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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07. 2020

#8 망국의 신물

ㅡ 금동 대향로

동예,

바다와 풍요, 예기(禮技)의 나라, 그들은 온순한 성품을 가진 활의 민족이었다. 무기를 만드는 그들의 손이 악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신라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황성에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 

         

 영노는 불어오는 바람을 크게 들이마셨다. 꽉 다물었던 입술에서 황하의 비릿한 피향이 느껴졌다. 사타무의는 휘가 쏘아 올리는 화살 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기쁨과 환희의 얼굴, 그는 돌연 지성을 향해 웃었다.     

"전하께서도 이것이 마음에 드십니까?"


 지성의 안색이 흑빛으로 변해갔다. 사타무의, 저자는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를 향해 아름답게 웃어주던 지성은 미소를 지웠다. 세상 어떤 어둠도 밝힐 것 같았던 그 아름다운 미소가 사라진 곳에는 나이답지 않은 어둠과 타락한 황족의 진득한 야망이 실려있었다.     


"나에게 이것을 보이는 목적은?"


지성은 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놓쳐버린 아쉬움보다 더 진한 미련이 그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안다고?"

"공주님과 혼사가 깨어진 이유 말입니다."   

 

 자신만만하게 살기를 띠던 영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이들의 대화의 내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보게! 이 희멀건 공자가 공주님 혼사에 대해 뭘 알겠는가?”     


어떻게든 사타무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침이 없었다.     


"흑치장군을 죽이고, 공주와의 혼사를 깨고, 그다음은?"     


지금까지의 행복감과 놀라움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사타무의와 지성의 눈빛이 허공에서 긴장감으로 번쩍였다. 그러나 이내 지성의 눈빛이 풀렸다. 멀리서 그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사타무의가 지성에게 바싹 다가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임치왕께 전해주십시오! 명광현의 장주가 뵙기를 청한다고 말입니다."    

"장주는 목숨이 여러개라도 되는 모양이오."

 

 멀리서 휘가 낙수의 노을을 등에 지고 모란꽃이 흐드러지게 핀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하나로 묶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낙수의 바람을 타고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났다. 휘의 얼굴에 얼핏 편안한 미소가 드리웠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가가 살포시 풀어졌다.           


지성이 본 그녀는 바람을 타고 천상에서 내려온 비천의 형상이었다.

한 여름의 비릿한 강바람을 떠올릴 때마다 타는 듯한 노을을 바라볼 때마다 그는 떠올릴 것이었다. 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활을 잡는 그녀의 유려한 옆모습이 그를 미치게 만들 것이라고.     

          



지성은 비를 뚫고 밤새 달려 낙양을 벗어나 함곡관에 당도했다.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사방에 찬 이슬이 내리는 새벽녘. 서재에서 내실로 통하는 문을 열자마자 어디선가 구슬픈 비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성은 서둘러 중문을 열고 좁고 긴 회랑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회랑이 끝나는 곳은 초승달 모양의 호수, 월피月陂와 이어졌다, 좁고 후미진 곳에는 작고 고풍스러운 정자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정자를 가린 비단천이 나플 거리고, 그 사이로 비파를 끌어안고 있는 사내가 언뜻 비쳤다.     


“너무 늦었네!”     


비파를 안고 있는 사내는 여전히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지성은 정자 안의 사내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 공수했다.     


“주인도 없는 곳에서 혼자 기다리려니 무료해서 말이야!”

“송구합니다.”     


이융기는 먹을 칠한 것 같은 짙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힐끗 지성을 바라보았다.     


“그래, 황상께서는 그대가 원하는 답을 주시던가?”

“.....”     


지성이 아무말 하지 않자, 그는 다시 비파를 뜯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가 알던 여릉왕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의 황제, 중종이 여릉왕이었던 시절, 무측천에게 이융기의 아비인 이단과 지성의 아비 이굉은 측천무후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그 결과 친 아들이었던 이단은 냉궁에서 지내야 했고, 이굉은 신주 자사로 좌천됐다. 대신 이융기의 친모와 지성의 친모는 모두 여황제에 의해 독살을 당했다. 


황족에 대해 무측천은 자비를 두지 않았다. 그녀는 황위에 오르기 위해 태자였던 아들을 죽였고, 가까운 황족과 대신들 대부분 몰살시켰다. 유배를 간 황족 중 그 싹이 조금이라도 출중한 이는 반드시 찾아 죽이거나 죄를 씌어 멸족시켰고, 부관참시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두 번 다시 황후가 황제의 자리를 넘보는 것을 봐줄 수가 없다.”     


이융기는 비파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저대로 둔다면 폐하의 목숨이 위태로워 보여 그럽니다.”

“흥, 애초에 황후의 치마폭에 싸여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사가 아니더냐!”

