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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06. 2020

#7 부여 휘

ㅡ 뇌전을 쏘는 여인

"공주를 전장에 내 보낼 생각으로 이곳에 보낸 것이라면 내 당장 그놈의 목을 칠 게야!"

"설마 그런 뜻으로 공주에게 무예를 가르친 것이겠습니까?"       


 지성이 영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는 다시 한번 휘의 뿔각지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이 물길 건너 반대편에서는 무엇을 더 보게 될까. 기대감으로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여 공주께 혼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냥 티도 내지 마십시오! “     


 꿈꾸는 얼굴로 휘를 바라보는 지성에게 영노는 일갈했다.    


“역시 그대는 나를 알고 있군.”     


지성의 말에 영노는 콧웃음을 지었다.     


“암요, 이 낙양에서 앉은뱅이도 다 아는 전하의 얼굴을 이 늙은이가 모르겠습니까?”     


지성의 마음에 큰 바람이 빠져나가는듯했다.     


“공주께서는 모르니 다행인가?”

“공주께서는 낙양은 잘 모르시니, 헌데! 도대체 여길 왜 오신 거요?”     


영노는 다시 마뜩지 않은 표정으로 지성을 쏘아보았다.     


"사타공이 불러서 왔을 뿐이오."     

“지금 명광현과 괵왕부가 엮이는 것은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요! 능히 헤아리실 줄 압니다.”  


 사괵嗣虢지역,

당에서는 수도인 장안과 낙양의 주변의 영토를 괵虢이라 불렀다. 수도 변방의 요충지였으며. 장안과 낙양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때문에 황실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이는 이곳을 다스릴 수 없었다.


가뜩이나 변란이 잦은 때, 괵왕부와 왕궁 무기를 만드는 명광현이 가까이하는 것이 이 시기에는 또 다른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일이었다.       

    

 영노에게서 공손한 말투가 나오자 오히려

불편한 건 지성이었다. 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노인이었다. 분노, 슬픔, 공포, 불안, 그의 깊은 눈에서 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쏟아져 나오는 듯하다가도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졌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불편한 게로군?”

“편치는 않습니다.”     


깊은 한숨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황족이라 하나 어린 시절부터 형제들의 죽음을 숱하게 보아 온 지성이었다. 그는 아비가 죽어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혼인은 정치를 위한 방패일 뿐, 거기에 감정을 싣는 것은 사치고, 쓸데없는 일이다.’      

    

지성은 휘의 뿔각지에 더욱 힘을 주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무엇 때문에?     


"저 철 모르는 녀석은 공자의 신분을 알더라도 공주께는 내색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내가 왜 싫은 거지?"


 영노는 힐끗 지성을 올려 보았다.     


"천수天授시절 여제의 발아래 수많은 사내가 무릎을 꿇었지요."     


지성의 손은 긴장으로 땀이 찼다. 영노의 안색은 참을 수 없는 화기로 붉어졌다.

살기!  호랑이보다 무섭고 매보다 날카로운 살(殺)의 기운이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많은 황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만, 더러,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지요."


마치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것처럼 그는 먼산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이미 내를 건넌 사 타 무의 와 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숲을 막 돌아나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사타무의는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빠르게 손짓을 했다.    


 "그때 보았습니다. 비굴하게 무주의 발아래서 개처럼 목숨을 구걸하던 한 사내를 말입니다."


 지성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죽어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기억하는 것이 측천무후에게 엎드린 아비의 모습이었다.          


 “그는 아내를 버리고 자식과 지위를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낮고 섬뜩한 목소리가 지성의 폐부를 관통했다. 지성은 수치심으로 몸이 떨려왔다. 황족으로서 단 한 번도 떳떳하지 못했다.


그 기억은 이지성이란 사내의 불행의 시작이었고, 지금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족쇄였다.     


의 얼굴에서 내내 보이던 미소가 사라졌다.


 “내가 여기 있는 것과는 무관한 얘기군!”     


괴로움을 누르며 나오는 목소리는 작게 떨렸다.


“무관해야 할 겁니다!.”     


영노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째서?”     


지성이 되물었다.     


"이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혼사가 파기된 것이겠지요?"


여기서 더 이상 어물쩍 거리지도 말고, 공주를 넘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희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사내, 그의 매혹적인 입꼬리가 무너지듯 일그러졌다.     


 "제 말을 아시겠습니까? “     


다시 평온한 얼굴을 되찾은 영노는 지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흑치 장군의 죽음과 괵왕부는 아무 관계가 없었으면 합니다."

"그 무슨!”     


 지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아니라고 반문을 해야 했다.


순간 섬광처럼 스치는 하나의 의심이 그의 혀끝을 붙잡았다. 측천무후의 죽음을 기다리던 이들이 생각보다 궁에는 많았다. 어디 궁뿐이랴, 대부분 황족이 그러했다.


가깝게 지내는 융기가 그러했고, 고모인 태평공주 또한 그러했다.     

그동안 궁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까지 알고 있는 지성으로서는 돌려 묻는 영노의 질문에 확답할 수 없었다.


 "헉헉! 대체 여기서 뭘 꾸물거리십니까?"


 숲 모퉁이를 돌아 나갔던 사타무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불렀다.     


 "지금, 이 재미난 구경을 놓치시면 나중에 후회하실 것이오!"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서 가십시다! 공주께서 재미난 걸 보여……."


