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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02. 2020

#3 혼인

ㅡ   가선방의 혼례

 경운 2년(711년)     


낙양에서 건안성으로 다시 청혼이 들어왔다. 괵왕의 청혼서였으나 붉은 비단에 금색 인장은 황제의 인장이었다. 보명 공주, 부여 휘의 나이 이미 스물하나, 혼기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부여경은 뛸 듯이 기뻐했다. 황족의 청혼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것은 황제의 칙서이고, 복종의 서약.      

그리고 부여경에게는 다른 속내가 있었다.           


 아무리 먼 변방일지라도 임치왕과 태평공주가 일으킨 당륭정변은 요동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때문에 흑치 장군이 없는 지금, 어떻게든 황궁과 줄을 대야 한다는 귀족들의 상소가 건안성 내로 빗발쳤다.          


 권력을 위해 나이 많은 과부와 혼인을 하고, 그 목을 직접 베어 대명궁 앞에 바친 비정하고 파렴치한 괴물이란 소문도 건안성에서도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상대가 경국지색의 외모와 인품을 가졌다 한들 선뜻 딸을 내어 줄 문벌은 없었을 것이었다. 대방군왕 부여 경과 대신들은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면 긍정의 뜻을 비쳤다.           

그러나 휘의 사부인 무천의 생각은 달랐다.     


“공주께서 스스로 불구덩이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수련장에서 홀로 조심스럽게 활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휘에게 말했다.     


“제가 혼인하는 것이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일입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불구덩이보다 더한 곳이지요!”

“목숨을 내어놓는 일도 아니고, 고작 정략적으로 맺는 혼약일 뿐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휘의 마음이 더 안쓰러운 무천이었다.     


"다른 이와 혼인을 하시면 됩니다. “

"다른 이가 또 있겠습니까?”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그럼 이대로 따르시겠단 말씀입니까? 평소에 가지고 있던 소신과 패기는 어디로 가셨소!”     


평소에도 참을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걱정하는 마음과 다르게 무천은 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것이 소신이고 패기입니까?”     


그녀는 창백해진 낯빛에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따지자면 엄연히 군신의 관계였지만, 둘은 오랫동안 사제로 지내왔다. 그가 공주에게 소리를 지르는 일은 다반사였기에 그녀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멈췄던 손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부님의 뜻은 알겠으나 어차피 그리될 일이라면 받아들여야지요.”     


휘의 덤덤한 말투가 더욱 무천의 성질을 돋웠다.     


“공주마마!”

“건안성이 저로 인해 분열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티 없이 맑고 하얀 얼굴, 하나로 올려 묶은 머리 옆으로 귀밑머리가 흩날렸다. 건안성의 하늘을 다 담을 것 같은 크고 맑은 눈동자는 언뜻 푸른빛이 감돌았다. 가냘프지만 오랜 훈련으로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몸매와 굳게 다문 입술은 진흙탕을 굴러도 더러워질 것 같지 않은 고결함마저 배어 있었다. 그것이 무천의 눈에는 그녀의 비운과 더해져 더 애틋했다.


 몇 년 전 금전산으로 잠입했던 묵철의 침입 이후 휘의 어미인 송화 부인이 죽었다. 이것을 꼬투리 잡아 부여경은 혈족의 힘을 타고난 휘를 더욱 경멸했다. 여인이 황제가 되는 마당에 공주가 군왕을 대신하는 월군녀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그는 망국에서 나타난 혈족의 힘은 재앙이라 비꼬았다.     


 “기어이 네가 아비를 죽이고, 어미마저 잡은 것이더냐!”     


그러나 부여경은 휘를 두려워했다. 혹여라도 장안에 소식이 전해져 기미 국왕으로 있는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울까 전전긍긍했다. 제 일로 성내가 시끄러워지자 휘는 금마사로 들어가 어미가 남긴 불상을 지켰다.           

불상에 새겨진 그녀의 법명. ‘보명’ 보전할 보, 목숨 명.      


‘반드시 끝까지 살아남거라.’      

서럽고 억울한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들리는 듯했다.     

‘부디 이 아이의 목숨을 지켜주시기를.’     

눈물이 쏟아질수록 그녀의 마음에 짙은 공허가 켜켜이  쌓여갔다.          


