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곤 Oct 23. 2017

결혼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말들

결혼 제도에 대한 각자의 검증이 필요하다

한국 남자랑 결혼하는 건 좀 별로야.


한국 남자랑 이미 결혼한 내가 듣기에는 움찔하게 되는 말이지만, 여러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다 보면 한 번쯤은 꼭 이런 말을 듣는 것 같다. 주변 친구들 중 절반쯤은 결혼을 했고 나머지 절반쯤은 하지 않아 조금씩 삶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는 시기이다 보니, 아무래도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화두에 오른다.


왜 결혼은 이제 마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점차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까? 실제로 조사에 따르면 '결혼이 필수'라는 인식은 2016년에 51.9%로 그 전에 비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특히 남성보다 여성이 결혼의 필요성을 덜 느낀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꼭 요즘 비혼주의 남녀가 많아지는 세태 때문이 아니더라도,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은 자주 듣지만, 사실 우리는 결혼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결혼 후에 찾아오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기 어렵다. 결혼하기 전에 우리가 흔히 논의하는 것은 기껏해야 상견례를 어디서 할 것인지, 결혼 후에 집안일 분담은 어떻게 할 것인지, 양가 용돈은 얼마씩으로 합의할 것인지 정도다.


나 역시 남자친구와 2년의 연애 끝에 20대에 다소 이른 결혼을 했는데, 그때는 사실 룸메이트로서의 동거와 법적 공동체가 되는 결혼이 뭐가 다른지도 잘 몰랐다. 그저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가 갑자기 한 집에서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막연히 덜컥 겁이 나곤 했다. 그때 내가 생각한 현실은 그런 것이었다. 데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안경을 끼고 앞머리를 핀 꽂아 올린 뒤 화장을 지우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이 본연의 삶은 이제 끝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 차라리 그냥 이웃처럼 옆집에 살면 어떨까? 밤에는 같이 야식도 먹고 영화도 보다가 각자 자신의 침대로 돌아와서 자면. 집값이 얼마나 비싼지 미처 몰랐을 때는 결혼의 부담스러운 점은 빼고 즐거운 점만 쏙쏙 빼먹을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막상 결혼을 하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을 내고 밥을 사먹으면 뒷정리는 남이 해주던 수많은 나날들과 달리 이제 우리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꾸미지 못한 민낯을 보여주는 것보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자질구레한 흔적들을 공유하는 것이 훨씬 큰일이었다. 또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온 우리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서는 얼마나 비슷하고 혹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사실 내가 결혼 전에 제일 걱정했던 것은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가 혹 바람이라도 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면 불안감에 결혼을 망설였을지도 모르지만, 웃기게도 그에 대해서는 온전히 신뢰하는 한편 나 스스로의 마음이 미덥지가 않았다(그도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니 ‘저 사람이랑 잘되면 어떨까?’라는 상상의 단계가 없어지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에게 이성적인 흥미가 생기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결혼 전에 고민했어야 했던 것은 ‘평생 사랑할 수 있을까’보다 ‘결혼이라는 제도 하에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던 것 같다.


기존의 결혼 제도는 나를 퇴행시킨다


연애 시절, 남편의 프로포즈를 받고 나서 결혼까지 8개월이 걸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건 설레는 일이었지만 결혼 제도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다. 특히 일명 ‘시월드’에 대한 불안감은 고모들 틈에서 혼자 제사 음식을 하는 엄마를 보던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오던 것이라 그 몸집이 제법 컸다. 듣자하니 별의별 시어머니가 다 있다는데, 내가 몰랐던 모습들이 결혼 후에 툭툭 튀어나오면 어쩌지?


나는 시댁에서 내게 불합리한 요구를 할까봐 지레 걱정되는 것보다, 혹 그런 상황이 왔을 때 내 남편이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처를 해서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까 하는 점이 더 걱정이었다. 그로서도 처음 겪는 일들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면 황당할 것이다. 결혼했는데 시댁에서 이러이러하면 어떡해?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우리 엄마는 안 그래."


아, 너도 DNA에 그 말 새기고 태어났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한 뒤 인내심을 장착하고 딱 그 시점부터 시작해서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은 그 말 자체가 틀렸다는 점을 지적해야 했다. 아무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은 겪어봐야만 아는 것이고, 실제로 상황이 닥쳤을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판단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기야, 너희 엄마는 안 그러시지만 내 시어머니는 그렇다는 말 들어봤어?


