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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04. 2020

#5 명광현

ㅡ 대장간에서 만난 남자


 낙랑의 동시 東市는 화려한 곳이었다. 특히 도자기처럼 하얗고 윤이 나는 낙양 여인들의 화장과 외관은 휘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화려한 색색의 비단이며, 옥과 섬세한 금제 세공이 돋보이는 금속 장식들과 함께 여인들 얼굴에도 종이 인형처럼 하얀 분가루가 덮여있었다. 


그 위에 다양한 색의 붉은 연지를 바르고 갖가지 향유를 뿌려, 지나는 이의 코와 눈은 마비될 지경이었다. 거꾸로 그녀들이 자신을 신기한 물건 보듯이 시선이 집중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무천이 말한 대장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전의 여러 골목 중 가장 후미지고 복잡한 골목에는 대장장이들은 모여 살았는데, 그들 중 태반은 백제나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백제인이었으나 건안성으로 오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들.     


백제의 활과 갑옷을 만드는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 두껍고 거친 가죽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 위에 황칠을 여러 번 하면 부드러운 가죽은 그 어떤 화살도 뚫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단단하게 굳었다. 황궁 안에서도 유명한 명광개나. 산문갑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곳을 순순히 유민들과 함께 건안성에 둘 고종이 아니었다.          

 

<명광현>은 여러 대장간을 지나 가장 끄트머리 막다른 골목에 자리했다. 붉은 현판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그녀가 곧장 간판을 보고 달음질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휘는 옆길에서 급하게 튀어나온 누군가와 세차게 부딪혔다.     


 달려가는 힘 때문에 그녀의 몸이 반대로 나가떨어지려는 찰라, 남자의 손이 그녀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휘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팔을 잡은 사내의 손을 비틀고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가볍게 중심을 잡았다.     


“오, 제법이구나.”     


 휘의 뒤통수에서 청아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칫 그녀의 몸이 굳었다. 마치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 기시감에 그녀는 잠깐 멈춰 섰다. 뒤를 돌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했다. 


많아야 스물쯤 보이는 사내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기묘한 아름다움이 뿜어 내고 있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황하의 물결보다 더 밝은 갈색 눈동자. 그와 마주친 눈 속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자 한순간 주변의 풍경이 사라지고, 홀로 세상에 존재하는 듯 보였다. 신선인가? 그녀의 눈은 먼 허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도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휘는 그 아름다운 미소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남자는 흰색 비단옷 위에 금장을 입힌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어느 부유한 귀족 자제라는 생각에 멈추자, 그녀는 막연한 기대를 접었다. 자신의 선인은 저렇게 화려한 이가 아니니. 거기다 당나라 귀족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급한 마음에 옆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정중히 사과드리지요.”     


휘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뛰어가는 모양새만 봐서는 분명 사내였는데, 말씨며 피부, 옷 사이사이로 드러난 유연한 몸매는 영락없이 여인이었다. 거기다 기품있는 말투를 보아서는 높은 신분의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었다. 

      

금전산에서 죽어가는 어미를 붙들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 어린 눈빛과 눈앞 여인의 얼굴이 교차했다. 성숙하고 깊어진 눈빛과 고귀해 보이는 여인의 민낯. 지성의 시선이 가죽을 꼬아 만든 그녀의 허리띠에 시선이 닿자, 그의 눈빛은 의심에서 당혹감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오른손에는 물소 뿔로 만든 두툼한 뿔각지를 끼고, 궁수들이나 입을 법한 훈련복을 입고 있었다. 낙양의 여인들이 남장을 즐기지만, 그것은 자신을 꾸미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일 뿐, 이렇게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과 게다가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도록 늘씬한 여인이라니.  그녀 스스로 자각을 한다면 지금 주변의 여인들이 자신을 어떤 얼굴로 보고 있는지 본인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한가?”     


호기심과 장난기를 가득 담아 자신을 넋 놓고 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럼!”     