*          


낙양의 모든 거리는 낮과 밤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정작 혼인 행렬로 사방이 시끄러워야 할 가선방의 왕부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행인 하나 없이 거리는 깨끗했다.          


신부를 태운 붉은 수레는 조용히 왕부 앞을 지켰다. 한참이나 지났을까, 살며시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공손하게 공주 행렬을 맞이했다.          


“저는 곧 이 왕부의 측비가 될 장가 화영이라고 합니다.”          


 장화영, 외가는 당대 명실상부한 영국공의 집안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부 정랑 장렬이란 사람으로서 태평공주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양쪽으로 틀어 올린 머리에는 커다란 모란꽃이 꽂혀있었고, 얇고 하늘거리는 붉은 치마는 그녀의 통통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제법 귀엽게 생긴 얼굴에는 당시 유행하는 선홍색 연지로 양 볼을 가득 물들였고, 하얗고 좁은 미간에는 붉은 매화 꽃잎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측비가 될?”     


 마차 안에서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고요하고 단정한 어조가 들렸다. 화영은 얼굴도 모르는 여인에게 제압당하는 기분에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장안과 낙양에서 인정받는 영국공의 질녀였다. 하물며 변방의 몰락한 이민족 공주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거라 그녀는 자신했다.          


“측비가 된 것도 아니고 측비가 될 여인이 친히 왕비를 맞이하러 나오시다니 참으로 기쁘군요!”          

화영의 얼굴이 썩은 무라도 씹은 것처럼 해쓱해졌다. 불같은 화가 치밀었지만, 결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추운 곳에서 예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     


화영은 눈썹을 곱게 내리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건안성이 춥긴 하지만 이곳도 그리 따뜻한 곳은 아닌 듯합니다. “     


공주의 건조한 말투가 또 한 번 그녀의 폐부를 건드렸다.    


"지체되어 송구합니다. 비 마마!”     


그때 안쪽에서 나긋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리가 불편한 듯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오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천인의 자태처럼 청미하고 우아했다.     

왕부의 유모 곽무진.


유모라고 했지만 휘보다 보다 겨우 대여섯 정도밖에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화려하지 않으나 온화하고, 알듯 말 듯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가진 여인이었다.          


날이 저물어도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가선방 괵왕부의 거대한 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무진은 공손하게 공주 일행을 맞이했다. 왕부의 대문이 열리자 거리에는 숨어서 보고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씩 왕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낙양에서 소문이 자자한 괵왕부의 혼례를 못 보고 넘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한쪽에서는 신부가 초야에 죽는다 안 죽는다. 내지는 오늘 이 대문 문지방을 넘는다 못 넘는다는 것을 두고 내기가 한창이었다. 그와 별개로 지성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여인들은 건안성에서 온 공주의 마차에 곱지 않은 눈초리를 던지기도 했다.          


  마차가 조심스럽게 흔들리며 붉은 쓰개를 쓴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지켜보는 장내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북방의 이민족은 대부분 예의범절을 모르고 숙녀 다움은 찾아볼 수 없었기에 망국의 공주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왜곡된 채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드디어 가마를 감싸는 너울이 열리고 사람들은 내리는 여인의 모습에 집중했다. 붉은 가리게 너머로도 느껴지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몸에 꼭 맞는 붉은 혼례복은 그녀의 늘씬하고 다부진 몸매를 돋보이게 했다. 예의 바르고 균형 잡힌 걸음걸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경박하거나 게을러 보이지 않았다.          


 휘는 무진에게 다가가 조용히 목례를 했다.

비굴해 보이지도 거만해 보이지도 않는 품위, 무진의 눈에도 그녀의 범상치 않은 성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휘의 혼례복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그것을 감추고, 무진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온전하게 지내시길…….”     


무진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휘의 귓가에 바람처럼 속삭였다.     


‘온전하게라!’          


