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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Aug 01. 2016

너는 과거 있는 고양이

성묘를 입양한다는 것

예전에는 과거가 별로 없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는데, 요즘에는 연애 많이 해본 남자가 더 좋아.      


친구의 말에 나도 공감했다. 남산 데이트도, 바다 여행도, 낯선 아보카도를 먹어보는 일도 다 나와 함께 하는 게 처음인 남자와 연애하는 건 물론 풋풋하고 설레긴 하지만 어딘가 좀 피곤하다. 삐쳐서 말하는 '오늘은 안 만날래, 피곤해'를 곧이곧대로 듣거나, 나를 앞에 두고 자신의 관심사인 게임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한 달에 한 번쯤 예민한 날이 있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여자의 마음을 일일이 브리핑하는 건 때로 답답하고 자주 서운하다. 더 문제는, 그렇게 연애 초심자를 만나 연애 중급자 정도로 레벨업을 시켜두면 그 남자는 나랑 헤어져서 다른 여자에게 연애 스킬을 써먹는다는 점… 아무튼 (신랑이 보고 있으니) 이 얘기는 이쯤 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연애에 능숙한 남자에게 더 끌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또 나 자신도, 연애를 해볼수록 나 스스로가 어떤 타입이며 어떤 성향의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나의 다음 연애는 항상 이전의 연애를 기반으로 해 성장했더랬다. 이런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지, 혹은 다음엔 이렇게 행동하지 말아야지, 하고.


과거의 연애를 기반으로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나와 궁합이 얼마나 잘 맞을지 비교적 잘 유추해볼 수 있는 것처럼 성묘를 입양하는 것도 비슷한 면모가 있다. 아기 고양이는 물론 성묘에 비해 훨씬 인기가 많고 입양도 쉽게 되는 편이다. 어떻게 자랄지 모르는 어린 고양이와의 동거는 매일매일 새롭고 매력적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귀엽고, 귀엽고, 또 귀엽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제공하는 환경과 교육관(?)이 그만큼 중요하며, 대개의 경우 어릴 때 본능으로 인해 필수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물고, 뛰고, 할퀴는 과정을 견뎌야 한다.


반면 성묘는 나와 잘 맞는 성격인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다 크면 어떤 얼굴이 되는지를 다 파악할 수 있어 오히려 궁합이 잘 맞는 아이를 만나면 서로 적응하기 쉬울 수도 있다. 다만 어린 고양이보다 덜 귀엽다는 점, 이미 다른 환경에 적응해 있어서 새로운 집에서 잘 지낼지(혹은 기존에 키우고 있던 반려동물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점 때문에 입양 가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집 첫째 고양이 제이는 약 4개월령에 냥줍당해 나에게 왔다. 물론 태생적인 성격도 있겠지만, 어린 고양이일수록 집사의 행동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사람을 겁내지 않고 선뜻 무릎 위에도 올라오는 제이의 성격을 유지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썼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앞으로의 10여 년을 좌우한다(?)는 생각에, 습관을 만들거나 혼내는 데에도 다소는 부담과 책임감을 느꼈다. 이를테면 지금 내가 지나치게 혼내거나 공격적으로 대하면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고양이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매일 하루에 한 번씩 간식을 준다면 앞으로 늘 이 시간에는 간식을 주리라는 기대를 하는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는, 직접적인 영향력에 대한 것들이었다. 아기 고양이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하루하루가 놀랍고 신비스러운 것인 동시에, 나 같은 초보 엄마(?)에게는 흰 도화지에 선을 긋는 듯한 조심스러움도 있었다.


