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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03. 2020

#4 흑치준의 죽음

ㅡ 낙양 ㅡ

당 신룡 2년(706년)     


 북방의 짧은 여름 장마가 끝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광활하고 넓은 들판, 빼곡하게 피어 있는 들꽃들이 질주하는 두 마리의 말발굽에 비참하게 헤집어졌다. 한 치의 여유도 없어 보이는 다급함 때문에 달리는 와중에도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앞에 선 건장한 사내의 등에는 커다란 칼이 칼집에 단단히 묶여 있었고, 뒤를 따르는 소녀의

등에는 자신의 상체 길이보다도 긴 활과 전통이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몇 날 며칠을 내내 말

없이 달렸다. 여러 날을 건안성에서 낙양까지 그 먼 길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내내 달려온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5월 23일 흑치 준 사망.     


‘사인은 독살이 의심됨.’     


그의 부고를 받고 달려왔지만, 이미 그의 장례는 서둘러 끝나버린 상태였다. 흐르는 낙수를

앞에 둔 흑치가(家)의 넓은 저택에는 그의 매제인 순 장군과 여동생 흑치해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것인가!”     


침통한 목소리로 대문을 들어서는 무천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사숙께서 오셨습니까?”     


몸이 무거워 힘겨워하는 아내를 다정히 보듬던 순장군은 문이 열리자마자 반갑게 그들을 맞이

했다. 둘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변고란 말입니까?”     


순장군 물부순은 무천을 보자 그간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검안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천은 믿을 수 없었다. 하물며 자신의 주군 흑치상지, 전 백제 장군이자 당나라 연국공의 아들이었다. 아무리 멸망한 나라의 무장이라 하나 그간 이 땅에서 피를 뿌리며 세운 공로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무천의 눈에 시퍼런 핏발이 어렸다.  


 그는 본시 동예인으로 고향은 명주(강릉)였다. 집안은 대대로 활을 만드는 장인의 가문

이었으나 계속되는 환란으로 그는 백제에 노예로 팔려 갔다. 그때 그를 거둔 이가 흑치 상치

였다.     


 흑치상지는 그 수많은 공로를 쌓고도, 억울하게 역모의 누명을 쓰고 대옥에서 홀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의 아들은 아비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쉼 없이 전쟁에 나가 공로를 세워 다시 흑치 가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측천무후가 병이 들자, 그녀의 아들 중종 이현과 위황후는 장간지와 함께 무후를 끌어내리고 다시 당황족을 부활시키는 신륭정변을 일으켰다. 이때 정변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 특히 흑치家는 측천무후가 아끼던 가문 중 하나였기에, 흑치준이 의문사를 당하자 무천은 분개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이용하고 버리는 것은 백제나 당나라나 똑같았다.          


“어찌하여 검안하지 못하였는가?”     


 무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분명 꺼림칙하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의자에 기대어 넋 놓고 있던 흑치해련은 부른 배를 잡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꺼림칙하다?”     


하얗게 새어가는 무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독살입니다.”     


 단호한 해련의 말에 무천의 눈빛이 광폭하게 변했다. 예상치 못한 죽음, 이제 그의 나이 고

작 서른한 살. 혼인하였지만 아직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가 죽고 흑치 가문의 명맥도

이렇게 끊어진 것이다. 그렇지, 독살이니 검시를 못 하게 한 것이겠지. 예상했던 바였다.     


“서재에서 책을 보시다 새벽에 돌아가셨더이다.”     


해련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부인, 앉으십시오. 조심하여야 합니다.”     


버들가지처럼 여린 그녀의 배가 불룩했다. 그녀는 남편의 말대로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항상 드시던 차였습니다. 제가 직접 갖다 드렸단 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슬픔과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 잔을 좀 보아도 되겠습니까?”     


어디선가 시원한 숲 향을 가득 머금은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청의를 입은 묘령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안성의 보명 공주이시네!”     


