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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Oct 25. 2018

멸칭 위에 구축하는 문학의 자유가 그리 중요한가요?

단어의 맥락이 갖는 힘 

몇 해 전 겨울, ‘벙어리장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벙어리’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언어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벙어리장갑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는 것은 기왕이면 멸칭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다. 


나는 그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벙어리장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의미를 두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 보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서 ‘낮잡아 이르는 말’로 자연스레 굳어진 단어가 참 많을 것 같다. 참고로 ‘아주머니’를 낮잡아 이르는 말인 ‘아줌마’도 그중 하나다.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불렸을 때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는 이미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히 어원을 되짚어 올라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익숙한 단어를 선택해 사용한다. 때로는 그 어원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차피 원래 의미는 퇴색되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어의 힘은 단어의 뜻 자체보다는 그 속에 차곡차곡 쌓여온 맥락 속에 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결혼 후 여성 배우자를 ‘집사람’ 혹은 ‘안사람’이라고 불렀다. 남성은 바깥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여성은 집에서 가정을 돌보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남녀 모두 경제 활동과 가정 살림을 병행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 되었다. 더 이상은 광고에서 밥솥이나 세탁기를 ‘엄마를 위한 제품’이라고 홍보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집안일을 여성만의 몫이라고 여긴다. 우리가 여태껏 보고 겪은 미디어 매체나 경험에서도 그것은 ‘엄마’의 역할일 때가 많았다. 아마 ‘집사람’이라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전까지 사회적인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단어 자체에 굳이 비하하는 뜻이 들어 있지는 않다고 해도, ‘집사람’이라는 말이 익숙한 이상 우리는 집안일이 여자의 몫이라는 내재된 인식을 떨칠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해온 상징이나 비유, 단어의 잔재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으리라고 가정한다면 과한 것일까?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위해서 실제로 여러 가지 직업 명칭도 바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가정부, 파출부를 가사도우미나 홈매니저라고 부르고, ‘아저씨’로 총칭했던 택시 운전사를 ‘기사님’이라고 부른다. 




최근에 이외수 작가가 SNS에 ‘단풍’이라는 시를 올리면서, 문학 속 여성혐오 표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저 년이 아무리 예쁘게 단장을 하고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화냥기를 드러내 보여도 절대로 거들떠 보지 말아라. 저 년은 지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명심해라. 저 년이 떠난 뒤에는 이내 겨울이 닥칠 것이고 날이면 날마다 너만 외로움에 절어서 술독에 빠져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시에서 ‘저 년’과 ‘화냥기’ 등으로 묘사되는 단풍이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이유로 여성혐오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인데, 이외수 작가는 그 논란에 대해 ‘난독증’이라 반박했다. 더불어 페미니즘의 대두 이후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고 있다는 문인들의 주장도 잇따랐다. 


물론 문학에는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 심지어 우리는 필요하다면 문학 속 문법 파괴조차 허용한다. 그렇다면 예술적으로 허용되는 자유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화냥기라는 말은 ‘남자를 밝히는 여자의 바람기’를 말한다. 남성의 바람기를 지칭하는 단어는 따로 없다. 즉, 남성은 경험이 많아도 치부가 되지 않지만 여성은 순결하고 경험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단어다. 이외수 작가는 문학적으로 ‘화냥년’이라는 단어를 시의 맥락 전체를 보아 해석해야 한다고 했지만, 단어에는 죄가 없을지언정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에는 죄가 있다. 


최근 결혼한 여성들이 배우자의 형제를 이르는 ‘서방님’이나 ‘아가씨’라는 말을 바꾸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 단어의 뉘앙스 자체가 특별히 욕설처럼 느껴져서는 아니다. 그 단어가 쓰이는 맥락이 여성혐오적이며, 그것이 가정 내 서열이나 성차별을 유지하는 사소한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어 자체를 사라지게 하자는 뜻은 아니며, 윤리적이고 인도적인 문학만을 아름답게 즐기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문학 속에서 ‘화냥년’이라는 단어가 필요한 문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름답게 피어났다 사그라지는 단풍에 비유하여 가볍게 공유, 재생산할 수 있는 의미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여성의 묘사는 더 이상 예술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아름답게 바라보기 어렵다. 


우리는 대개 언어를 통해서 사고한다. 자주 듣다 보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다 보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언어는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 단어의 원래 의미를 잊어버린 채로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또 여성혐오적으로 사고하는 데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번 논란 속에서 ‘문학에서 쓸 수 있는 표현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소연하는 반응도 있었다. 그렇다. 어떻게 보면 점점 예민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약자들에 대한 혐오 표현에 예민해지고 있다는 것은 도리어 좋은 신호라고 생각한다.


코미디 프로에서 한부모 가정의 자녀를 희화화해서 욕을 먹은 적이 있었다. 새 장난감을 자랑하는 친구에게 “쟤네 아버지가 양육비 보냈나 보다”, “양쪽에서 선물 받아 좋겠다, 재테크다”라며 조롱하는 연기가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이 역시 ‘개그는 개그로만 보자’는 주장이 있을 것이다. 날 세우지 않고 둥글게 살아가는 건 좋다. 그러나 그게 누군가의 불편함, 누군가의 상처를 밟고 구축하는 너그러움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종 차별이 근본적으로 내재된 소설을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을까? 다문화가정이나 장애인에 대한 희롱이나 혐오 역시 바람직한 예술 감성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학 속 여성 혐오 표현이 문학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옛 문학 작품을 보면 여성뿐 아니라 장애인, 가난, 인종, 신분 등에 따른 차별, 비하의 표현이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런 시대였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도 문학의 순수함, 문학의 자유라고 여길 수 있을까? 더 자유롭게 약자들을 표현할 수 있었던 시대를 그리워하고, 당시로 돌아가려 노력해야 할까? 우리가 여태껏 언어의 변화와 함께 구축해온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복지는 문학적 자유에 비하면 하찮은 것일까. 


그 모든 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을 흔쾌히 허용한다면 문학은 결국 어떤 계층의 예술로 남게 될 것인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학의 자유는 중요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독자를 필요로 하는 글이라면 변화하는 젠더 감수성을 고려하는 것 역시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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