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약이냐 알약이냐 그것이 문제
예전에 엄마가 갑상선이 안 좋아 병원에 다녔다. 병원에서 뭐래, 괜찮대? 물어보면 엄마는 매번 괜찮다고 했지만 식탁 위에는 항상 약 봉투가 있었다. 갑상선은 매일 꾸준히 약을 먹으면서 관리해야 한다고 했고, 철딱서니 없는 나는 또 그러려니 했다. 매일 약을 먹는다는 게, 단순히 귀찮은 일이 아니라 매순간 몸 어딘가 고장 나 있다는 것에 대해 실감하는 일이라는 걸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리고 몇 년 뒤, 나도 결혼을 하고 내가 키우는 고양이가 림프종 진단을 받고 나서야 집에 떨어질 새 없던 약 봉투들이 생각났다. 이제 우리 집에도 사료 통 옆에 늘 동물병원 약 봉투 두어 개가 올라가 있다. 약은 하루에 두 번, 아침은 식전이고 저녁은 식후에 먹인다.
제이에게 매일 약을 먹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다지 큰 부담이 없었다. 사실 제이는 이미 한 번 수술과 약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길에서 지내던 고양이치고 처음 발견했을 당시엔 귀 진드기도 없고 접종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을 만큼 건강했다. 그 덕분에 얼마 후 별 탈 없이 중성화를 했고, 중성화 후에 며칠 동안은 집에서 항생제를 먹였던 것이다. 새끼손톱만큼 적은 양의 하얀 가루약이었다. 사료를 먹을 때 사료 위에 뿌려주면 제이는 약까지 싹싹 잘 핥아 먹었다. 고양이 목욕과 약 먹이기는 초보 집사가 듣기에도 꽤 높은 레벨인 것 같았는데 무슨 고양이가 이렇게 약 먹이기가 쉬운가, 내가 정말 순둥이 고양이를 주워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왠지 요즘 들어 자주 빗나가는 것 같은 내 예상은 또 빗나갔다. 예전처럼 사료 위에 가루약을 뿌려주었는데, 소화를 도와주는 아침 약은 그나마 먹더니 정작 저녁에 먹이는 항암 약은 아예 입도 안 대는 것이었다. 사실 저녁 약은 내가 봐도 양이 너무 많았다. 사료에 은근슬쩍 섞어주며 별 거 안했으니 걱정 말고 먹어, 하기에는 양심에 가책이 좀 느껴지는 양이었다. 물론 맛도 없겠지.
하루도 안 빼놓고 매일 같은 시간에 약을 챙겨 먹이는 것도 말이 쉽지, 실제로는 무척 번거로운 일이다. 야근을 할 수도 있고 회식을 할 때도 있고, 친구를 만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부득이하게 저녁 시간에 집을 비워야 할 때는 나와 신랑 중 한 사람은 꼭 집에 있을 수 있게끔 스케줄을 조절했다. 그러다 보니 고양이 왕초보자인 신랑도 혼자 힘으로 고양이를 돌봐야 할 때가 있어서, 육묘 레벨이 빠르게 올라가게 된 건 뜻밖의 장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매일 약을 먹이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약을 어떻게 먹이느냐는 것이었다. 알약을 먹이는 것은 왠지 아직 엄두가 안 나고, 가루약을 자연스럽게 먹게 하고 싶은데… 신랑과 나는 매 끼니마다 머리를 모아 아이디어를 짜냈다.
캔에 섞어 주는 것은 기본이고, 말린 닭가슴살을 물에 불려 섞어주기도 하고, 비싸지만 기호성 좋은 고양이 간식 캣만두에 섞어주거나, 쨈 같은 식감의 츄르에 섞어 입 천장에 묻혀보고(그러다 실수로 손가락을 물려 피 철철), 주먹밥처럼 캔을 뭉쳐 그 안에 약을 슬쩍 넣어보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그게 나름 먹힐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매일 반복하니 제이도 이제 ‘먹어도 되는 것’과 ‘먹기 싫은 것’에 대한 기준이 한층 뚜렷해지는 것이었다. 고양이의 후각이 개 못지않게 뛰어나다는 걸 아시는지. 제이는 아무튼 제 밥에 뭔가 했다 싶으면 귀신 같이 알고 단식투쟁을 했다. 밥을 굶길 수는 없으니 새 그릇에 다시 사료만 담아주면 또 그건 먹었다. 똑똑한 녀석….
가루약을 남기면 할 수 없이 그걸 다시 모아 물을 약간 타서 액체로 만들어 주사기로 먹이기도 했다. 고양이에게 물약을 먹일 때 쓰는 방법인데, 당연히 정말 싫어했다. 매 끼니 때마다 제이도 힘들고 우리도 힘들었다. 사람 병원 선생님 말씀도 무조건 잘 듣자는 주의인 나는 동물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제대로 먹이지 못할까봐 애가 탔다.
결국 인터넷에서 ‘고양이 알약 먹이는 동영상’을 몇 십 개쯤 검색해보고 나서, 그 주에 병원에 갔을 때는 비장하게 말했다. 선생님, 이번 주부터는 알약으로 주세요.
그리고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지금까지 왜 바보처럼 가루약을 먹이려고 노력했나 싶을 만큼, 약 먹이는 게 훨씬 쉬워졌다. 게다가 먹다 남는 가루가 없으니 정량만큼 약을 먹였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제이도 이렇게 약 챙겨먹는 일상이 처음이겠지만 나도 아픈 고양이 돌보는 경험이 처음이라 너무 서툴렀다. 빨리 더 좋은 방법을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 고양이는 알약을 먹이는 게 훨씬 낫다고 한다.
싫어하는 고양이에게 알약 먹이는 게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수의사 선생님에게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해 어떻게든 배워서 시도해보시길 바란다. 익숙해지면 의외로 아주 평화롭게 먹일 수 있다… 하지만 매일 약 먹기 시작한 지 7개월차에 접어든 현재, 보통 내 베개를 같이 베고 자는 제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부스럭거리는 약 봉투 소리만 듣고도 침대 밑으로 쏙 숨어버린다.
방심하고 나오길 기다려서 붙잡아 입 안에 또 알약을 쏙, 넣어주는 게 이제 일상이 됐다. 제이도 막상 약을 먹고 나면 ‘칫, 또야’ 하는 듯한 표정으로 어슬렁어슬렁 몇 발자국 걸어가 태연히 그루밍을 시작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