무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순장 군과 흑치해련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공주마마를 뵈옵니다.”

“이리 예를 차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휘는 서둘러 해련을 부축했다. 그녀는 공주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지금까지 일렁이던 불안한 마음의 파도가 잦아들었다.     


'나라가 망했다 하여 무장이 충(忠)을 버릴 수는 없는 법!'     


아비와 오라비가 술만 들이켜면 눈물 흘리며 읊조리던 음성이 아직도 그녀의 귀에 생생했다.     


“부여씨가 살아있는 한, 혈족의 힘이 살아있는 한, 백제는 망한 것이 아니다. 알겠느냐?”     


 부여 씨는 누구요! 혈족의 힘은 또 무어란 말씀입니까. 해련의 마음속에는 의구심만 잔뜩 자

라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데 아비와 오라비를 잃어야 한단 말입니까.’          


  백제 부흥의 실패 원인을 흑치 장군의 배신이라고 몰아붙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남은 이들을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건안성 대부분의 유민들은 알고 있었다.     


단, 성안의 대방군왕 부여경은 예외였다.           


그는 언제나 흑치 장군을 경계했다. 그가 전장에 나가 승리를 거듭할 수록, 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을 수록 그는 흑치상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군주보다 유명한 장군을 달가워할 군왕이 어디 있을까. 흑치 상지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순간에도 그는 나서지 않았다. 그는 흑치상지를 미워했고, 또 그만큼 혈족의 힘을 갖고 태어난 휘를 두려워했다. 


“몰라보게 자라셨습니다.”

“공주께서 이렇게 함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사람을 보낼 것이

 아니었습니까?”     


무천을 타박하는 순장군과 해련의 말에 그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공주가 온 것은 비밀이네.”

“예?”     


물부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군왕 전하의 명일세.”     


무천의 입매가 못마땅한 듯 다물렸다. 갑자기 대방군의 명이라니, 필경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명광현과 관계된 일이기도 하고.”

“예에?”     


물부순은 더 크게 눈을 떴다. 이 시국에 명광현이라니. 거기다 공주까지 대동하고서?     


“보는 눈들이 곱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공주를 보낸 거겠지. 어떻게든 이용하려 안달복달이지.”          


 무천의 푸념을 뒤로하고 휘는 내실로 연결된 흑치 준의 서재로 들어갔다. 한쪽 벽에는 그림을 보관하는 목함과 지통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생전에 그가 사용하던 그대로 글씨며, 그림들이 모두 제자리에 걸려 있었다. 찬찬히 물건들을 둘러보던 휘는 벽에 걸린 그의 초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요?”     


해련은 그녀와 나란히 그림 앞에 섰다.     


“이 초상을 그린 분을 제가 기억을 못 하겠습니까? 그림을 못 그린다, 어머니가 타박할 때마다 낙랑군 부인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부끄러운 듯 흑치 해련이 고개를 숙였다.     


“혹시 그날 드셨다던 잔이 아직 있습니까?”     


휘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해련에게 물었다.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잔도 전부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번 보여주십시오.”     


그제야 그림에서 시선을 뗀 그녀가 해련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해련이 시종을 시켜 흑치준이 먹었던 잔을 가져왔다. 겉은 일반 잔처럼 하얀색이었으나 잔 안

쪽은 붉은 모란꽃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장군께서 무후께 하사 받은 것이옵니다.”     


흑치해련의 말을 들으며 휘는 모란이 그려진 부분을 손으로 문질러 살짝 맛을 보았다.     


“이 잔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잔에 독이 있었다면 진작 알았을 것입니다.”     


잔을 수상히 보는 휘를 그녀는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이 잔은 언제 받은 것입니까?”

“몇 년 전 토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흑치해련은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혹시 이 잔에….”

“애초에 소량의 독을 넣어 만든 잔입니다. 그림을 그려 넣을 때 아교에 아주 미량의 맹독을

입힌 것이지요.”     


