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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Jul 23. 2016

안심할 수 없는 날들

온갖 가능성 앞에서

항암치료를 시작한 얼마 후부터 제이는 급격히 활기가 좋아졌다. 생후 4개월 무렵에 냥줍한 고양이라 아마 이제 한 살쯤이 되어가는 시점이었고, 실제로 한창 에너지를 쏟아낼 시기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제이는 밤만 되면 격렬한 우다다를 시작했다. 몸에 시계라도 달렸나, 어쩜 12시만 되면 가만히 있다가도 뜀박질을 시작하는지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그러니 더 걱정인 게, 등에 꽂혀 있는 흉관이었다. 몸 안에 차오르는 흉수를 마취 없이 뽑기 위해 달아놓은 것이었는데, 뛰어다니다가 어디 걸리거나 빠질까봐 나는 노심초사 제이가 어디 있는지 수시로 집안을 훑고 다녔다. 붕대로 감아놓은 것만으로는 불안해서, 아예 흉관 부분을 덮어주려고 옷을 입히기로 했다. 고양이로 인연이 되어 만난 손재주 좋은 이웃이 J 이니셜까지 새겨 예쁜 원피스를 선물해 주었다.      


참고 : https://brunch.co.kr/@cats-day/11


소녀 원피스를 입고 품에 안겨 잠든 제이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는 옷 입는 것을 더욱 불편해하기 때문에 생애 처음 입는 옷을 낯설어 할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제이는 순순히 옷을 입고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태연하게 잘 걸어 다녔다. 안 그래도 자그마한 몸집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혀놓자 소녀처럼 정말 귀여웠다. 예쁘라고 입힌 옷은 아니지만, 옷을 입은 채 내 품에 와서 살포시 안기면 마치 인형 같았다.      


이렇게 품에 쏙 안긴다


그렇게 2, 3일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애가 걷는 게 이상했다. 긴가민가해서 한참 지켜봤는데 기지개를 펴는 자세처럼 뒷다리를 늘어뜨리고 허리를 낮춘 채 그대로 질질 끌듯이 걷는 것이었다. 그러다 또 어떨 때는 잘 걷는 것 같기도 하고, 괜찮은가 싶으면 또 이상한 자세로 걸었다. 작은 신호라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느낀 터라, 걷는 모양을 일단 동영상으로 찍어 수의사 선생님에게 보냈다.     


애가 이상하게 걸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묵직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뒷다리를 질질 끈다고요? 항암 부작용 중 하나로 혈전이라는 게 생길 수도 있는데, 혹시 모르니 일단 병원에 데려와 보라고 했다. 만약 그런 게 생겨서 혈관을 막게 되면 심각한 경우 다리를 잘라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웬만한 일에는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았던 나도 순간 더럭 목소리가 커졌다. 뭐라고요? 덜컥 하는 마음에 바로 제이를 안아들었다. 뒷다리가 차가운지 만져보라고 하셨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일단 병원에 가기로 했다.  

    

집에서 제이가 다니는 병원까지는 길이 막히지 않는 시간대를 기준으로 차로는 31분, 대중교통으로 1시간 5분이 걸린다.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서 시간대가 자유로운 편이지만 병원까지 가는 길이 멀고, 평소엔 차를 타고 다녀서 버스를 타려니 새삼 이동 스트레스도 염려됐다. 신랑이 퇴근한 후에 차를 타고 가면 좋겠지만 다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둥 너무 충격적인 말을 들으니 마음이 급했다.      


이동장에 있는 걸 싫어하는 제이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병원에 가는 동안 ‘아오오’ 하면서 늑대 울음소리를 냈다. 고양이를 싫어하거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혹 누가 시비라도 걸어오면 어쩌나 초조한 마음에 내가 계속 눈높이를 맞추고 안고 쓰다듬어줘야 제이도 조용해졌다. 다행히 길에서나 버스에서나 많은 분들이 오히려 이동장을 들여다보며 귀여워해 주셨다. 병원에 도착해 선생님 앞에 제이를 내려놓았다.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기고 병원에서 걸어보는데, 어라, 멀쩡하다. 몇 번이나 시도해 봐도 이상이 없이 잘 걸었다.      


천만다행인 한편, 매일 말을 안 듣던 휴대전화가 A/S센터에만 가면 갑자기 작동이 잘 되는 것과 비슷한 억울함이 밀려왔다. 병원에서 관찰한 결과,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처음 입어보는 옷이 어색하고 낯설어서 옷에 닿지 않으려고 뒷다리를 쭉 빼다 보니 그렇게 이상한 자세로 걷게 된 것이었다. 웬 호들갑이었나 싶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제이랑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별 일 아니었지만 정말, 가슴이 철렁했지 뭔가. 항암치료를 하는 내내 우리는 자주, 확실하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 앞에 놓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정말 다행히도, 매일 몸속에 꽂은 흉관에서 뽑아내야 했던 흉수가 며칠이 지나자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매일 저녁 집에서 주사기로 흉수를 뽑아내는데, 왠지 잘 뽑히지 않는 것 같아 ‘설마, 벌써’ 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더니 흉관을 제거해도 되겠다는 것이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의 희소식에 나는 한껏 고무되었다. 아직은 이렇다 할 부작용도 없고, 제이는 잘 뛰어다니고, 흉관도 뽑았고. 그렇잖아도 희귀한 형태의 림프종이라고 하니, 오히려 특이하게 금방 회복하는 것 아닌가 기대감이 샘솟았다.      


드디어 흉관을 제거하고 상처도 아물고 있다


이후 흉관을 제거해 더 이상 뛰어다니다 다치는 것에 대한 염려는 없어졌지만, 몸통 한쪽 털을 다 밀어놓았기 때문에 추울까봐(당시 2월이었다), 그리고 원피스 입은 모양이 솔직히 귀여워서… 일부러 옷을 벗기지 않았다. 걷는 모양도 괜찮아지고 인형처럼 종종종 잘 놀던 제이는,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오니 알아서 힘차게 옷을 벗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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