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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시인 Oct 09. 2024

한 살 고양이가 할아버지가 되었다고요?

#코스프레



내 이름은 하얀 눈을 닮았다 해서 설이라 지어졌다. 언젠가 참새 아저씨에게 눈이 뭔지 물었더니 화들짝 놀라며 말하기에 잘못 말했나 싶어 눈치가 보였다.


[조금만 지나면 겨울이 오는데 날씨가 엄청 춥고 바람도 많이 불어. 하늘에서 비 내리는 건 많이 봤지? 바람이 이 비를 못살게 굴면 차가워진 물방울이 하얗게 질려 내려온단다. 그게 눈이야. 어떤 날은 온 하늘을 덮기도 하는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게 되면 어휴……. 밥 구하기도 힘들고 춥고 배고프고 여간 고생이 말이 아니야. 어찌나 추운지 연못가에 물고기들은 구석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겨울을 보낸다니까? 겨울잠이라 한다나? 또 뱀이란 애가 있는데 걔는 다리가 없고 몸으로 기어 다니는 애야. 근데 이 뱀이란 게 글쎄 몇 개월 치 밥을 다 먹고 겨울 내내 안 일어난다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여튼 눈이란 것들이 온 세상을 덮으면 세상천지가 조용해지는 것 같아. 미끄러운 길을 만들기도 하고, 푹신한 길을 만들기도 하고 눈마다 어찌나 까탈스러운지 성격도 제각각이야. 그런데 그렇게 눈이 오면 많은 것이 떠난단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숲의 웅장함도, 형형색색 칠갑산의 단풍잎도 한 해 동안 고생했다는 의미에서 겨울 한 계절을 쉬고 다시 봄을 맞기까지 잠시 쉬어가는 거야. 우리도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잖아?........]


[아, 아직 감이 안 와서 꼭 한 번 보고 싶네요]


입에 달린 모터가 더 크게 작동하기 전에 겨우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집사는 함박눈이 내릴 때 태어났다고 했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일 날이 오면 감동에 벅차다고도 말했다. 얼마 전까지 창밖 푸른 잎들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날이 추워지며 푸르렀던 세상은 떠나고 바람 소리와 빈 나뭇가지만이 차가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쓸쓸해 보이는 바람 소리가 창문을 쪼아댄다. 저들마다 달라진 모습을 뽐내며 아직 떠 있어야 할 해도 어느샌가 아파트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둥그런 해님도 겨울에 쉬기 위해 떠나는 걸까. 밝은 세상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깜깜한 밤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달님은 언제 쉴지 생각하고 있으니 거리의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저마다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모락모락 김이 나는 붕어빵을 손에 쥐고 하루에 있었던 일을 토로하는 사람도 보인다.


[어디가? 할 거 없으면 피방이나 가자. 5 인큐 한 판 때려야지?]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춥다]

[지난달에 온 신입 있잖아? 삐딱선을 탔는지 오늘도 큰일 하나 저질렀더라고, 내가 그거 수습하느라…….]

[뒤에 바로 버스 와요. 뒤에 오는 거 타세요.]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을 바라보니 날이 밝아도, 어두워져도 이 세상은 빛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람은 걸으며 살아간다. 오늘이 힘들었고 내일 역시 고될 것을 알아도 걸어간다. 사는 건 그런 거라고 배웠으니까. 그러나 어제는 걸어왔기에 오늘은 뛰어 보자며 작은 변화를 준다. 넘어진 학생이 옷을 훌훌 털며 자전거를 일으킨다. “오늘은 기분이다.” 건너편 청년이 택시를 붙잡는 손에 호떡 하나가 뽀얗게 따뜻한 김을 내뿜는다. 저마다 가장 편안한 장소로 혹은 행복함을 마주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한다. 그러고 보면 하루의 반나절을 집사도 저렇게 살까 궁금해졌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져 "죽겠네, 죽겠네" 할 때는 시끄러워서 발가락을 하나 물어주었다. 그랬더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하루는 창밖을 여니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창에 옹골지게 맺혀 있던 물방울과는 결이 다른 녀석이었다. 집사는 첫눈이 온다며 철부지 마냥 펄쩍펄쩍 뛰는데 심각해 보이는 창밖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설이야 설이야, 저게 눈이야 눈 예쁘지? 네 이름 뜻인 눈이라니까? 이런 건 바로 자랑해야 돼. 설이야 첫눈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봐야 하는 거야. 너 아빠 사랑하니? 사랑해야지 그럼. 사랑 안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못 하지 그럼. 뽀뽀할까?]


