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강아지가 떠난 후
내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쭉 했지만, 내게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강아지가 있었다. 아지라는 성의 없는 이름을 지어줬지만 관계는 진실되고 깊었다. 아지의 이야기를 울지 않고 떠올릴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얼마 전에 아지가 꿈에 나왔다. 반 년 만에 보는 것이지만 아지와 나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무지개다리 너머에서 생생한 기운을 뿜어내며 잘 지내고 있겠지, 아마 그럴 것 같다.
사랑을 할 때는 사랑이 내 전부가 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 내 것은 나 좋도록 알아서 결정할 수 있지만 사랑은 나만의 것이 아니기에. 내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그의 마음이 나를 멋대로 세차게 흔들어놓지 않도록. 내 마지막 가슴 아픈 이별은 언제였을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와의 연애가 앞으로의 평생을 약속하는 결혼에 닿았기 때문에, 이별의 감각이 내겐 이제 가물가물했다. 이별이 아름답다 감상에 젖었던 건 이십 대 초반 정도까지로, 이후로는 아마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많은 인연이 무감각하게 잊혔을 것이다.
그래서 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 나는 이별에 대한 면역이 한껏 떨어져 있던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내가 얼마나 슬퍼하는 것이 이 이별의 무게를 달리 만드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무게를 덜어내고 싶은 만큼 자꾸만 울었다. 갑자기 울컥 하고 눈물이 나다가, 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또 눈물이 멎고 그랬다.
전날 밤에 내 눈에 담았던 모습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끝없이 반복됐다. 녹내장으로 하얗게 변한 한쪽 눈, 걷지 못하던 차가운 네 다리, 물을 삼키지 못하던 입, 하지만 쓰다듬는 손에 남아 있던 체온. 이제 와서 울면 무엇 하나, 아직 내 체온을 전할 수 있던 전날 밤 한 번 더 쓰다듬어주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을 텐데.
장례 후에 유골로 보석을 만들어주거나 고급 유골함에 담아주는 등 여러 가지 서비스가 있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멍하게 검색해보니 집안에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로서는 이미 떠난 후의 일이 의미 없게 느껴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 가져가 뿌려주었다.
떠난 날 날씨가 포근했으니, 무지개다리를 나폴나폴 사뿐히 걸어갔겠지, 그 길이 아름답고 즐겁기를 나는 바랐다. 죽은 뒤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봄처럼 아름다운 날이 꼭 이어져 있기를 애태워 소원했다.
그리고 한동안 이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생각하면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이별을 안고서 차츰차츰 일상으로 돌아왔다. 무언가에 마음을 주는 일은 이토록 버겁다. 아지를 보내고 나면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말아야지 생각했었는데, 내 곁에 있는 두 마리 고양이들이 그래도 나를 일상으로 끌어 데려와줬다.
그래, 별 도리가 없다. 마음이 아프다고 사랑의 기쁨을 영 봉인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별의 버거움만큼 벅찬 행복감도 우린 아니까. 그래서 또 끝이 있을 걸 알면서도 사랑을 시작할 수밖에는 없다. 다만 곁에 있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알기 때문에, 끝을 아는 그 시간을 더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