평소에 집의 명절 풍경은 어떠한지, 그때 여자들만 일하는 것에 대한 네 생각은 어떤지, 우리가 결혼 후 양가 연락이나 방문은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우리에게 갑자기 경제적 시련이 닥쳐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만약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 같은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심지어 결혼 후 친구에게 빌려줄 수 있는 공공의 돈의 상한선까지 합의해서 정했다(물론 보증은 안 된다).


이 과정에 대해 그냥 솔직하게 딱 말하면, 결혼 제도에 대한 서로의 가치관이 어떠한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각자 머릿속에 결혼에 대한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리고 살아왔을 것이다. 남편의 머릿속에서 시어머니의 역할이 미래의 아내에게 요구되는 역할일 수도 있다. 아내의 상상 속에서 남편은 우리 집안을 경제적으로 이끄는 가장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집에서, 드라마에서 배워온 남녀 성 역할과 결혼 제도가 요구하는 의무를 그대로 따를 것인가? 지금의 결혼 제도는 과연 올바르게 정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각자 결혼 후 어떤 삶이 올바르다고 믿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믿는 방향으로 살아갈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남자에게 지나친 가장의 무게를 지울 수도 있고, 여자에게 개인의 삶에 대한 포기와 가정에의 헌신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나는 여태껏 누군가를 내조하거나 따르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가꾸는 방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한국의 결혼 제도는 여전히 가부장적인 과거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내게 종종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면모를 지니기를 요구한다. 일명 '며느리 도리'를 해야 내가 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여긴다. 


중요한 건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때로 납득할 수 없는 규칙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터트리지는 않을지언정)솔직하게 분노한다. 그런데 가정에서마저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제도를 참고 따르며 살아갈 수 있을까? 당장 사회가 바뀌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부부 간에는 이 문제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알아두어야 한다. 전통적인 결혼 제도에 대한 무언의 동의를 해버리면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결혼하면 이래야지’ 하는 수많은 오지랖은 우리 개개인의 성향과 환경에 맞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엄마랑 쇼핑도 가고 그래', '명절? 빨리 가서 (며느리인 네가) 엄마 일 도와줘야지' 하고 효자 행세를 하는 아들이라면 결혼 후 여자의 역할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힘들다고? 너 하나만 참으면 모두 편하잖아'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라면(대놓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그 은유를 알아들어야만 한다) 그는 결혼할 준비가 아직 안 됐다. 집안마다 환경과 가치관은 다르니 꼭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서로가 어떤 미래를 떠올리고 있는지는 두 사람의 퍼즐을 맞춰볼 필요가 있다.


나 역시 우리 각자의 가치관과 앞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일치하는가 하는 점은 결혼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독립적인 가정이 되고 싶었다. 결혼했다면 우리 부부가 서로에게 1순위가 되길 바랐고, 제도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따라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적어도 남편과 떠올리는 결혼생활의 거리가 너무 멀면 안 됐다.


그리고 다행히 나는 우리가 전통적인 역할과 사회적인 시선보다 우리 둘의 의견에 집중할 수 있는 관계라고, 서로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면 나도 그를 위해 그쪽으로 한두 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결혼을 앞두고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이야기는 스드메에 대한 논의에 앞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각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거리를 재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 거야
결혼했지만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한국 남자랑 결혼하는 건 별로’라는 말이 꺼림칙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 말이 ‘한국 남자’라는 집단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한국의 결혼 제도 속에서 결혼한 나의 삶이 각종 속박에 매여 불편할 것이 분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외국 남자랑 결혼하면 다 행복할까? 결혼이 아무리 집안의 결합, 사회적 제도라 한들 결국은 당사자인 개개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는 점만큼 중요한 건 없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불합리한 요소가 있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다. 불편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오래된 제도와 낡은 관습 때문에 내 삶을 퇴행시킬 수는 없으니까. 결혼 제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불행해지지 말고, 불편하고 갈등하더라도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고 싶다. 오래된 고정관념과 세상을 다 바꿀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는 그래서 비혼을 선택했다면 나는 지치지 않고 부딪치며 문제 제기를 하고 싶다. 적어도 ‘행복하려고 한 결혼인데, 이게 정말 맞아?’라는 의문을 던지고 싶다.


결국 결혼이라는 일생 최대의 놀라운 결심을 통해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 부부에게는 결혼 전부터 그 많은 대화와 갈등과 의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 새내기 부부인 우리에게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전 01화 내 고양이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