[냐옹;;]


가뜩이나 캄캄한 밤이라 콩가루 닮은 것이 휘날리는 것밖에 보이지 않은데 무엇이 저 인간을 저리 즐겁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가오는 입술을 밀어내고 벗어났다. 입이 댓 발 나온 뾰로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응시하던 남자가 이내 창밖에 매달려 떨어지는 눈을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설이야 산타 할아버지라고 있어. 나 어릴 적에는 선물 주는 산타 할아버지랑, 구름 모자 쓴 산 할아버지가 엄청 유명했거든. 근데 눈이 오면 산타 할아버지가 루돌프라는 걸 타고 와서 온 세상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거든? 굉장하지 않아? 옛날에는 자전거도 달라하고, 닌텐도도 달라하고 컴퓨터도, 힐리스도, Mp3도.....]


말만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란 양반은 자선 사업가쯤 되어 보이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바라는 게 많은데 한 사람씩 갖다 주려면 얼마나 피곤할까 생각이 들었다. 착한 아이한테만 준다는 선물을 이 남자가 받았을 리는 없고, 큰 보따리에 간식이나 조금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올 겨울은 크리스마스 분위기 좀 낼 겸 웃을 준비 했지. 짜잔-]

얽혀 있는 하얀색 솜뭉치 밑으로 강렬한 붉은색이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산타가 이렇게 입고 다녀. 큰 마음먹고 가져왔다니까? 입어보자]

[냥!]


까끌한 옷이 살결에 겹치는 것이 싫어서 질색을 했지만 그의 즐거움에 내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몸을 들어 올리는 손이 미워 살짝 깨물었지만 오히려 까르르 웃는 남자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래도 잘 어울리면 상관이 없다 싶기도 해서 체념한 상태로 몸을 맡겼다. 모자를 덮으니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사이즈를 잘못 샀는지 모자 전체가 얼굴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미숙한 남자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또 한참을 웃고 있다. 본인 잘못을 알기나 할까. 바보 같은 앞니를 활짝 드러내며 웃는 얼굴을 보니 공연히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내가 말이야. 이제 어른이 돼서 산타 할아버지가 찾아오지 않는단 말이지. 설이가 오늘만 산타 하자. 아빠한테 선물을 들고 오는 거야? 어떤 선물을 주고 싶어? 응? 대답 안 하면 오늘 츄르는 내가 먹을 거야.]


졸지에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급한 대로 남자의 손에 꿀밤을 먹여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붕어빵 하나 입에 물고 온 집사가 겨울에 대해 들려줬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니 뭐니 사람들은 기념일을 만들어 특별한 하루를 만드는 걸 좋아한다는 거에서부터 별의별 이야기가 있었지만 소원 들어주는 산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어째서인지 애틋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묻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 친구 가족들과 손을 붙잡고 높은 하늘에 소원을 빈다. 그 소원이 서로를 향한 것이든 스스로를 향한 것이든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이 모두의 소원처럼 느껴졌다. 반짝이던 별은 빗물로 떨어져 한 여름의 소년 소녀의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 하얀 눈송이로 내려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소년 소녀의 마음을 새하얗게 덮어주었다


 '설이'라는 이름이 특별해졌다.


나의 소원은 무엇인가. 조용한 방, 크리스마스 캐럴 소리가 나긋이 퍼지는 방이 여기 있다. 고요한 분위가 오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긴장이 없는 시간, 몸을 돌돌 말아도 포근한 잠을 잘 수 있는 이 시간이 내일도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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