정신을 차린 휘는 자리에서 벗어나려 뒤를 돌았다. 그때 지성이 그녀의 팔을 다시 잡았다. 팔을 빼내려 했지만, 처음과 달리 휘는 쉽게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느 궁사에게 활을 배우십니까?”     


 지성은 괜스레 그녀를 잡고 말을 걸었다.     


“이,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난데없는 사내의 손길에 휘의 얼굴이 금방 달아올랐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녀는 도대체 사람들이 왜 주변에 모여들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여인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살필 틈도 없었다.     


그녀가 손을 비틀어 빼자, 지성은 재빨리 그녀의 손가락에 있던 뿔각지를 빼냈다.

꽤 오랫동안 사용한 듯 깍지 안쪽이 닳아있었다. 지성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귀족들이 배우는 취미 수준이 아니었다. 그때도 범상치 않은 솜씨라 여겼다.     

  

영주에서 머물던 시절, 노청산주변을 지날 때 일이 떠올랐다. 어린 여자아이를 상대로 묵철의 호위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어미를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던 어린 소녀 모습은 그 후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휘를 향해 곱게 미소 짓던 얼굴이 한순간 차갑게 돌변했다. 여차하면 소매 안에 숨겨둔 칼이라도 꺼낼 태세였다. 그녀의 어금니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 대로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내와 대거리할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인파를 뚫고, 골목 반대쪽으로 달음질을 쳤다. 지성도 곧 따랐으나 생각보다 날쌘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원래 궁수는 제일 날래고 빠른 사람을 쓴다. 지성은 마음이 급해졌다. 


도대체 누굴까. 어느 전각에서 누구 밑에 있으면 어떤 쓰임을 위해 낙양에 흘러들어왔는지. 어디서 훈련을 하는지 반드시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태평궁의 사람만 아니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성은 그냐 몰래 낚아챈 뿔각지를 이리저리 돌리며 유심히 살폈다. 각지 안쪽에는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휘’     

지성은 나지막하게 입술을 들썩였다.      


*          


<명광현>     


 한참을 돌아서 오느라 반식경이나 더 지나야 대장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뒤늦게 손가락에 끼고 있던 뿔각지가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만나기만 하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것을.          

명광현의 대장간 대문은 누구든 드나들 수 있게 활짝 열려 있었지만, 주변에는 쇠를 두들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휘는 열려 있는 대문의 손잡이를 잡고 연신 내리쳤다. 그러자 마치 그곳에 있었던 듯 초로의 노인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아는 얼굴을 만난 그녀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영노께서는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아이고, 공주께서 낙양에는 어찌 오셨습니까?”          


 영노라 부르는 하얀 백발에 키 작은 문지기는 서둘러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 앞에 무릎을 꿇는 노인의 거칠고 주름 잡힌 손을 붙들었다. 당혹스러운 낯빛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영노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공주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을 낮추십시오! 장주께서 아시면 소인 여기서 쫓겨납니다.”

“사부님 심부름을 온 것이니 이리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으십니다.”

“아니, 무천 그 천한 놈이 이제는 공주님께 심부름을 시킵니까?”          


 금방이라도 쫓아갈 듯 영노는 눈을 부릅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의 사부인 무천은 명주(강릉)에서 데려온 책화(동예의 법속)의 빚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노비의 신분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그를 면천하였고, 영노는 그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주변인 중 하나였다.          


“그 천한 것이 감히 공주의 스승이라 칭하더니 이제는 심부름까지 시킨답니까?”

“그런 것이 아니오라! …….”     


대답할 말을 찾던 휘는 슬쩍 말꼬리를 돌렸다. 눈치 빠른 노인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사부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사부! 흥!‘     


그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지금 장주께서 여기 안 계십니다. 흑치중랑장 그리되시고, 요즘 부쩍 출타가 잦으신대 어디를 다니시는지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흰 수염의 노인은 금방 화를 가라앉히고, 그녀에게 다시 따스한 미소를 보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노인, 영노, 무천은 그가 의자왕의 자결을 지켜본 호위였다고 했다. 또 중랑장 흑치준은 그가 무천과 함께 동예에서 건너온 무장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 이미 백 살을 넘겼을 나이, 그의 몸 이미 늙어 흰머리와 함께 노쇠했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만으로도 그가 보통의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사타무의라는 분이 계시온지요?”     


