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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05. 2020

#6 대장간 마을

ㅡ 애환 (哀歡)의 땅

 특히 휘에게 빛나는 미소를 보이던 지성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이는 영노뿐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지성에게 영노는 무언의 눈짓을 보냈고, 그도 그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할 말을 잃은 지성과 달리 사타무의의 눈빛은 더욱 반짝였다.          


“오호! 여기 계시는 이 아름다운 분이 건안성의 보석이라 불리는 바로 그 공주님이시군요?”     


사타무의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어디 천한 고구려 놈이 감히 귀한 분을 놓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노기 승천한 영노의 분노가 이번에는 사타무의에게 터졌다. 그러나 불같은 영노의 화에도 사타무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노께서는 말씀이 너무 과하십니다. 제 스승께서 아시면 무덤을 박차고 나오실 것인데!”

“흥! 그런 놈 백이 와보라지!”     


영노는 무슨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시종일관 날을 잔뜩 세우고 사타무의를 향해서 큰소리를 쳤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대백제가 망할 일은 없었어!”

“에이! 어르신도……. 그게 어째서 고구려 탓입니까? 신라가 당나라 하고 한편 먹고 죽자고 달려들었으니 망했지!”

“그러니까 아무튼 그게 다 네놈들 때문이다 이 말이다."

"억지 좀 그만 부리십시오."


순간 사타무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낯빛을 고쳐 휘에게 무릎을 꿇어 공수했다.     


“이런 공주님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합니다.”

“아!”          


 휘는 짧게 탄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 안에서 살았던 그 시대의 일을, 태어나 두 귀로 말을 알아듣는 순간부터 딱지가 않고, 진물이 나도록 듣고 또 듣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 와 잘잘못을 따지는 것부터가 의미 없는 일, 어차피 고구려든 백제든 당나라에서는 유민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혹시, 공주께서는 어찌 이곳에 오셨습니까?”     


 그는 영노의 화를 뒤로 하고 아무 일없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공자께서 사타무의 십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그 사타무의라고 합니다만.”     


 사타무의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쫙 폈다.     


“저는 물건을 가져오라는 사부님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사타무의는 여전히 도끼눈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영노를 무시하고, 휘를 향해 묘한 미소를 보였다. 그는 실없는 말투와 달리 날카롭지만, 지적이고 예민해 보이는 눈을 가진 남자였다. 심지어 단단해 보이는 턱선과 얇은 입매는 고집스럽고 신중해 보이기까지 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사타무의는 그의 긴 검지로 찌푸린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그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제가 무천공께 부탁을 드린 것은 좀 다른 내용이라서 말입니다.”

“다른 내용이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과연 무천이 보라고 한 것은 무엇일까. 결국은 대방군이 자신을 보낸 것이니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뇌전에 능숙한 궁사를 하나 보내달라 하였습니다!”     


사타무의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낮게 속삭였다.

그제야 휘를 보는 사타무의 눈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아무리 궁술에 능한 자라도 훈련된 군사가 아니고서야 뇌전을 자유롭게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작은 석궁 같은 것은 황궁에서 귀족들의 호신으로 쓰기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공주가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도 여인으로서 쓸 힘의 한계가 있는 것인데, 그 순간 이곳저곳을 떠돌며 주워들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백제를 건국한 여인의 이야기.     


소서노.     

한반도가 아닌 당에서 태어난 금지옥엽이 궁사에 버금가게 소노를 다룬다는 것은 그로서도 금시초문이었다. 휘는 사타무의 말이 끝나자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옳게 보셨습니다.”     


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럼, 무천공께서 보내신 사수이시니 믿고 보여드리지요!”     


 사타무의는 자신이 뛰쳐나왔던 철문을 다시 열어젖혔다.

휘와 영노, 그리고 지성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고, 곧이어 철문이 굳게 닫힘과 동시에 명광현의 거대한 대문도 굳게 잠겼다.  


  명광현은 낙양의 동시(東市)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뒤뜰로 연결된 통로는 뜻밖에도 야트막한 초산과 연결된 대나무 숲을 끼고 있었고, 작은 대나무 숲 옆으로는 낙양성을 가르는 낙수(洛水)에서 합쳐지는 습지가 연결되어 있었다.          


 대나무 숲이 끝날 때쯤 다시 허름한 나무문이 하나 나타나는데 그 뒤에는 명광 <明廣>이라는 거대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밝을 명, 넓을 광. 작은 산 하나를 아우르는 이 넓은 대장간마을은 인근에서는 규모도 가장 컸다.           

 당 고종은 고구려를 멸한 뒤 신라에서 구진천이라는 인물을 데려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구진천은 당대 최고의 뇌전을 만들던 궁장이었다. 명광현은 그가 머물며 무기를 만들던 장소이자 멸망한 백제의 최고의 박사들과 장인들을 강제 이주시킨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구진천을 포함해 나라를 위해 기술을 연구하던 박사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그들의 기술을 전수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다. 이후, 주로 이곳에서 하는 일들은 생계를 위해 궁에서 필요한 제수를 만들거나 화살촉이나 대검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타무의는 그 박사들의 후예 중 하나였고, 구진천이 죽기 전에 남긴 단 한 사람의 제자였다.  시원한 대숲을 따라 사타무의 일행이 대장간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쏴아아! 울리는 대숲에서 들려오는 댓잎들의 공명이 비처럼 그들 주변을 감싸 안았다. 앞서 걷던 사타무의는 몸을 빙그르 돌려 휘 앞에 섰다.          


