젖어 몸을 돌돌 말았다가도 쭉 피면서 온전한 행복감에 심취하게 되었다.

남자는 흡족해하는 표정으로 다른 상자를 뜯고 있었다.

[설이야, 내 생일인데 네 선물이 왔다? 아주 고양이 팔자가 상 팔자야 벌써 선물도 받고]

[냥]


또 다른 간식인가 싶어 큰 소리를 내었다. 오랜만에 안주인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그의 모습이었다. 잔뜩 오른 흥 만큼이나 남자의 등이 큼지막해 보였다. 두 번째 상자 안에는 치즈 모양의 인형이 들어있었다.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내 앞에서 다소 재수가 없는 미소를 띤 그가 캣닢을 치즈 위로 뿌리기 시작했다.  음식 위에 뿌리는 치즈일 텐데 치즈 위에 캣닢을 뿌리는 모습이 적잖은 충격을 일으켰다.


[물어!]


누구를 강아지로 아나 싶었지만 몸은 그의 장단에 즐겁게 맞춰주고 있었다.

푹신하게 부푼 인형을 껴안으니 움츠려드는 실오라기 사이로 캣닢의 향이 슬며시 배어 나왔다. 인형과 함께하면 만사형통도 문제없을 것 같아 하루종일 곁에 두기로 했다. 뻗어오는 집사의 손이 분위기를 해칠까 우려되어 깨물었다. 놀라 소리 지르는 남자가 억울한 듯 쳐다본다. 그의 익숙한 표정만큼이나 이 순간이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든다.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을 유지하려면 이만한 마음은 감수해야 한다고 언젠가 저 남자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완전 치즈 고양이네. 나를 그렇게 사랑해줘 봐. 인형이 밥을 주니 떡을 주니 나는 츄르도 주고 밥도 주고 여하튼 비교할 수가 없다니까? 그리고 속 좁은 말로 그것도 내가 줬잖아. 이리 와봐 응? 내 말 듣고 있어?]


담벼락을 넘어오는 황색 고양이에게 자랑할 말을 떠올리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가 보는 넓은 세상이 늘 부러웠지만 항상 배를 곯아 지쳐있는 메마른 그의 입가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소박한 삶 속에 작은 선물이 마음을 편하게 하여 남부럽지 않았다. 조금은 집사에게 애교도 부리고 하고 싶지만 저 남자도 이런 매정함을 즐기는지 삐졌다가도 어느샌가 희멀건한 미소를 보이며 엉덩이를 씰룩인다. 남자의 삶에도 치즈 인형이 있을까?


그가 가장 기뻐하는 순간을 떠올린다.

그가 가장 울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기쁠 때 이상하리만큼 눈물을 흘리는 그였으니 잊힐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사연이 있을 터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때가 되면 다 말해주는 남자이기에 마음이 편안해지면 본능적으로 알려주지 않을까? 캣닢에 취해 알 수 없게 움직인 나처럼 그도 피곤함을 잊고 잔뜩 기쁨에 흥겨웠으면 좋겠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행복한 생각이 잔뜩 부풀어 오른다. 기쁨을 맞이하는 순간이 있으면 그와 비슷한 생각들이 친해지기 위해 모이나 보다. 행복, 그것이 참 인기 많은 말괄량인가 보다.




실화를 바탕으로 설이의 마음을 상상하여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사랑해주시고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에게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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