제이 이후로 둘째를 언젠가 키울 마음은 있었지만 아직 내가 찾아 나설 때는 아닌 것 같았다. 동물을 키운다는 게 선뜻 결정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니니, 내가 키우게 될 고양이라면 어느 순간엔가 나에게 보다 명확한 텔레파시(일명 간택)를 보낼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신랑이 카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내가 기다리던 묘연의 고양이는 내가 아니라 신랑에게 먼저 텔레파시를 보낸 모양이었다. 사진 속 고양이는 다 큰 성묘였다. 사실 신랑(당시 남자친구)은 원래 동물을 키워야 한다면 어릴 때부터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야 '내 고양이', '내 강아지'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형대로 연인을 만나는 건 아니듯 묘연도 예고없이 온다.


입양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사진 속 회색 길고양이는 우리가 흔히 길에서 보는 코리안 숏헤어(코숏)가 아니라 일명 품종묘였다. 틀림없이 원래는 가족이 있었던, 집을 나왔거나 어떤 이유에선가 버려진 유기묘라는 뜻이었다. 뜻밖의 길 생활을 이미 6개월 정도 하고 있던 아이로, 밥을 주며 돌보던 캣맘이 집고양이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입양 공고를 올린 것이었다. 한 발자국 다가가면 두 걸음 멀어지며 경계하면서도, 자신이 마음을 연 사람에게는 마음껏 스킨십을 허용하는 아이였다.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길 생활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에 서둘러 그 회색 길고양이를 입양했다. 처음 보는 순간 알아버린 것이다, 넌 나를 만나기 위해 나타났다는 걸.


캣맘의 가게에서 밥을 먹던 아리와의 첫 만남


신랑과 내 이름의 공통 이니셜을 따서 첫째 'J'의 이름을 붙였었고, 나머지 이니셜 두 개를 조합해 '아리'라고 이름지었다. 집에 온 첫날, 아리는 침대 밑에 몸을 반쯤 넣고 집안 분위기를 살폈다. 좀 적응하고 돌아다니는 걸 보고 침대 위에 올려줬지만 휙 내려가버리기에 침대 위에 못 올라오게 교육을 받았나 싶었다. 캣맘의 말로는 남자를 유난히 무서워한다고 했다. 예전에 있던 집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길 생활 중 안 좋은 기억이 생긴 탓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사람 손길을 피하지 않고 사람을 공격하는 법도 없었다. 한때는 틀림없이 사랑받던 과거가 있었을 듯했다. 그 외에 내가 아는 것은 2~3살 추정의 중성화하지 않은 암컷, 고운 회색 털을 가진 아메숏 종이라는 것 정도였지만 결국 느낌만큼 분명한 건 없다. 강력한 신호를 보내온 이 고양이를 덜컥 가족으로 맞아들이고 제이에게도 소개시켜줬다.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만났어도 막상 사귀다 보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마냥 순둥이인 줄만 알았던 아리는 어느덧 우리 집 서열을 다 평정하고 아무 데나 발라당 배를 까고 누워 있는 팔자 좋은 고양이가 되었다. 길 위에서 출산도 했던 씩씩한 엄마로서의 시간은 다 잊었는지(아리가 출산한 아기 고양이들은 좋은 가족에게 입양갔다) 툭 하면 장난감을 물어와 어리광(혹은 명령)을 부린다.


집에 온 지 이틀 만에 거실에 나와 잠든 아리


아리를 보면 문득 생각한다.


그때는 어쩌다, 왜 길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을까? 길에서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떤 일이 있었길래 남자를 무서워하게 되었을까? 아리의 새끼고양이 시절을 함께한 사람은 누구이며, 어떤 이유로 아리를 버리거나 혹은 잃어버리게 된 걸까. 아리는 과거에 어떤 시간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까?


과거 있는 연애는 그만큼 조금씩은 성숙해져 있다. 다만 서로의 과거는 묻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나도 과거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쿨한 여친처럼 굴고 싶지만, 발라당 누워 아무 생각 없이 뒹굴거리는 아리를 보고 있자면 구차하게 자꾸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지긴 한다. 나의 이중적인 심리가 웃기지만, 더불어 과거 따위는 다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과거는 과거일 뿐, 중요한 건 지금과 앞으로의 '우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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