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소곤 Aug 06. 2017

"도대체 어쩌라고?" 왜 시댁만 가면 아내가 삐칠까

아내가 원하는 남편의 중간역할

결혼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남편들의 혼란이 전해질 때가 있다. 아내가 시댁에서 느끼고 온 문제상황을 남편에게 제시했을 때, 대개의 경우 그들은 이렇다 할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인 데다가, 여태까지 심각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는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며느리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부담을 체감해본 적이 없어 그게 중요한 문제인지 아닌지도 감이 안 온다. 그렇다 보니 아내의 불만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투정' 정도로 들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많은 며느리들이 시댁에 가면 사소하고도(때로는 중대하고도) 속상한 일들을 겪는다. 한 번은 시댁에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 그리고 시누이 부부가 모이게 됐다. 술도 꽤 마시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어머니가 과일을 내주시자, 시아버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를 향했다. '며느리가 깎아주는 과일'을 먹고 싶다는 한마디를 듣고 내가 웃으며 슬그머니 신랑을 찔렀다. 평소에는 과일 깎는 걸 귀찮아하는 나를 위해서 출근하기 전에 과일을 깎아 도시락 통에 넣어주고 가는 그인데, 그냥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


과일 그까짓 거 깎아도 그만이지만, 자연스럽게 며느리의 역할처럼 떠넘겨지는 것은 싫어서 결국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며칠째 일하느라 잠을 잘 못자서 이미 한참 전부터 집에 가고 싶었는데, 오랜만에 남편이 가족들과 분위기가 좋은 것 같아 나름 긍정적인 마음으로 버티고 있던 참인데 말이다. 


'우리 집이니까 내가 할게.'


남편이 그런 말 한마디만 했으면, 그를 위해 기꺼이 내가 과일 정도야 깎았을 수도 있겠지만.




시어머니가 내게 요리나 설거지를 시키신 적은 없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며느리에게 부엌일이 요구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게다가 남편이 방관하는 이야기라도 들으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시댁에서 설거지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단순히 노동의 강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남편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내가 시댁에서 설거지하는 것과 그가 친정에서 설거지하는 것은 노동의 강도는 같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내재된 원인과 행동 결과가 다르다. 남편은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은 상태에서 본인의 선의로만 선택하는 것이고 받는 쪽에서도 그렇게 여긴다(사위가 설거지하도록 내버려두는 장모님도 별로 없겠지만). 반면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한 역할 부여 속에서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직장에서 동료의 일을 도와주었을 때 그가 고맙게 여기는 것과, 동료가 당연한 듯 자신의 일을 덜어 얹어줬을 때, 그 노동의 총량은 같지만 내 기분이 다르다는 걸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시댁에서 설거지하는 아내에 대한 남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당연한 듯 신경 쓰지 않는 경우, 그리고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눈치를 보며 뭐라도 거들고자 하는 경우. (그 밖의 예외적인 경우는 일단 논외로 한다.)


언뜻 보면 후자가 바람직해 보인다. 내 지인도 시댁 행사가 있을 때 가면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데, 남편이 옆에서 '뭐 좀 도와줄까?' 하고 어슬렁거리면 눈치가 보여서 차라리 저리 가라고 쫓아낸다고 한다. 물론 남들 다 꺄르르 놀고 있는데 혼자 서서 설거지하는 마음속은 편치 않다. 그러면 남편은 도통 알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아내가 원하는 건 뭘까? 고마워하고 있고, 미안한 마음도 있고, 도와줄 의향도 있는데 대체 뭐가 불만인 걸까.


아내가 원하는 건 '며느리가 해야 할 일'을 남편이 '도와주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 살아온 내 집도 아니고, 남의 집 부엌에서 일하는 게 편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자기 집이니 뭐든 스스로 하면 될 텐데, 선뜻 남편이 나서지 않는 이유도 대개 레파토리가 있다.


'난 안해봤어.'

