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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02. 2020

#1 건안성의 하늘

ㅡ 금전산의 자객

무주(武周) 장안, 2년       


 요동의 시월은 입김에 서리가 생길 만큼 시리고 추운 날씨였다.


건안성 서쪽 골짜기 입구 남쪽,

평평한 대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노청산과 노경산자락 꼭대기에는 이미 하얀 눈이 솜털처럼 쌓여있었다.      


맑은 햇살이 내리 쬐는 오후,     


두 사람이 한참 금전산을 오르고 있었다. 귀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은 머리에 은색 비단으로 곱게 접은 건을 쓰고,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길고 두꺼운 자색 저고리와 겉옷을 입고 있었다.


여인의 숨소리가 고르지 못했다. 그녀는 선대 대방군왕, 부여 덕장의 비인 송화 부인 김 씨였다.     


 옆에서 그런 여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아이는 생김새가 꼭 계집아이처럼 예쁘장했다.


 아이는 사내아이처럼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청의를 입었고, 등에는 활과 전통을 메고 있었다.      


“낙양에 가면 혼인을 한 이들이기는 영험한 절이 있다지?”

“예?”     


 멍하니 어미를 부축하고 걷던 아이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 가보고 싶구나."

“어머니!”

“백제 대왕의 무덤이 그곳이 있지 않더냐.”     


송화 부인의 시선이 저 멀리 남쪽 하늘에 머물렀다.

아무도 모르는 알지 못하는 백제 마지막 왕의 무덤. 아이는 그런 어머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눈꽃처럼 눈부시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꼭 붙들면 눈처럼 녹아 없어질 것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남쪽 여인.

송화 부인은 굳은살이 배겨 피멍이 든 아이의 손을 자신의 품에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 앞에 한 무리의 도적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누구냐!”     


아이는 서둘러 송화 부인의 앞을 막아섰다.

두리번거리며 호위를 찾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미리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은 그들을 제외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외부인 절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      

‘제기랄!’     

아이는 입구에서 대웅전 안까지 눈대중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순순히 따른다면 목숨은 해치지 않을 것이다.”     


점잖지만 꽤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산을 울리고. 무리 중 머리인 듯한 사내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말쑥한 얼굴에 거대한 몸집을 가진 자였다. 아이의 눈에도 그 사내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거기다 그 말투. 절대 이 금전산에서 들을 수 없는 북방의 언어를 쓰고 있는 자였다.      


돌궐의 2대 가한 아사나 묵 철.

      

그는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돌궐의 가한이 된 자였다.

묵철은 가한이 된 후 당의 영주(營州)를 포함한 하북도 지방을 한층 더 위협하며 파죽지세로 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노청산이었다. 겨우 오백의 군사였다. 묵철은 흑치상지가 이끄는 오백의 군사에 의해 자신의 천 명이 넘는 기마 군대가 쓰려지는 것을 뜬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흑치상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이름. 그러나 이제 그는 이곳에 없다.


 묵철이 몇몇 호위와 함께 사냥꾼으로 변장을 하고, 노청산을 넘어 금전산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그의 눈에 사찰에 들어가는 한 여인과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고작 서른을 넘겼을까. 그 자태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여인들과 사뭇 달랐다.     


 그녀는 북방의 여인들처럼 거칠어 보이지도 당나라 여인들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의 대방군왕이 왜 저 여인을 두려워하는지 이해 할 수 가 없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봤자 여인의 몸. 그는 끌끌 혀를 찼다.      


‘속 좁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놈.’     


아무렴 어떠랴. 마치 불토 정국에서 속세로 도망쳐 나온 여래의 모습. 그녀는 온화하고 단아해 보이는 미소를 가진 여인이었다. 저 여인을 옆에 두면 자신의 모든 죄도, 두려움도 씻은 듯이 해탈할 것만 같았다. 묵철은 송화 부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근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형제들을 호각으로 불러냈다. 금세 주위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아직 채 지어지지 못한 대웅전 기와가 쓰러지고 주변 건물의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아직은 어린 자신을 보며 휘의 눈은 절망으로 변해갔다.

산 밑에는 그들을 기다리는 호위가 있고, 높은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산에 도적 떼나 자객은 있을 수 없는 일. 그의 마음에 작은 의심이 일었다.     


결국 힘없는 여인은 우악스러운 묵철의 손에 쉽게 잡히고 말았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더욱 아름답고 눈이 부셨다. 올림머리 위에 얇은 금사와 진주가 박힌 고급스러운 비단 두건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인은 귀족이 분명했다.      

 그곳도 아주 높은 신분의.     


묵철의 시선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그녀의 크고 검은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듯 물기가 어렸다. 그러나, 바들바들 떨고 있던 여인의 손에는 이미 날카로운 비수가 들려있었다.     


“놓아라!”     


 비수는 그녀의 창백한 목에 닿았다. 놀란 그는 서둘러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이런 안 되지! 내가 너를 얻기 위해 이리 위험한 일을 벌이는데. 후후!"     


그는 정염이 섞인 탁한 웃음을 지었다. 곧바로 여인의 허리를 낚아채려는 순간이었다.     


휙! 으악!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으악!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이 쓰러졌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던 묵철의 눈에 대웅전 지붕 위에 엎드린 조그만 인영이 보였다.

