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운명의 제안

ㅡ 계약

by 달 가는 물고기

"할멈!"



멀리서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승이 가뿐한 걸음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큰 어른을 맞이하듯 아이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것이 각희의 시야에 어렴풋이 들어왔다.



"영혼 하나를 구하려면 어찌하면 좋겠...?"

"안 됩니다!"

"아니, 왜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탈의파의 음성이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그 말에 동자승의 귀엽고 매끄러운 미간이 언짢은 듯 구겨지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한 물기가 내비쳤다.



"아. 글쎄 안 된다니까요? 이제 보니 이리 떼를 쓰시려고 이런 어린아이 모습으로 오셨나 봅니다."



탈의파의 핀잔 섞인 말에 동자승은 잔뜩 부풀린 입을 삐죽이더니 몸을 홱 돌려 의령수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자 크고 우직한 나무는 조심스럽게 잎을 떨구며 가지를 수그렸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탈의파는 손바닥을 탁 치며 동자승의 어깨를 각희 쪽으로 돌렸다.



"저 대책 없는 물건 좀 데리고 가 주십시오."



노파가 각희를 동자승 앞으로 밀어내자, 그녀를 덮고 있던 안개가 사라졌다.



"참으로 어여쁜 이가 아닙니까?"



각희를 본 동자승의 눈동자는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환하게 밝아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니 조심하세요. 지장."



지장? 각희는 놀란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불쌍한 어린 영혼을 인도해 준다는 지장법사는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라 들었는데, 눈앞의 꼬맹이가 지장법사라고?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금세 가늘어졌다. 순간 아이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내 청은 듣지도 않으면서 심부름부터 시키십니까?"



동자승은 새침한 얼굴로 탈의파에게 따지듯 물었다.



"법사께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탈의파는 의미심장하게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동자승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더니 다시 의령수를 노려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서 쫓아가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게냐?”



현의옹이 재촉하듯 각희의 등을 떠밀었다. 그 작은 몸이 발걸음은 얼마나 빠른지 각희는 그 뒤를 부지런히 쫓아가는 데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뒤를 쫓는데 어쩐지 험한 산을 찾아 들어가는 것처럼 길은 어둡고 음침했다. 저 꼬맹이가 정말 지장법사가 아니면 어쩌지? 설마 염라대왕의 끄나풀인가? 그 할망구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할 리가 없을 텐데. 각희의 머릿속은 온통 의심의 꼬리가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그렇게 막다른 길이 나올 때쯤 앞서 가던 동자승이 깡충거리며 각희에게 다가왔다.



"보아하니 망자는 아니고, 그쪽이 그 유명한 생령귀시오?"

"진짜 지장보살님은 맞으십니까?"



동자승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법명을 묻는 것이라면 맞습니다."



순식간에 어둠이 걷혔다. 각희 앞에 있던 동자승은 사라지고. 대신 긴 지팡이를 든 나이 지긋한 비구니가 서 있었다.



"선자님의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각희라 합니다."

"각희는 선자님의 진짜 이름이 아니지요"



각희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이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이곳에서 구천을 떠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떠도는 저승이 들이 붙여준 이름이 언제부턴가 제 이름이 되었기에, 딱히 그 이름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럼, 어차피 기억하는 것이 없으니, 조금 다른 세상에서 살아보시는 것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각희는 지장의 말에 머리를 갸웃거렸다. 다른 세상이라니, 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저승에서 또 다른 세상이라면 이승밖에 더 있을까.



"다른 길을 찾는 것도 선자님께는 좋은 방법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각희는 잠시 멍한 눈으로 지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렴 어떠랴. 지긋지긋한 구천만 아니면 됐지.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입에서 선 듯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지금 사방에 그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아시오?”



어찌 모를까. 삼도천에 들어가기 위해 구천을 그토록 헤집어 놓은 것이 바로 그녀였다. 이제 저승 어디에도 자신이 숨을 곳은 없었다. 뭐 어차피 이곳은 곧 떠날 자리, 불지옥만 아니면 되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저를 만난 것이 선자님의 운이 아니겠습니까?”



각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다른 이도 아닌 지장 법사를 만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 이던가. 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러나 마음과 다르게 이상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불안할 정도로 일이 너무 순조로웠다. 흉측한 우물을 달고 다니는 각희가 이렇게 일이 순조로울리가 없는데....



