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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Aug 25. 2016

외로움이 고양이를 닮은 줄 알았다

쿨하지 못한 마음의 발견 

외로움을 겪어낸 이들은 안다. 사람은 모두 외로운데, 그 외로움은 어설프게 나누다간 더 외로워진다는 것. 차라리 각자의 외로움을 끌어안고 홀로 온전히 감내해냈을 때 덜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때로 약해지기보다 강해지는 것을 택하고, 조용히 몸을 웅크려 외부에서 오는 자잘한 고통들을 이겨낸다.      


고양이는 외로운 동물인 것처럼 보였다.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의 외로움이 닮은꼴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두 개의 삶이 만나 서로의 체온을 나눌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각자의 영역에서 고요하게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서로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는 않되, 그냥 가끔은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정도로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섣불리 꽁꽁 닫힌 문을 열어버리거나 얼어 있는 벽을 녹여 빨간 속살을 보여주고 나면 쉽게 상처받는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고양이는 본능적으로 아는 동물인 것 같았다. 그러니 그토록 고고한 걸음걸이로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홱 올라가 앉아 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을 쏟는 것은 어렵다. 아마 두려워서 어려울 것이다.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다른 이로 마음을 흠뻑 적시는 것은 나를 무방비 상태로 내어주는 일이라 쉽게 아프고 때론 숨이 막힌다. 쿨하게 사랑하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들까. 손가락 하나만 슬쩍 내밀며 시작했다가도 어느새 부풀어오른 크기에 짓눌려 너도 나를 좀 사랑해달라고 집착하는 여자가 되고 만다. 두 개의 삶이 겹쳐지면 나는 또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폭풍처럼 흐름에 휘말리다 보면, 왜일까? 사랑이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조용히 뒷걸음질 친다.      


그런 많은 날들이 있었다. 누군가와의 ‘우리’ 관계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노력이 필요하고, 기껏 해낸 노력이 별 볼 일 없었을 때 찾아오는 무력감과 실망. 그럴 바에는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고, 아무 것도 노력할 필요 없는 내 작은 세계에 틀어박히는 것이 나았던 날들.      


이렇게 혼자가 된 내 외로움을 알아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것은 또 싫었다. 혼자 골몰할지언정, 당신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그만이지, 하고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또 혼자가 되어갔다. 옆에 있어 줘, 손 좀 잡아 줘,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줘, 하는 약한 소리를 못해서 외로워지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기보다, 차라리 마음을 단단히 닫고 나의 세계에 틀어박혀 느릿느릿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강한 척하는 영혼들이.      


소중한 것을 하나씩 놓칠 때마다 온 세상의 채도가 한껏 낮아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노력하고 극복하고 싶은 의지가 없어 차라리 외롭고 말았던 그 순간에, 그저 한 공간을 나눠 쓰고 있는 줄만 알았던 작은 동물의 체온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던 것 같다. 결론을 말하자면 내 고양이는 그리 쿨하지 못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외롭고 예민한 동물이라는 것은 나를 향한 편견과 마찬가지로 내가 고양이를 향해 내밀었던 편견의 잣대였던 셈이다. 


내게 의지해 살아가겠다는 이 동물의 약함을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이 자그마한 세계를 기꺼이 내 삶에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건 무슨 뜻이냐면, 언젠가 네가 나를 떠나게 될 날에 내가 결코 쿨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을 주는 만큼 아프고 힘든 괴로운 무게를 견뎌내겠다는 섣부른 약속이다. 내 팔 위에 무방비하게 턱을 올려놓고 눈을 감는 고양이로부터 내 마음을 지켜낼 도리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그건 아마 내가 당신에게도 두려움에 앞서 적용해야 할 말랑말랑한 마음의 발견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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