 '쉬이 이잉!' 사 타 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땅을 흔드는 거친 쇳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높이 솟았다. 끝이 뭉툭하고 기괴하게 생긴 화살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뻗어 올랐다.     


높이 오르는 화살은 마치 여인의 흐느낌처럼 시작해서 귀를 찢어놓을 것 같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풀숲 여기저기서 후드득 소리가 들렸다. 화살과 함께 모든 동물이 한꺼번에 뛰어오른 탓이었다.          


 "지금 제가 굉장한 걸 봐서 말입니다."     


사타무의는 흥분으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저게 대체 무엇이냐?"

"저는 당장 내일 무천공을 만나봐야겠습니다."

  

 다그치는 영노의 말을 무시한 채 사타무의는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했다.     


"지금 저 화살을 누가 쏘았는지 아십니까? 바로 공주요! 아하하하! 세상에 스승이 만든 천보노를 이리 잘 다룰 줄 알았다면 내 진즉에 건안성에 뛰어갔을 겁니다."     


 그는 지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천보노, 한번 쏜 화살이 천 보나 나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당나라 석궁이 고작해야 삼백 보였으니 구진천이 만든 천보노야말로 그들이 꼭 갖고 싶은 신무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구진천은 당에서 끝끝내 천보노를 만들지 않고 명을 달리했다.     


"제가 지금 귀한 단백석을 발견했습니다. 크하하."

"네놈이 기어코 그 물건을 만든 것이야?"


 영노는 잰걸음으로 순식간에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서둘러 지성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사타무의의 얼굴에는 환희에 찬 미소가 가득했다.

   

 여름 초입의 바람은 아직은 덜 익은 사과처럼 시큼한 향이었다. 우거진 숲의 모퉁이를 돌면 사방이 확 트인 들판이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었고, 해는 이미 멀리 보이는 나무들 사이에 걸려있었다.      


휘는 붉은 태양을 등지고 곧게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앞에 놓인 수레 위에는 사람 키만 한 거대한 활이 놓여 있었다. 노을에 비친 우아한 그림자는 허리에는 채찍을, 오른손에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고 굵은 화살을 손에 쥐고 있었다. 지성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모습을 다 담아내려는 것처럼 크게 떠졌다.     


 “자! 빨리! 빨리!”     


사타무의는 재촉했다. 그는 지금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명광현에 떠도는 소문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더하고 부풀려져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화처럼 떠돌았다.


 그것은 신물이 사라지고, 국운이 다했다 자포자기하던 유민들에게 한 가닥 희망같은 불씨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사타무의는 믿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휘는 자신의 앞에 있는 거대한 활에서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수레 손잡이를 발로 꺽어 내려 천천히 자신의 앞으로 세웠다. 그리고 활을 땅에 박고 자신의 몸을 시위에 맡기듯 밀어 당겼다.


 거대한 활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자신의 몸으로 밀어 당긴 시위에 힘을 풀자, 반동으로 가늘고 유연한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그녀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고 굵은 명적鳴鏑은 쉬이이이! 또다시 거친 소리를 내며 하늘을 향해 튀어 올랐다.     


 그것은 마치 유연한 물고기가 강 위를  뛰어오르고, 높이 날아오르려 준비하는 독수리가 땅을 박차고 처음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힘차고 아름다웠다.          


“마치 활을 다루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영노께서 무천공을 잘 아신다 했지요?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     


영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정거리가 어떻게 됩니까?”     


지성이 사타무의에게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성에게 반색했다.     


“이름이 천보노니 천보를 간다고 해야지요!”

“그러나 천보노는 우는 화살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면 어떻습니까?”          


 사타무의는 빙그레 웃었다. 명적, 우는 화살이라 불렀다. 주로 사냥을 할 때 동물들을 몰기 위해 쓰거나 전장에서는 위험을 알릴 때 쓰이는 신호용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명적은 지성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목표물을 쏠 수도 있는지요?”

“활을 지탱하는 수레만 조정할 수 있다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이..."


사타무의는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영노를 슬쩍 돌아보았다.


“좀 다르지요. 엄밀히 말하면 화살은 만들었지만 활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화살만 흉내를 낸 것이지요!”

“스승이 제자에게 만드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지성의 말투가 점점 차갑게 변해갔다.     


“그것을 알면 이 나라 황실이 저를 가만 두었겠습니까?”          


사타무의는 슬쩍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비탈 너머 황궁의 망루가 보였다.     


“그걸 알면서 저 물건을 만든 게야?”     


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는 비단 지성뿐이 아니었다. 영노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더불어 깊은 절망과 원망이 섞여있었다.     


“이제는 세상에 나와야 하니까요.”     


사타무의는 영노가 아닌 지성을 보며 답했다.     


“흑치 장군이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구진천과 무천 그들은 원래 동예인이었다. 동예인들은 원래 활을 만드는 것에 유능한 종족.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만들어지는 단궁, 맥궁, 각궁의 모든 활의 기술은 그들의 손에서 나왔다. 그들은 음각과 금세공술이 뛰어났으며 특히 나무를 잘 다룰 줄 알았다.      


활의 극강의 기술. 구진천의 천보노.     

당나라 고종은 어떻게든 그것을 갖고자 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그의 죽음으로 명광현에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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