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목소리, 오래된 욕망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성영화"라는 별명은 퍽 흥미롭습니다. 그렇지만 양주남 감독의 1936년 작 미몽이 정말 흥미로운 이유는 가장 오래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주인공 '애순'의 욕망 때문일 것입니다.
보거나 보이거나, 시선을 흔들다
'봄'과 '보임'의 모티브는 주인공 애순의 서사를 함께 따라갑니다. 『미몽』의 첫 장면에서 애순은 거울을 보고 치장하는 행동을 통해 스스로 대상화하는 여성입니다. 이때 애순이 보고 있는 거울 속의 모습은 관객에게 보이지 않으므로 실상 애순의 시선은 '비어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순은 구도상 뒤에 앉아있고 그녀 눈에 보이는 것은 거울 속 본인의 모습이려니 추측만 가능할 뿐 관객에게 보이지는 않아요. 한편 남편은 구도상 앞으로 나와 애순을 바라보며 관객은 그의 시선을 따라 애순에게 시선을 던지게 됩니다. 남성 권력자의 입장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애순이 바라보는 거울이 화면에 잡힙니다. 거울 안에 남편이 있지요. 애순이 거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나마 남편에게 '보이는' 존재에서 남편을 '보는' 존재로 부상합니다. 관객은 애순이 남편을 거울 속으로 바라보듯 거울 속 남편을 보는데 이때 애순이 거울을 쳐서 거울이 크게 흔들리고 거울 속 남편의 모습은 사라지게 됩니다. 거울이 시선인 동시에 애순의 무의식을 상징한다면 남편의 상이 투영된 거울을 치는 행위는 내면에서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쫓아내는 모습으로 해석이 가능해요. 혹은 이성애의 자리에 남편 대신 다른 남성을 대체할 준비가 되었다는 암시일 수도 있죠. 이후 애순의 시선 권력은 무용공연을 보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애순은 남성의 육체를 대상화하고 보는 주체가 되며, 관객이 영화를 볼 때 얻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시선의 권력을 쥡니다.
"왜 이리 싸, 더 비싼 건 없어?"
『미몽』은 가부장 사회에 의해 결여당한 여성이 갈구하는 대상으로 '소비'와 '자유연애'를 제시합니다. 작품 초반 백화점 - 영화에서 데파토라고 부르죠- 에서 "왜 이리 싸, 더 비싼 건 없어?"라고 말하는 주인공 애순은 한국사회의 근대화로 인한 소비풍조에 힘입어 소비를 통해 욕망을 채우려는 심리를 대변합니다.
또한 남편에게서 정부로, 정부에게서 다시 무용가에게로 이동하는 애순의 열정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입니다. 열정의 이동은 장소의 이동을 병행하는데 전통가옥이 즐비한 거주지를 벗어나 서구적인 호텔로, 다시 더 넓은 세계로의 연결을 제공하는 기차역으로까지 진출을 시도하는 애순을 통하여 『미몽』은 근대화와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정열을 가진 여성이 욕망을 찾아나서는 여정旅程 서사의 성격도 지니고 있습니다. 『자유부인』과 같은 후대 영화에서도 억압된 여성의 욕망은 비슷한 통로를 통해 발산되는데요, 근대화를 경험하며 여성들이 '상품자본주의에 매혹되고 근대적 성애를 경험' (주유신, 2001)하는 과정을 애순은 앞선 세대에 이미 보여주는 셈이죠.
사필귀정 결말? 조선의 증후적 기호로서의 애순
그러나 애순은 1930년대 조선이라는 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영화는 사고로 딸을 죽일 뻔한 애순이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부정을 저지른 여인이 처벌받는 결말이려니 싶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방법 역시 애순의 전복성 관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어요. 만일 애순이 남편의 총에 맞아 죽었다면 성녀-창녀 이분법에서 일탈자, 즉 창녀인 애순이 가부장제를 대표하는 남편에 의해 처벌당하는 것은 사필귀정적인 결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애순은 독을 먹고 자살하여 가부장제로의 복귀를 거부하고 스스로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합니다. 이는 주유신의 해석에서 『자유부인』의 오선영이 아들로 말미암아 남편에게 용서를 받고 가장의 권력 아래로 환원하는 결말과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순의 추락은 상품물신주의와 에로스적 환상에 사로잡혀 자멸한 한 여성의 비극으로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조선에서 여성이 주체성을 발현할 기회가 매우 적었고 에로스적 환상이 인간 본연의 상상력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된 여성이 주체적으로 소비와 로맨스를 추구했다는 점은 나름의 자아표출을 위한 시도라고 보아야 정당할 것입니다.
확장하자면 애순은 비단 여성만의 상징이 아니라 근대화를 겪는 조선인 전체의 혼란을 상징합니다. 애순이 걷거나 차를 타고 달리는 1930년대는 근대화와 도시화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장소입니다. 한복과 양복이 한 화면에 비치고 병원과 백화점, 호텔 등 서구의 문물이 번화가에 침투한 반면 거주지역은 전통가옥들로 이루어져 있죠.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한편 시종일관 쪽 진 머리에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 애순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조선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애순이 전통 가옥에서 벗어나 도시로 진입하고 공간의 확장을 제시하는 기차역까지 진출하는 여정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대를 살았던 당시 관객들의 정신적 여정과도 닿아있습니다. 즉, 영화 『미몽』에서 애순이 제시하는 욕망의 목소리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조선사회 전체에 팽배한 호기심과 불안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해주는 증후적 기호' (주유신, 2001)인 것입니다.
참고문헌
주유신. (2001). 한국영화와 근대성:<자유부인>에서 <안개>까지. 소도.
한국영상자료원. https://www.koreafilm.or.kr/main
Doane, M. A. (1998). Film and the masquerade: theorizing the female spectator. Evans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