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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02. 2020

#2 큰 기러기를 구하다

ㅡ  아내를 죽인 남자

쉭! 쉭! 어디선가 검은 암기가 사방에 뿌려지듯 묵철 일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혼비백산한 틈에 묵철은 모녀를 놓치고 말았다. 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송화부인을 끌고 대웅전 안쪽 소나무밭으로 도망쳤다.     

피를 흘리는 어미를 부여잡고 휘는 눈물을 터뜨렸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자신 탓인 것만 같았다.      


‘너의 피는 저주의 피다. 멸망한 왕족에게 신궁의 피가 다 무엇이더냐! 아비를 잡은 것도 모자라 제 어미도 잡아먹겠지!'     


현재 대방군왕인 부여경은 선대 대방군 부여 덕장의 동생이었다. 부여 덕장이 병으로 죽자 그는 아들이 없는 덕장을 대신해 군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꽤 인자한 군왕이었다. 그러나 군왕으로 즉위하고, 사찰을 짓기 위해 무녀에게 받은 신탁이 문제였다.      


'북쪽에서 현무가 일어나니, 큰 기러기를 바랄 것이다!'     


신탁은 그 해에 태어난 부여 덕장의 둘째 딸 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부여경은 차마 조카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금전산에 내쳤다. 공주로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건안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왕족. 그녀가 바로 부여 휘 였다.      


“정말 저 때문입니까? 저 때문에 어머니가 이리되신 것입니까?”     


송화 부인은 울부짖는 딸의 얼굴을 안타깝게 쓸었다.     


“그렇지 않단다. 얘야, 아가! 울지 말거라.”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누가 좀 빨리….”     


덜덜 떠는 딸의 손을 잡고 송화 부인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그때였다.

소나무 숲 사이로 천천히 유영하듯 하얀 백의를 입은 남자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크고 날렵한 몸매를 가진 사내는 하얀 유모를 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마치 하늘에 사는 선인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 내려온 것 같았다.     


 “건안성의 군사들이 산 밑까지 진을 치고 있으니, 어서 내려가 도움을 청하십시오.”


맑고 또렷한 중저음의 목소리.     

 늘어뜨린 유모의 비단 천 사이로 언뜻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붉은 입술과 하얀 피부가 드러나려던 찰나, 그는 서둘러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내려온 것처럼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휘는 재빨리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하늘로 솟은 것처럼 선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래도 국모 대왕께서 오늘 우리 목숨을 살려주신 것 같구나. 쿨럭쿨럭!”          


송화 부인은 딸의 품에서 연신 힘든 기침을 내뱉었다. 때마침 공주와 부인을 찾는 군사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          


경운(景雲) 원년(710) 낙양          


"그런 부도덕한 자를 살려두려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카랑! 카랑! 날 선 여인의 목소리가 자정전 집무실을 뒤흔들었다. 양쪽으로 높게 틀어 올린 고계머리의 금빛 화환이 화려했다. 하얀 살빛이 환히 보이는 얇은 나피삼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가슴까지 끌어올린 노란 황금빛 비단 치맛자락은 그녀가 올라 선 자리를 유려하게 뒤덮었다.      


 태평 진국 공주(665-713) 이름은 영월, 당 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에 태어난 막내딸로, 측천무후가 가장 아꼈으며, 당륭정변으로 위황후 일당이 숙청된 뒤,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된 여인이었다.      


"지성이 죄가 없음을 누구보다 고모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임치왕은 태평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임치왕 이융기는 위황후 일당을 제거한 당륭정변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이었고, 태자 책봉이 유력했던 황자였다. 훗날 현종으로 즉위하는 그는 이번 정변으로 측천무후와 위황후, 다시 태평공주로 이어지는 권력 구도를 경계하고 있던 참이었다.     


태평공주는 모후인 무측천을 쏙 빼닮은 여인이었다. 이 오만한 공주 앞에 있을 때면 이융기는 자연스럽게 측천무후를 떠올렸다. 모후인 덕비 두 씨를 죽인 여인, 측천무후에 대한 그의 원한은 사해 四海가 다 마른다 해도 모자랄 만큼 깊었기에 태평공주 앞에서 이융기는 몸이 쥐어짜는 고통으로 이가 덜덜 떨려왔다.     


“그 아이가 천박한 위 씨 일당들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이융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온몸에 퍼부은 듯한 향유 냄새가 역하게 그의 코를 찔렀다.     