“음.... 혹시.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고 싶지는 않으신지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법사가 살며시 웃음을 흘린다. 뭐에 홀린 듯 각희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의 삶?”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분명 자신을 구원해 줄 든든한 동아줄이라 여겼는데. 아니었을까.



“구해주고 싶은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는 말에 각희 눈동자가 다시 반짝였다. 멍했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어떤 부탁을 말씀하시는지. 불법만 아니면 모두 들어 드릴 것입니다.”



깊게 그늘졌던 각희의 얼굴이 당장에 활짝 피었다. 부탁이 대수가 아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귀인이 부탁을 하는데. 안 들어줄 리가 없다. 오히려 부탁을 해 온다면 그녀 쪽에서 감사할 일이었다.

불법만 아니면. 가령, 살아 있는 인간의 몸에 빙의를 한다던가.



“한 아이의 인생을 잠시만 대신해 살아 주십시오.”



이 어수선한 구천에도 나름의 질서와 암묵적인 계율이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의 염라가 귀가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더 질색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빙의였다. 빙의는 염라가 제일 싫어하는 불법 중에서도 가장 큰 죄목이었다.

오늘 벌인 일을 생각하며 그 죄목까지 추가하자, 각희는 머리가 아찔했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지장은 해맑게 웃음 지었다.



“잠시 동안입니다. 허니 불법은 아니지요. 몸을 빼앗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굳었던 각희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의 귀인께서 불법을 자행하실 분이 아니시다.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닙니다. 저승 시간으로 딱 하루, 그 몸으로 살아주시면 됩니다.”



저승 시간으로 하루라면 이승 시간으로는 기껏해야 1년 정도의 시간이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혹, 불법이라 염라에게 잡히면 지장 법사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하면 그뿐이다. 이건 그녀가 원한 일이 아닌 시켜서 했을 뿐이니.

곧 무거웠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아,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맡겨만 주시오. 내 잘 살아낼 것이니.”



어떻게든 구천을 벗어나는 일이다. 각희는 방글거리는 미소까지 지으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그리고?”



끝날 것 같았던 말이 끝나질 않는다.



“혼인을 하셔야 합니다.”



혼인, 각희는 절로 므흣한 미소를 지었다. 그 중요한 이야기를 왜 이제 꺼내시나. 설마 지장이 빌려 주는 그 몸이 혼인을 못한 처자인 건가?



“혼인, 그까짓 것은 더 어렵지 않소. 나를 모르시오? 접니다. 각희! 혼인, 까짓것, 어려운 일도 아니...”

“푸른색 영을 가진 이여야만 합니다.”



각희는 이때 깨달았다. 역시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어쩐지 오늘 하루 종일 귀인이 풍년이라 했다. 생령귀 주제에 이리 운이 좋을 리가 없지. 해맑았던 각희의 얼굴에 조금 전 보다 더 어두운 그늘이 졌다.

죽어서나 볼 수 있는 영혼의 색을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구별하란 말인가.



“반드시 그리하셔야 합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지장 법사의 말투는 단호했다. 각희는 지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온화한 비구니의 미소에 찰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지나친 것은 잘못 본 탓이 아니다. 그럼 그렇지.


시시각각 변하는 각희의 얼굴을 모른 척 지장은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그 앞에 작은 탁자가 나타나고 그 위에 하얀 종이와 먹이 조심스럽게 허공에서 따라 나왔다.



“자, 이름은?”

“저는......”

“아차, 모를 것이고...”

“그것이.....”

“태생도? 모를 것이고...”

“.....”



뭔가 말을 하려던 각희는 입을 다물었다. 지장은 누군가에게 묻고 답하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제야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왠지 무시무시한 덫에 걸린 기분이랄까. 이제 보니 귀인은 무슨 귀인.



‘어쩌긴, 그냥 계속 구천을 떠돌며 살면 되지.’



어디선가 현림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돈다. 그렇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모두 그 자 때문이다. 그 자를 만나고 나서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지장은 아무 말 없이 각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소는 따뜻했지만, 뭔가 거슬렸다.



"그럼 이제 선택을 하시지요."



그 말과 함께 지장 법사의 손끝이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각희는 자신도 모르게 뒷 걸음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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