갑자기 휘는 심한 기침을 하며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이. 이 무슨!”     


흑치 해련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수건으로 피를 쓱 닦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미량의 독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니. 몸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정말 괜찮은 것입니까? 의원을 불러야…….”     


서둘러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하자 휘는 미소 지으며 그녀를 잡았다.     


“쉿!”     


그녀는 조용히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갖다 댔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흑치 해련은 그제야 이해했다. 부여 휘 가진 저주받은 힘. 아마도 그녀는 다른 왕족들처럼 독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저 여린 어깨가 슬펐다. 남편감이라도 잘 만나야 했는데….          


“일이 그리되어 송구합니다.”     


흑치 해련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녀가 건넨 물을 마시며 휘의 흑옥처럼 맑은 두 눈이 그녀를 향했다.     


“공주 전하의 정혼 말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해련의 의도를 알아챈 그녀의 마음이 작게 일렁였다.     


“황족과의 혼사야 항상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담담하게 말을 꺼내는 그녀를 보며 흑치 해련은 복받치는 마음을 겨우 추슬렀다.     


“오라버니께서 계셨으면….”

“장군께서 계셨어도 어쩔 수 없으셨을 겁니다.”

“공주께선 괜찮으신지요?”

“공주로서 자존심을 묻는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마음을 겨우 누르던 흑치해련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것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의 정혼이라면 저에겐 다 똑같

습니다.”     


 정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휘는 언니인 해명 공주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

온 남자와 지란지교(芝蘭之交)의 정을 쌓고, 그 안에서 사랑이 피어나고 모든 이들의 축복

속에 혼인하여 행복하게 사는 모습. 그것이 아니라면 어찌 혼인 당일에 처음 보는 이와 어떻게 정이 싹틀 수 있을까.     


 혹여 그가 다시 나타난다면... 

그녀는 기억 속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한 번도 만나 보신 적이 없으시지요?”

“이리된 마당에 얼굴을 봐 무엇하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녀는 바로 알아차렸다. 괜찮다 하였으나 파혼은 어린 소녀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을 것이

다. 그것이 여인으로서 받은 상처인지 왕족으로서 받은 모멸감인지는 잘 분간이 되진 않았다. 

     

“휘, 거기 있느냐?”

     

 무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멍하게 그림만 보던 휘의 눈이 한순간에 현실을 되찾은 듯했다.

그녀는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흑치 해련은 그런 공주의 뒷모습을 애잔하게 응시했다.


부여 휘, 웅진 사비성이 아닌 건안성에서 나고 자란 백제의 첫 번째 왕족이었다. 그리고 모든 백제인들이 염원이 담긴 신궁(神弓)의 힘을 가진 여인.


“지금 이 길로 동시(東市)에 나가 대장간 <명광현>을 찾으십시오! 거기서 사타무의란 자를 찾아 내 이름을 대면 그가 필요한 것을 내어 줄 것입니다.”     


순장군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길을 안내하듯 조곤조곤 말했다.      


“내어주는 것이 물건입니까. 아니면 눈속임입니까?”     


그는 답을 하지 못했다. 이 똑똑한 공주는 자신의 쓰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무엇이든 잘 해낼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짧은 말을 남기고 휘는 바람처럼 흑치家 대문을 벗어났다.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순장군은 달려 나가는 공주를 보며 안도의 눈짓을 보냈다.     


“그래서 더 걱정이라네.”

“무엇이 말입니까?’

“공주의 성정에 물불을 안 가릴 테니 말일세.”

“대방군께서는 무슨 생각이실까요?”     


무천은 물부순의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여차하면 나는 공주를 도망시킬 생각이네.”

“사숙님!”

“알지 않는가? 대방군은 자신보다 뛰어난 자를 남기지 않네. 그게 공주라도 말이지.”     


물부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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