어미와 떨어뜨려 놓기 위해 내쳤던 아이. 그의 눈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꽤 예쁘장해보였다.      

 아이와 묵철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를 향해 정면으로 날아오는 화살이 묵철의 어깨를 스쳐 갔다. 당황한 그의 군사들이 지붕을 향해 몇 명의 군사들이 화살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높고 넓게 휘어진 대웅전의 치미에 가려진 조그마한 아이를 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     

묵철의 입에서 감탄사가 쏟아졌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였다.

한눈에도 아이의 활 솜씨가 보통 실력이 아님을 알아챘다. 묵철은 허리춤에서 질 좋은 가죽으로 꼬아 만든 얇은 무릿매를 풀었다.     

그의 얼굴에 동물적인 미소가 번졌다.

잡고 싶은 사냥감이 하나 더 는 것이다.

묵철은 무릿매를 손에 쥐고 크게 원을 그리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찰나의 순간, 화살이 다시 휘어지듯 날아들었다. 그가 서둘러 무릿매의 방향을 바꾸자 화살은 바로 뒤에 있는 소나무에 매섭게 날아와 박혔다.      


“이…. 어린 꼬마라고 봐주면 안 되겠구나.”          


그는 아이를 죽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자신이 데려가는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막기 위한 인질일 뿐이었다.

     

“꼬마야! 네가 내려오면 네 어미를 살려주마!”     


그러나 들려오는 답은 꽤 앙칼졌다.     


“그전에 먼저 네 놈의 머리통을 날려주마!”     


 말이 끝나자마자 날아온 화살을 그는 미처 피할 새가 없었다.

결국 화살이 묵철의 머리가 아닌 어깨를 관통했다. 가한의 호위들은 그제야 허둥지둥 지붕위를 쫓기 시작했다. 작은 인영은 지붕과 지붕 사이를 가볍게 뛰었다. 그들은 끝까지 추적할 태세였다. 묵철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아주 천천히 작은 인영을 따라 웃던 그의 낯빛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저건!"     


바람에 쓸려 아이의 머리를 감싸던 푸른 두건이 벗어졌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랗게 떠졌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길고 윤기 나는 검은 타래 머리가 그의 눈앞에서 천천히 쏟아져 내렸다.

그의 눈을 향해 곧게 내려찍는 듯한 검은 활시위 사이로 아름다운 소녀의 검은 눈동자가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여자?’     


묵철은 제 눈을 의심해야 했다. 지금 자신이 맞은 화살을 쏜 이는 다 큰 어른도 아니었고, 심지어 사내아이도 아니었다. 묵철은 고통조차 잊은 채 어깨에 박힌 화살의 뒤축을 부러뜨렸다.

박살난 자존심따위는 챙길 여력도 없었다.      


“저것을 반드시 잡아라!”     


묵철이 고함을 지르자, 그 주변에 있던 호위들이 다시 움직였다.      

‘데려가도 좋다던 여자가 저 꼬마였던가.’     

묵철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주변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무리들이 민첩하게 그녀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소녀의 눈이 의심과 불안으로 흔들렸다.      

‘일반 도적 떼가 아니잖아!’     

모두 훈련된 군사들이었다. 이제 열네 살이 된 그녀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버티기,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과연 올진 모르겠지만.     

‘대장으로 보이는 저 사내만 없애면 돼, 그리고 어머니를 업고 산을 내려가자.’     


그녀는 발이 매우 빨랐다.

산에서 자란 그녀였으니 달리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백제 유민들의 대방군왕 부여덕장의 둘째 딸, 부여 휘.     

당나라에서 태어난 멸망한 백제 왕족의 마지막 핏줄.


휘는 지붕 끝에서 반대편 소나무로 훌쩍 뛰어넘었다. 나무에 꽂힌 화살과 채찍을 거두려는 순간 동시에 밑에서 묵철이 무릿매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호를 그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나무에서 뽑아 든 마지막 화살을 날렸다. 묵철이 몸을 돌릴 때를 놓치지 않고, 송화 부인의 손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묵철은 이미 예상한 듯 송화 부인을 놓지 않았다.     


“계집아이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녀의 활을 다루는 능력은 탁월했다. 묵철은 이 계집아이가 탐이 났다. 절대 훈련으로는 불가능한 경지. 신궁이었다. 돌궐로 데려가 궁사로 쓸 수만 있다면.

헌데, 데려다가 궁사로만 쓰기에는 얼굴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렇다고 저런 신궁을 모른 척하는 것은 가한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가볍게 탄식했다.     


“아깝구나! 아까워!”     


묵철이 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꼼짝없이 포위되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순간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송화 부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을 휘에게 몰래 쥐여주었다.     


'어서 가!'     


휘가 혼자 달아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딸의 크고 검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자 송화 부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네가 누군지 잊었느냐?! 어서 가!'     


끝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그녀는 딸에게 주었던 칼을 다시 빼앗아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내리꽂았다. 재빨리 어미의 손을 붙잡았지만 이미 여인의 가슴에 꽂힌 비수에서는 붉은 피가 꽃물처럼 번져갔다.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손을 들고, 소녀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듯 소리쳤다.

묵철의 비릿한 웃음이, 어미의 공허한 눈동자가 비수처럼 그녀의 가슴을 꿰어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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