“이곳이 명광현의 진짜 모습입니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번화한 東市를 바로 옆에 두고 있었지만 명광현은 사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볼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나라는 도대체 무엇인가.     


  줄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휘의 귀밑머리가 날렸다. 궁금증과 슬픔이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를 보는 영노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걸렸다. 마치 먼 옛날을 회상하듯 자신의 하얀 수염을 어루만지며 강 너머 어딘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어르신!”     


영노를 부르는 사타무의의 얼굴에 촉박함이 느껴졌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지금 여기서 한가롭게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라고 이 영감탱이야! 그는 주먹으로 미간을 벅벅 문질렀다.     


“일단 서두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타무의는 앞서 걸어가며 길을 재촉했다. 뒤따르던 영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그런데 그쪽 공자는 어째서 따라오는 것이오?”     


영노의 말투에는 불만과 불신이 가득했다.     


"하얀 공자는 중요한 제 손님입니다! "     


앞서 걷던 사타무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했다. 지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무리에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 한 사람, 이 모든 세상의 아름다움을 혼자 독차지한 것 같은 이 사내는 홀로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뒤돌아보는 휘와 지성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에게 받아야 할 것이 있으니 말을 해야 했지만 영노는 좀처럼 틈을 주지 않았고, 지성 또한 모르는 척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도대체 이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휘는 앞서 가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보며 눈짓했다.     


‘어서 돌려 주십시오!’     


그녀의 눈짓을 알면서도 그는 모르는 척하며 자신의 엄지에 낀 각지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대나무 숲길 끝에는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큰 울타리가 보였고. 울타리 너머에는 사람 허리까지 자란 갈대숲이 이어졌다. 그리고 보이는 독특한 구조의 목조건물이 위풍당당하게 골짜기를 따라 자리하고 있었다.     


지붕 양 끝에 얹어진 기와의 모양이 특이했다. 위로 치솟는 꼬리 부분을 날카롭고 정교하게 다듬어 새가 꼬리를 세워 날아오르는 듯했다. 양 날개는 마치 봉황처럼 날렵하게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고, 그 우아한 곡선을 따라 연꽃, 구름,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꽃 등의 무늬를 새겨 외면을 장식했다.      

            

당나라의 색채가 역동적인 화려함이라면, 백제의 치미는 섬세하고, 고풍스러웠다. 


"백제의 세공 기술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영노는 꿈꾸는 눈으로 골짜기에 닿을 듯 날렵하게 솟은 치미를 바라보았다. 마치 대백제,  그날의 영광이 다시 눈앞에 펼쳐져 보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기와 모양이 매우 아름답군.“     


조용히 일행을 따르던 지성이 읖조렸다.     


"백제의 치미는 그 형태가 매우 독특하고 정교합니다.“     


사타무의는 건조하게 대답을 했다.     


"치미라…….“     


지성은 황홀한 눈으로 아름다운 기와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임치왕이 이것을 본다면 왕부 전각의 기와를 모두 바꾸려 했을 것이다. 휘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건안성에서도 치미는 볼 수 있었지만, 이렇게 정교한 것은 보기가 어려웠다.     


 고요했던 마음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너무 아름다워 애잔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의 슬픔이 저 깃을 따라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그녀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들.          


역시 부왕의 말대로 고종은 영악한 자였다. 대장장이를 비롯해 각종 기술자와 공예인들을 낙양에 머물게 했던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이 됐다.          


'이곳에서라도 예기를 마음껏 펼치라!'

'그리고 당을 위한 무기를 만들라!‘          


속을 생각한 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타무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무천공이 그대를 이리 보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그는 빠르게 건물을 돌아 돌다리로 연결된 골짜기를 성큼 넘어갔다. 지성이 휘 앞을 지나 돌다리 위로 올라 그녀를 향해 돌아섰을 때, 영노는 휘 앞을 가로막아 손을 내미는 지성을 막았다. 


영노는 그의 얼굴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맥없이 손을 내린 지성은 돌아서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다리를 건넜다. 그러나 영노가 뒤를 돌았을 때 휘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아!, 아니!”     


영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건안성의 공주님은 좀 특별한 분 같습니다!”     


지성은 허공으로 뛰어오른 휘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흠! 흠!”     


영노는 헛기침을 하며 지성의 눈치를 살폈다.           

지성이 휘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자 영노의 마음에 불길한 징후가 일었다. 오랫동안 무인으로 살아온 인생, 누구보다 감과 촉이 예민했다.           

 

‘여자한테는 병적으로 관심이 없는 자라고 들었는데.... 헛소문인가’          


허리춤에서 얇고 긴 무릿매를 꺼내 든 휘는 건너에 있는 버드나무를 향해 휘둘렀다. 제법  굵은 나뭇가지에 채찍이 걸리자,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휘이익! 돌다리를 마저 건너던 사타무의는 자신보다 앞서가는 휘를 보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건너편에 다다랐다. 나무에서 줄을 거둔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채찍을 허리에 감았다.           


지성의 눈은 계속해서 휘가 휘두른 채찍에 시선이 머물렀다. 영노는 휘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듯하다가 또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무천 그 천한 놈이 건안성에서 공주한테 대체 무슨 짓을 가르친 게야!“     

 

건안성은 아무래도 전쟁이 잦은 곳이었다. 뭇 귀족 여인들처럼 치장만 하고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설마 하니 거친 무사들처럼 무예를 가르칠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게다가 귀한 혈족의 힘을 저런 쓸데없는 데다 낭비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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