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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06. 2016

고베의 그린게이블즈

담쟁이 기억

그린게이블즈 부엌은 기분 좋은 곳이었다. 흠이라면 지나치게 깨끗이 정돈되어 여느 때는 사용되지 않는 응접실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동쪽과 서쪽에 창문이 있었다. 뒤뜰 쪽으로 난 서쪽 창문에서 흘러드는 부드러운 6월의 햇빛이 온 방안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러나 동쪽 창문은 새파란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그 잎새들 사이로 왼쪽 과수원의 만발한 하얀 벚꽃과 시냇가 움푹 파인 땅에 날씬한 가지를 뻗고 서 있는 자작나무가 보일 따름이었다.


 일본, 고베시, 기타노이진칸의 시작이자 끄트머리에 있는 고즈넉한 주택들, 그 중에 녹색지붕의 마른 담쟁이가 온 벽을 뒤덮고 있는 낡지만 깨끗한 집에 시선이 갔다. 집 앞은 한적한 도로와 산책로를 끼고 있는 작은 산, 한쪽 눈을 다쳤는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한 낮의 따듯한 볕을 쬐고 있었다.

마른 담쟁이가 시선에 자꾸 걸린다.

우연히도 집 안을 들여다 보니 작은 정원처럼 꾸며진 곳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길게 가지를 뻗어 나무 밑 의자 위에 그 그림자가 걸쳐저 있었다. 의자 열에 놓여진 하얀 티테이블 위에 누군가가 앉아서 방금 마셨을 푸른색 머그컵도 올려져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둥근 이층 창문으로 햇살이 넘어가고 있었다. 11월의 담쟁이는 잎이 마르고, 모세혈관처럼 마른 줄기들이 벽을 타고 창문을 에워싸고 있었다. 창문너머로 어슴프레 비치는 벽에 걸려있는 옷가지들. 잠시 창문이 열리나 싶더니 바깥에 있는 우리를 의식한 듯이 창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처럼 고집스럽게 닫혔다.     


대부분의 집들이 유럽식으로 지어져 있는 기타노이진칸의 주택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부부들의 뒷모습조차 이국적이다. 유럽에 대한 동경과 화려한 야경의 도시. 그러나 그 화려함 한쪽 구석에서 보게 된 사과나무와 담쟁이가 있는 초록지붕. 불현듯 그린게이블즈의 앤이 떠올랐다. 소설 속의 앤처럼 풍부한 상상력과 아이처럼 솟아나는 온갖 미사어구들이 한보따리는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비주얼이다.  모든 집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벽을 자랑하는 그 가운데 홀로 시든 담쟁이를 둘둘 감은 그 집은 당연히 눈에 띨 수밖에 없었다. 산책길이라고 하기엔 조금은 가파른 비탈길. 큰 빌딩과 호텔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은 한 쪽 구석에 고베의 그린 게이블즈는 조용히 꿈을 꾸듯 머물러 있었다.          


내가 살았던 곳에도 담쟁이로 둘러싸인 집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앞 슈퍼에서 불량식품을 하나 사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시장으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설 때면 꼭 그 집 앞을 지나야 했다. 초록지붕에 빨간 벽돌과 선명한 초록의 담쟁이 잎들이 무시무시하게 덮여 있었다.  그리고 굳게 닫힌 창문, 보통의 안이 비치는 대문과 달리 끝이 뾰족한 화살촉을 박은 그 거대하고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푸른 대문은 1년 365일 열린 적이 없었다(정확히는 열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저 집은 분위기가 너무 음침하지 않아? 불도 켜져  있는 걸 못 보고, 사람이 살기는 할까?”

“사람이 있긴 하나봐. 옆 반에 어떤 애가 며칠 전에 저 집 대문이 열려 있는 걸 봤대. 왠 아저씨가 마당에서 칼을 갈더라는 거야. 그런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 이쪽 길로는 안다니고 싶다나봐.”

“야. 그런말하지마! 무섭게. 나는 매일 다녀야 하는 길인데...”

“아무튼 사람이 잘 없는 게 분명해.”     


 수상한 것은 분명했다.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겉으로 보는 그 집 주변은 늘 깨끗했고, 여기저기 삐져나와 지저분해지는 담쟁이들은 항상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조금 늦게 나와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처음으로 그 거대한 푸른 대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중앙에는 물을 쓸 수 있는 깨끗한 마당과 한 켠에 심어져 있는 여러 그루의 모과나무와 대추나무. 슬쩍 들여다 본 집 안마당은 잘 다듬어진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투명한 통유리너머 환하게 켜져 있는 거실에는 그냥 보통의 가정집처럼 쇼파와 tv, 소박한 거실장들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 때 50대 중반의 한 아저씨가 작은 가위를 들고 나오더니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쇳돌에 작은 가위를 갈기 시작했다. 신기한 눈으로 멍청히 그 모양을 보고 있었는데,  반대편 빌라에서 요란하게 치장을 한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빠르게 푸른 대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유리가 깨지는 것같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이 김씨!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담쟁이가 아주 지붕 꼭대기까지 덮을 기세야. 저거 좀 치워요. 음침해 보여. 매일 잠도 못자고 이 시간에 피곤하지도 않아요?"     

그때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그 김씨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와 내 친구들이 상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옆머리를 기름을 발라 귀 옆에 붙이고, 흰색 와이셔츠와 정장바지에 어울리지 않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는 막 퇴근을 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퇴근길에 보니 좀 손질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에휴, 그래 안사람도 같이 들어 왔어요?"

"네, 아마 자고 있을 거에요."

"아니 이제는 좀 편하게 살아도 될텐데. 아니 사람이 밤에 자고 낮에 일을 해야지 그렇게 밤낮이 바꾸면 잠은 제대로 잘 수 있대요?"

"그러니까 암막 거튼을 늘상 쳐놔요. "     

멋쩍게 웃는 그의 선한 모습을 보며 나는 잠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알았다. 우리들이 몰랐던 사실. 그 집창문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던 이유.

아이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있는 붉은 벽돌의 큰 이층집. 알고보니 음침해서 학생들이 무서워한다는 학교 측의 민원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민원이 있든 말든 그 집 아저씨는 웃으면서 자야하는 사람이 있는데 암막커튼은 절대 못 뗀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후로 큰 푸른 대문이 종종 열려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 대문이 굳게 닫혔을 때의 호기심과 달리 아이들은 대문이 열린 후로는아무도 그 집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곧 우리들의 기억에서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림 #에세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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