 지금 시집을 온 신부가 들을 말은 아님을 곱씹으며 휘는 신랑이 없는 대청으로 향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신방 입구에 있는 네 개의 육중한 출입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처음 보는 화려함. 길고 너른 복도 끝에 붉고 긴 장막이 열려 있었다. 침대 위, 네 개의 굵은 나무 기둥은 붉은 천으로 칭칭 감겨 있었고, 흑단으로 만든 탁자 위에는 술과 음식이 잔뜩 차려졌다. 휘는 한참을 멍하니 음식을 보고만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음식들, 그녀는 조금 전 만났던 여인들을 떠올렸다.

이렇게 먹어대니 살이 찌는 거겠지. 그녀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 때마다 머리 장식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건안성에서 낙양까지. 오랫동안 앉아 있어 발바닥은 통증으로 감각이 무뎌졌고, 무거운 머리 장식으로 목은 부러질 듯 아팠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마치 사냥꾼이 낯선 숲에 첫발을 내디딜 때처럼 조심스러웠다.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되자 꼿꼿하게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그녀의 어깨가 동그랗게 풀렸다.

천천히 붉은 면사를 내리고 터덜터덜 침상으로 걸어갈 때쯤에야 온 다리와 발바닥이 고통으로 아우성을 쳤다.          

어차피 신랑의 면상 따위 못 볼 터, 혼례복을 훌훌 벗어던진 휘는 내실에 마련된 더운물에 발을 담근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틱! 아주 작은 소리에 눈을 번쩍 뜬 휘는 재빨리 몸을 돌려 위로 뛰어올랐다.

돌아서는 순간 수십 개의 날카로운 암기가 그녀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휘는 옆에 있는 수건을 집어 들어 날아오는 암기들을 쳐냈다. 그 동작 하나하나 물 흐르듯 우아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짓으로 수십 개의 암기들은 그녀가 있는 반대쪽에 차례로 소리 없이 박혔다. 이내 누군가의 가벼운 인기척도 사라졌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어지간히 적이 많거나 아니면 나를 죽이려 하거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녀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으면 지금 이 방에 들지도 못했을 터.

그도 아니면 질투에 눈이 먼 그 하얀 돼지? 의심이 가긴 했다.     


 사람을 부를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이 시각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자라면 말하는 사람만 피곤해질 일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첫날부터 일을 만들지 말자. 어쩌면 아내를 죽인 남편의 얼굴을 첫날부터 마주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는 일.


‘어차피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가 괵왕인 것이 중요하고, 내가 왕비인 사실만 변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용하게 아무 일 없이 잘 살아내면 된다. 죽지 않고 지키면 된다.’     


 그녀는 화려하게 빛나는 붉은 공단 이불이 깔린 넓은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누웠다. 돌아가신 부모님과 끝내 얼굴을 보지 못한 스승님, 그리고 건안성의 내 소중한 백성들. 성 밖을 나올 때까지 울며 자신을 배웅하던 이들의 얼굴이 천장에서 아른거렸다. 


'그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내가 먼저 죽이면 돼.'     


이를 앙다문 채 서서히 그녀의 눈이 감겼다.     

지성은 방문 앞에 다시 섰다.

혼인 첫날, 지금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그녀에게 모욕적인지도 알고 있었다.     


부여 휘!     


지성은 신을 부르듯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는 애초에 이 혼인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도 없었다. 정략적으로 하는 혼인이니 여느 때처럼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어린 소녀의 검은 눈망울이 가슴 깊이 각인되어 처음으로 파혼을 후회하고 되돌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위후에 의해 모든 노력은 한순간에 수포가 되어 버렸다. 지성은 시작되는 두통을 참으려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죽어가며 독설을 퍼붓던 위자연의 잔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는 이내 작게 웃었다. 고작 바늘 따위로 저 여자를 놀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시기에 눈이 먼 어느 멍청한 작자의 짓인가.      


706년 5월,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 준의 의문사하던 해에 사괵왕과 건안성의 혼약이 처음으로 파기됐다. 그때 지성의 나이 스무 살, 휘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풋! 지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감히 그녀를 평범한 여인들과 비교를 할 수는 없었다. 흡사 춤을 추는 것처럼 가볍고 아름다운 몸놀림이었다.     


순간,  돌궐군을 상대로 어미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명광현 대장간 마을에서 거대한 노(弩)를 당기던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는 예전 그대로였다. 맑고, 투박하고, 명료했다. 낙수의 타는 듯한 태양이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날, 대장간 골목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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