“고모님!”     


그가 작게 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더러운 것은 어차피 같지요."     


그녀가 손에 쥔 용피선이 흔들릴 때마다 짙은 사향 냄새가 풍겼다.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왕성 어디선가 정부를 끼고 이불 속에 있었을 시간. 그녀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태평공주는 눈앞의 이융기를 느릿하게 훑었다. 영민하게 생긴 얼굴,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매, 호방한 성격, 문무와 재기까지 출중하게 갖춘 왕재 중 왕재. 측천무후는 이 아이를 왜 살려두었을까. 이융기를 어려서부터 보아온 그녀였다.


고종 황비였던 무후는 스스로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당에서 주로 바꾸었고, 영리하고 재능 있는 이 씨 당황족들을 살려두지 않았다. 두고두고 후환이 될 싹은 애초에 잘라내는 것이 측천무후의 방식,      


잔인한 여제에 의해 멸문을 당한 황족들은 셀 수없이 많았다. 이미 죽은 사람은 그 관을 꺼내 참수하는 부관참시도 서슴지 않았으니, 그녀가 당황실에 꺼내든 칼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태평공주는 두 눈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지금 권력 중심에 있는 태평공주는 모후와 다르고 싶었다. 그것은 과연 망상인 걸까.           


 조카를 내려보는 태평공주의 마음에 서릿가을의 갈대가 돋아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모후가 왜 그렇게 잔인하게 황족들을 죽였는지.     


그것은 두려움.     


권력은 가질수록 마음의 두려움은 커졌고, 커진 두려움으로 인해 사람은 나약해 졌다. 이 나약함을 떨치기 위해 또다시 권력에 집착하는 악순환은 절대 멈출 수 없는 욕망의 연결고리였다.     

 한 달 전, 위황후를 끌어내리기 위해 대명궁 함원전 문이 열리고, 눈부신 후광을 받으며 우뚝 서 있던 사내, 붉은 갑옷과 허리에 찬 긴 칼에 가볍게 손을 얹은 채 성큼성큼 들어오는 이융기의 풍모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그때 그에게 보였던 여유로운 미소, 그 잔상은 태평공주의 머릿속에 잊히지 않고 각인됐다.


"강제 혼인이었습니다.”

“숭국부인은 위 서인의 여동생입니다!”     


태평공주가 이융기의 말을 잘랐다.

숭국부인 위 자연. 태상소경 풍태화의 아내였던 여자였다. 그녀의 남편이 죽자 위후는 과부가 된 여동생을 황족인 지성과 혼인을 시켰다.     


이지성.     

그의 아름다운 용모는 천하절색이라 이를 만큼 유명했다. 

어디 그것뿐일까. 어린 나이에 학식 또한 깊어 황제에게 직접 간언을 할 수 있는 좌습유라는 직위 올랐고,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이융기에게는 좋은 벗이 되었다. 

황궁의 진정한 꽃이라 낙양의 모든 여인들이 그를 칭송했다. 


"죄인을 죽여 스스로 죄를 청하였습니다!"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어조였다. 이융기는 필사적이었다. 남아 있는 황족이라고는 울림후 같은 도량이 좁은 자들뿐이었고, 제대로 재능과 덕을 갖춘 인물들은 무주시대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중에 지성 같은 이가 있는 것은 천운이고 기적이었다.     


"아무리 그러하여도 자신의 내자를 죽인 자요. 그런 자를 살리면 들릴 민심은 두렵지 않으신가?“     


그를 촘촘히 쏘아보던 태평공주의 눈이 찬웃음으로 번졌다.     


“그것은 지성의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태평은 도도하게 턱을 올리고 한쪽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동병상련을 나누며 예기(禮記)를 함께할 유일한 살붙이가 아까우십니까? 임치왕께서 원하신다면 내 얼마든지 다른 이를 찾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융기의 얼굴빛은 한순간 명치를 맞은 사람처럼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태평의 말에 뼈가 있음을 간파했다.     


“아니면, 불온한 그 혼인 뒷배에 황자께서는 정녕 아무것도 모르셨소?”

“지금 그 말씀에….”     


 말을 이으려는 이융기의 음성이 공주의 칼 같은 목소리에 잘려 나갔다.     


“허나! 영민하신 임치왕이시니 능히 잘 처신하셨겠지요?”     


