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혼자 사는 것은 예전부터의 꿈이었다. 대학교에서 진학하며 학과를 정할 때에도, 첫 직장에 면접을 보러 갈 때에도 부모님과 상의하지 않았던 딸이었다. 그렇다고 비뚤어지거나 엉뚱한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바람직하다면 바람직한,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고, 단지 혼자서 무엇이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천성적으로 편했다.
20대에는 늘 혼자 여행을 다녔다. 누굴 만나면 그 사람과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재잘재잘 멈추지 않고 떠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늘 조금씩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아웃사이더는 아니었고,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연애를 계속했지만 사랑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영역이 따로 있었다. 때론,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게 나은 것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해서 손바닥만 한 원룸에서 혼자 살게 되었을 때, 그 작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다. 고독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서 새벽 늦게까지 깨어 있거나, 쉬는 날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CD 소리에만 집중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문득, 언젠가는 고양이를 키워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 오피스텔은 반려동물 금지라서 과감하게 규칙을 어길 용기는 없었다. 그저 커튼이 나폴거리는 집, 나는 책을 읽고 고양이는 말없이 낮잠을 자는 풍경을 종종 상상했다. 실은 그때 침묵과, 평화와, 심심할 정도로 잔잔한 일상이 간절히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돈을 주고라도 고요를 사고 싶은 그런 나날이었다. 백수가 되기 전까지는 영영 오지 않을 긴 방학을 꿈이나 꿔 보며 주말을 보냈고, 그 상상의 배경에 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는 고요와, 고독과, 평화와 잘 어울렸다.
많은 고양이들이 사람의 삶에 끼어들 때 그렇듯 나에게 고양이가 오는 일도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친한 동생이 술 먹고 집에 가는 길에 일명 '냥줍'을 했다는 것이었다. 어른 고양이들에게 쫓기며 괴롭힘 당하고 있는 걸 구해줬더니 졸졸 쫓아오더란다. 동물은 어쩜 그렇게 동물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지, 장화 신은 고양이의 그렁그렁 눈빛을 몇 번 날려주면 홀딱 넘어날 만한 영혼이라는 걸 그 녀석도 알아챘던 모양이다. 하지만 막상 데려왔어도 엄마가 너무 싫어하셔서 당장 갈 곳이 필요하다는, 사정 설명을 빙자한 강력한 요청에 나는 ‘걱정하지 마, 언니가 일단 맡아줄게’라는 호언장담을 날리고 말았다.
그때가 마침, 반려동물 금지의 원룸 계약이 끝났을 때였다. 그리고 결혼을 앞두고 있어 예비 신혼집을 구해 내가 먼저 들어가 살기로 한 참이었다. 두어 달 후에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예비 신랑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일단은 혼자 지내고 있어 고양이를 당장 돌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동생이 집에 고양이를 혼자 둘 수 없다고 고양이를 데리고 출근했고, 내가 아침 일찍 동생네 회사로 가서 고양이를 데리고 왔다. 담요에 쌓인 채로 지하철에서 회사까지 얌전히 이동한 걸 보니 어지간히 순한 녀석인가 보다 싶었다. 병원에 들렀더니 귀 진드기도 없고, 건강 상태도 괜찮아 보인다고 했다. 이름이 없어 등록하지 않았더니 며칠 후에 '(미정)이의 접종 날이니 내원하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집에 온 고양이는 잠깐 세탁기 아래에 들어가 숨더니 5분도 안 돼서 나와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갔다. 그땐 그게 깨발랄의 예고편인 줄도 모르고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잠깐 데리고 있는 거야, 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짓지 않았다. 아직 너무 작아서 점프다운 점프도 못 하는 이 새끼고양이는 집안 탐색을 마치자 내 다리에 기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이 들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삼색이긴 한데 맨투맨 티를 입은 것처럼 한쪽 팔만 완전히 갈색인 게 특이했다. 심지어 코도 자세히 보면 삼색이 섞여 있었다. 비율이 이상해보일 정도로 귀가 크고 꼬리는 곧았다. 내가 다리가 불편해 자세를 바꾸며 뒤척여도 잘도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