노인은 사타무의라는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공주께서 사타무의를 어찌 찾으십니까?”

“스승님께서 그분께 받아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     


그때였다.     


“저도 그분을 뵈러 왔습니다만.”     


열린 문지방을 힘차게 건너오는 훤칠한 사내의 목소리가 대장간 전체에 맑고 청아하게 울렸다. 영노의 얼굴이 굳었다.     


“저 또한 사 타공을 뵈러 왔습니다.”          


 시큼한 쇠 향이 진동하는 곳 어디선가 청량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금장 허리띠의 남자가 힘찬 발걸음으로 막 대장간을 들어서고 있었다.     


아! 휘는 낮게 탄식했다. 아까 시전 골목을 돌아 나오는 길에서 부딪혔던 사내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눈부신 미소, 사내의 얼굴은 티 하나 없이 매끈하고 날렵했다. 높게 올라선 잘생긴 코와 웃을 때마다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리고 물기를 가득 먹어 유리알처럼 움직이는 갈색 눈동자. 그의 손가락에는 그녀가 찾던 뿔각지가 끼워져 있었다.     


 휘는 말없이 지성을 노려봤다.

사내가 기녀들보다도 어여쁘게 생겼으니 삶이 얼마나 피곤할까.     


그녀는 자신을 보며 아는 친구라도 만난 양 환한 미소를 짓는 지성에게 괜히 불퉁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찬 얼굴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옛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것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급하게 뛰어가시더니 여기서 뵙는군요!”     


지성은 자신을 노려보는 영노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휘에게 말을 걸었다.     


“지체 높으신 공자께서 그 미천한 놈을 어찌 아시오?”     


 영노는 휘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말에서 공손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나라 귀족인 것도 못마땅한데 감히 공주를 아는 척하는 사내놈이라니! 그는 휘에게 화사하게 웃는 지성이 못마땅했다. 돌연 지성의 눈빛이 차게 변했다.     


“미천한 놈이라! 사타공을 미천하다 하였으니, 그와 친분이 있는 나 또한 그렇다는 뜻이군,”     


지성의 차가운 얼굴빛에도 영노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뭐 좋을 데로 생각하시지요!”     


영노는 떨떠름하게 말을 했다.     


“헌데 귀한 댁 자제분이 우리 미천한 장주는 어찌 아시오?”

“오다가다 만나면 인연이 되기도 하지요.”

“우리 장주가 진짜 댁을 만나자고 했소?”

“그럼 제가 여기 어찌 있겠습니까?”     


둘 사이에 싸늘한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그때 대장간 안뜰에서 누군가 급하게 그들을 향해 뛰어 들어왔다.          

“오! 모두 오시었습니까?”          


 뛰어 들어와 숨을 헐떡이는 남자는 이제 막 서른을 넘었을 것 같은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뒤뜰과 연결된 좁은 문을 박차고 나오다 그 앞에 서 있던 휘와 눈이 마주쳤다.          


“이 아리따운 낭자께서는 도대체 누구십니까?”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던 사타무의는 점잖게 말투를 바꾸어 휘에게 말을 걸었다. 보기에 요상한 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빗방울 무늬가 있는 조금 펑퍼짐한 미색 바지와 이상하게 생긴 모자를 쓰고, 한쪽 귀에만 걸린 금으로 만든 귀걸이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휘 앞에 있던 영노의 눈에서 다시 불길이 일었다.     


“이 미천한 장. 아니,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어서 공주님께 예를 올리지 못할까!”          


공주라는 말에 영노를 제외한 두 남자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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