태평 공주의 입술이 쓰게 비틀렸다. 그녀는 용피선을 어루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평도 지성을 죽이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황족은 죽이기에는 아까운 존재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어떤 선택을 해야 조금이라도 더 자신에게 유리할 것인지 연신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거사를 함께 모의한 지 딱 보름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임치왕이라지만 고작 보름 만에 궁 안의 우림군을 모아 한 번에 대명궁을 친 것이다. 어떻게?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논의가 있었거나 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해왔거나…….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는 듯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완벽한 계획에 작은 흠결이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지난해 거짓말처럼 치러진 지성의 혼인이었다.           

그에게 흠이 있다면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것과 누구도 함부로 가질 수 없는 황족이라는 신분. 그러나 지성은 자신을 저주했다.


그가 있는 곳에는 여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장안과 낙양에 있는 왕부에는 연서가 넘쳐났고, 귀족부터 기녀까지 가리지 않고 그를 보기 위해 낙양의 가선방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자에게는 지독하게 관심이 없었다. 여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혼인도 하지 않았다. 그가 했던 모든 혼약은 정치적 목적하에 이루어졌고, 뜻을 이루거나 필요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파혼서를 보냈다.      

태평은 지성의 이런 면을 좋아했다. 거기다 이융기가 저리 몸이 달았으니 오히려 그를 살려 제 옆에 둘 수만 있다면 손해 볼 일은 아니리라.        


이융기는 태평공주의 느릿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앞이 아득해지면서 가슴에 불덩어리 하나가 목구멍까지 치받는 것을 느꼈다. 거사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연회 자리였다.     

위황후 앞에서 갈고 연주를 할 사람이 제때 와 주었다면…….


아니면 자신이라도 박차고 나섰더라면……. 아니다. 연회를 싫어하는 그를 그 자리에 끌어낸 자신의 탓이었다. 이 혼란에 이렇게까지 휘말리는 일도, 그가 억울한 혼인을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하나의 작은 틈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중종과 위황후는 연회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부부였다. 시도 때도 없이 조정 인사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벌였는데. 하필 어사대부 두 회정이 그 연회 자리에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조정의 소문난 추남 두회정. 그것을 안타까이 여긴 중종이 놀이를 제안하였고, 위황후는 그 놀이에 낙양 제일의 추남과 제일의 미남의 혼사를 제안했다. 그때 마침 과부였던 황후의 여동생 숭국부인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숭국부인은 지성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고, 황제는 그에게 혼인을 명령했다.     

그렇게 황제의 명으로 혼인을 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왕비궁에 걸음을 한 적이 없었다. 숭국부인은 남편을 찾아 낙양과 장안을 쉴 새 없이 오가야 했지만, 그녀는 끝내 남편의 관심을 갖지 못했다.     

어차피 끊어야 하는 사슬. 지성은 아내였던 여인의 목에 칼을 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건안성의 보명 공주에게 다시 청혼하거라!”     


이융기는 대리사 계단에 주저앉아 있는 지성의 옆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명령이십니까?”

“명령이면 따를 것이냐?”

“제게 언제 그런 결정권이 있습니까?”

“.........”     


대리사에서 나온 지성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파리해진 안색과 헝클어진 머리, 너절하게 찢어진 옷 사이로 여기저기 피떡이 된 상처들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감정의 동요 없이 태연했다. 장안과 낙양을 통틀어 가장 잘난 사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맑고 깊었던 그의 눈동자에 담긴 공허가 더 짙어졌다는 것.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살아야 하니까.“     


지성의 경멸에 찬 눈빛에 이융기의 가슴이 저며왔다.     


"그렇군요. 아내의 목을 벤 사내도 살아야겠지요."

"황족과 혼인을 원하는 가문은 많다.“     


그의 말에 지성은 목이 꺾어지도록 실소를 터뜨렸다.     


"하긴, 잠시 제가 잊었습니다. 자식을 팔아서 권력을 사려는 자들이 이 세상에 차고 넘치지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비명은 대리사 어두운 골목에서 반향 되어 다시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너를 위해서다. 그렇지 않으면 …….”     


지성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황족이라는 신분은 허울뿐. 거추장스럽고 성가셨다. 그가 가장 경멸하던 여인들은 간악한 위황후와 그녀의 동생이자 자신의 아내였던 여인, 지성은 내장이 쏠릴 만큼 구토가 치밀었다.     

탐욕과 정염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빛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떠나지 않았다. 상관없다. 자신의 인생은 이미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졌고, 다시는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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