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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Sep 25. 2016

여행지에서 '내 방'을 갖는 일

하이델베르크의 꼬리 긴 호스트  

지금이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1박이나 2박 정도의 짧은 여행이라면 주말과 연차를 이용해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직장인에게 긴 여행은 돈보다 타이밍이 필요한 법이다. 거의 2년 전 일이라 그때가 무슨 타이밍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시 회사 소속이면서 반쯤은 프리랜서인, 좀 특이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래저래 업무를 조율하면 한 번쯤 일주일의 긴 휴가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좀 무리를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15시간 비행을 해 유럽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7박 9일 동안 프랑스로 들어가 독일을 거쳐 벨기에에서 돌아올 생각이었다. 프랑스는 당연히 파리, 독일은 어련히 프랑크푸르트를 가면 되나 싶었는데 이미 다녀온 동생이 다른 도시를 추천해줬다. 남동생인데도 나와 비슷한 감성으로 높은 신뢰도를 쌓고 있는 터라, 주저하지 않고 독일에선 하이델베르크에 가기로 결정했다. 하이델베르크는 바삐 둘러보면 한나절이면 된다는 작은 도시였는데, 사진 찍으며 천천히 둘러볼 심산으로 이틀 동안 머물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떠들썩하게 새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숙소에서 잠잘 때만은 최대한 안심하고 싶어서 외국에 가면 웬만하면 호텔에서 자려고 한다. 그러다 에어비앤비라는 서비스를 알게 됐는데,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현지인의 집을 숙소로 빌리는 것이었다. 호텔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대의 방이 다양하게 있어, 독일 하이델베르크 숙소를 여기에서 고르기로 했다. 실제로 독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이 궁금하기도 했고, 내 마음을 굳히려 그랬는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의 가정집 하나에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내가 가려는 날짜에 다행히 방이 비어 있어 예약을 걸자, 호스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호텔 예약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지구 건너편에 있는 ‘실존하는 이’가 나의 예약을 확인했고, 그날 나를 맞이해주는 것이다. 가는 날을 기대하고 있겠다, 짧은 영어로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파리를 거쳐 마침내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다소 쌀쌀맞은 무채색 도시처럼 느껴졌던 파리를 떠나 낮고 화사한 지붕이 늘어서 있는 이 작은 도시에 도착하니 또 새로운 설렘이 샘솟았다. 



하이델베르크는 정말로 아주 작았다. 도시 전체의 지도를 켜놓고 내 위치를 확인하면서 걷다 보면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 적어온 주소를 보고 번지수를 확인하며 한 집씩 확인하며 걸었다. 에어비앤비는 빈 집을 빌려주는 경우와, 그 집에 호스트가 살고 있어 함께 지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미리 알고 있었듯 이곳은 집 주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그녀가 밝게 반겨주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주황색 곱슬머리의 그녀는 내가 쓸 방과 공용 욕실, 부엌 등을 소개했고, 흘깃 살폈지만 그녀의 고양이는 어디서 자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고 짐을 놓고 나와 이 동네의 유일한 관광지인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향했다. 여기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듯했다. 성벽의 색깔이 지붕 색깔들처럼 고왔다. 나는 오래된 건물에 감흥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해가 지고 날이 흐려져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니 성이 고유의 정취를 뿜어냈다. 성의 넓이나 모양에 압도당했다기보다는 역사가 진중하게 잠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음울한 날씨가 내려앉는 동안에도 성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능숙하고 덤덤하게 중심을 지키는 듯했다. 그 곁에서 나무 그림자는 차분하게 가지를 얽었다.



성에서 내려와 다음 날 거리를 걸어도 올려다보면 그 성이 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이질적이랄까 굳건하달까, 아무튼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독일 사람들은 저녁을 오후 4시에 먹는다던데, 정말일까? 그건 아직도 모르겠지만 오후 6시쯤 큰 번화가를 벗어나 동네에 들어서서 저녁 먹을 곳을 찾아보면 다 문을 닫고 없었다. 가게 문은 열었어도 지금은 식사는 안 되고 술만 판다, 그런 곳이 많았다. 겨우 밥 먹을 곳을 찾아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독일의 내 방에 몸을 눕혔다. 


잠시 씻고 돌아오니 뭐가 후다닥 움직여 침대 밑으로 숨었다. 놀라기보다는 내심 반가웠다. 온통 처음 접하는 것을 투성이인 이 먼 나라에서 며칠을 보내니 나는 종종 쓸쓸해지려던 참이었는데, 고양이라면 내겐 익숙하고 친근한 것이었다. 작은 고양이는 이내 분홍색 코를 뽐내며 나와 캐리어 위에 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앉았다. 


집 주인은 여행자의 불편함을 염려하여 편히 쉴 수 있도록 조용히 배려해 주었지만, 이 작은 꼬마 호스트는 거침없이 나에게 다가와 묻고 살피고 냄새를 맡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 얌전히 내보이며 이 집에서 머물겠단 허락을 맡았다. 



다음 날도 하이델베르크의 귀여운 거리를 구경하고, 1년 내내 크리스마스 용품을 판다는 상점에도 들렀다. 종일 걷다가 숙소로 돌아오면 사르르 긴장이 풀렸다. 하루 동안 자잘하게 산 포획물을 다시 들여다보며 정리하고, 와이파이를 잡아 남자친구에게 기별을 남기고, 그러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방문을 열면 언제부터 그 앞에 있었는지 고양이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닫혀 있는 문이 궁금해 못 견디겠는 모양이었다. 



사실, 누군가의 집에 놀러가거나 혹은 우리 집으로 초대하는 일은 그리 가볍지가 않다. 서먹한 친구를 집으로 불러본 적이 있던가? 집에 가는 일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의 취향과 사생활을 들여다봐야만 하는 행위다. 헌데 남의 집, 그것도 외국의 생판 모르는 이의 사적인 공간에 짧게나마 깃들겠다는 것이 차라리 비싼 호텔을 잡는 것보다 불편한 모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지구 저쪽에 사는 낯선 이의 반려생활을 짧게나마 공유할 수 있었다. 새하얀 침구가 갖춰진 청결한 호텔보다도, 누군가 나처럼 이곳에서 고양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감하는 것이 더 안심이 되며 친근했다. 한밤중에도 잠을 자다 일어나 낯선 손님의 다리에 몸을 부비며 아는 체를 하는 녀석 덕분에, 나의 짧은 독일 일정은 정말 집으로 돌아오는 듯한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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