'내가 하면 엄마가 싫어해.'

'안 하다가 갑자기 하면 자기가 시켜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잖아.'

'네가 해야 우리 엄마한테 점수 따지.'


결혼하고 나서도 자신은 똑같이 손 하나 까딱 않는 아들 노릇을 하면서, 마찬가지로 집에서는 귀한 딸인 아내에겐 갑자기 변하기를 기대하는 걸까? '집안일을 해서 시댁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발상도 문제다. 아들이 손 하나 까딱 안 하게 해야 좋은 며느리라고 생각하는 시어머니라면, 굳이 점수를 따둘 필요도 없다. 그게 당연해지면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되어 스트레스만 가중될 뿐. 남편도 물론 친정집에서 점수를 따려 애쓰기는 하지만, 실제론 '백년손님' 대접 받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이런 마음으로 아내의 곁을 맴돌며 시댁 설거지를 좀 거든다고 해도, '사회가 부여한 며느리의 역할을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전제하에 아내를 돕는 것일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내 남편도 처음엔 내가 시댁에서 불편하게 들었던 말이나 상황을 이야기하면 '어른들 생각이 쉽게 바뀌는 게 아닌데 어떡해' 했고, 그 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물었다. 시댁과 아내, 그 중간에서 뭘 어째야 할지 모르는 남편들에게 나는 '명료한 입장 정리'를 권하고 싶다.


'엄마, 우리 집이니까 내가 하면 돼요.'

'여자들만 일하는 게 어딨어? 다같이 해요.'

'와이프 직장이 바빠서, 이번에는 못 가요.'

'우리 집 제사에 어떻게 와이프만 혼자 보내? 나도 처갓댁 혼자 가면 어색한데.'


애매하게 쭈뼛거리지 말고, 그렇게 말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부부는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머뭇거려진다면, 사실은 내심 '시댁 일은 며느리가'라고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지 자신의 마음속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혼해서 새 가정을 꾸리면 새로운 가정 규칙이 생긴다. 성인이 된 두 사람이 합의하에 두 사람만의 행동규범을 정하게 된다. 그걸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과정은 독립된 하나의 가정으로서 아주 중요하다. '(결혼 전)우리 집은 원래 이래'로 한쪽 집안의 습관과 규칙을 일방적으로 답습할 수는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과정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부모님과의 갈등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남편이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 과정이다. 중간 역할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싫으면 하지 마!'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는 건 그저 귀찮은 일에서 빠지고 싶은 회피에 불과하다. 내 남편의 경우는 초반에 '안 해도 돼, 그냥 앉아 있어'라며 나를 끌어당기곤 했다. 시댁인 걸 떠나 낯선 집에서 어른이 일하시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고, 그런데 남편은 아들이라고 가만히 엄마가 일하는 옆에서 휴대폰이나 하면, 그 사이에서 이제 막 가족으로 편입된 낯선 며느리의 입장이 곤란하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웬만한 변태가 아니고서야 갈등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아내도 똑같다.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닌데, 남편이 중간에서 노력해주지 않으면 갈등 속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내몰고 방관하는 꼴이 된다. 결혼했다고 즉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되려고 차근차근 노력하는 중이니, 그 융합제 역할은 남편이 해야만 한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물론 아내가. 


결혼해도 엄마 품에, 아내 없인 물도 못 떠 먹는 남편이 성인으로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입장일 수 있을까. 설거지도 할 줄 모르고, 과일 깎을 줄도 모르는 게 자랑인 귀족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했다고 갑자기 설거지를 한다고 나서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똑같이 살아온 아내에게도 그 얘기를 적용시켜주는 것이 당연하다. 결혼 후 신혼집도 아닌 부모님 댁에서 집안일의 역할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 좀 어색할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함께 괴로워지느니 '결혼해서 철든 아들'이 되는 편이 낫다. 

매거진의 이전글 틈틈이 행복도 해야 하는 나이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