“허나 전하!”

“됐다! 듣기 싫구나!” 


 이융기는 술을 단숨에 털어놓고는 술잔을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옥을 깎아 만든 술잔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부서졌다.     


“위후가 어떤 인물인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이융기는 끌어안고 있던 비파를 거칠게 한쪽으로 치우며 일어났다.     


”너도 이만 마음을 접어라."

"허면, 전하께서는 기어이 태평공주와 손을 잡으시려 하십니까?"


호수에 비친 달을 바라보던 임치왕이 작게 웃었다. 

    

“여우를 잡으려면 다른 여우와 손을 잡아야겠지.”     


달빛을 등지고 돌아선 임치왕의 모습은 곧 선계로 들어설 듯한 선인의 모습이었다.     


“이곳 정취는 올 때마다 새로워 좋다. 월정月精이라!”     


뒷짐을 지고 달을 보고 선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너는 어쩔 작정으로 뛰쳐나온 것이야?”

“폐하께 간언을 해도 듣지 않는 좌습유의 자리가 뭐가 아쉽겠습니까?”

“너마저 위후의 눈밖에 나면 어쩌려고?”

“전하 옆에 자리 하나 내어 주시지요!”

“그래! 너랑 나랑 이곳저곳 유랑이나 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이융기는 무릎을 탁 치며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끄윽끄윽 혼자 배를 잡고 웃다가 그는 지긋이 지성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여인이었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을 한다.”    

 

이융기는 다시 잔잔한 호수의 달빛을 그윽하게 응시했다.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이더냐? 화려한 외모에 대나무 같은 성미를 가졌으니, 너는 측천무후보다 더 무서운 여제가 되었겠지.”     


키득키득! 이융기는 허리를 숙여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취하셨습니까? 농이 지나치십니다.”     


지성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말해보아라. 파혼한 정혼녀를 본 소감은 어떠하더냐!”

“..... 후회를 했습니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그는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후회라. 의외의 대답인데. 가선방의 처녀들이 서운해할 것이야.”  

   

놀리듯 던지는 농담에도 지성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허나 다행이다. 이제 진짜 혼인을 하면 되겠구나.”

“.....”     


두리번거리며 다시 술잔을 찾던 이융기는 자신이 던져 깨진 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돌아서면 후회할 짓이지."


그는 탁자에 있는 술병을 들어 통째로 부어 마시기 시작했다.     


 "신주에는 가지 않을 작정이냐?“     


신주는 지성의 아비의 묘가 있는 곳이었다.     


”네가 아비를 보지 않는 것은 이해한다만, 그렇다고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어느새 이융기의 옆에 선 지성은 그에게서 술을 건네받았다.


”지성아! 네 아비를 너와 비교하지 마라. 너는 네 아비와는 다른 사람이니."      

    

 신주자사 이굉, 지성의 아버지는 황실에 피바람이 불 때, 왕비를 버리고, 아들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무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융기와 이지성, 이 둘의 어린 시절은 매우 닮아 있었다. 궁에서 오랫동안 유폐된 채 지내야 했던 임치왕 이융기와 버려진 채 변방을 떠돌아야 했던 이지성. 이들의 불행한 유년 시절의 중심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측천무후.           

 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들어와 고종의 황후로, 역사상 유래 없는 여황제로, 그녀의 생이 끝날 때쯤에야 그녀의 권력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당황실을 몰살시키고 무씨들의 주나라를 지속시키자 했으나, 그녀의 모성은 무씨가 아닌 이 씨를 선택했다. 그렇게 이 씨 당황조는 그녀 손에 멸망했고 다시 부활했다.    

       

 그러나 중종은 무능한 황제였다. 도교에 빠져 술사들의 말만 들었고, 이를 이용해 비妃인 위황후와 그녀의 딸 안락공주는 무씨세력과 손을 잡고 권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위황후는 또 다른 측천무후를 꿈꿨던 것이다.    


“나는 당나라 황실이 다시는 무씨들의 손에 놀아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연거푸 술을 들이켜는 이융기의 눈에는 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쉬이익! 끼이익!


밝은 달빛 저 편에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며 날아오고 있었다. 주인을 찾는 소리였 다. 휘리릭! 지성은 서둘러 휘파람을 불자 매는 방향을 틀어 곧장 지성에게 날아와 그의 팔에 앉았다.  


황하 묵철, 청석산.


라고 쓰여있었다.     


“뭐지?”     


이융기가 먼 산을 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북문에서 날아온 전갈인데 북쪽 사정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어이 황하까지 내려온 것인가?”

“청석산이면 이미 노룡새를 지난 듯합니다.”

“그들이 기어이 선을 넘는군.”     


이융기는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영주에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성은 글씨가 쓰인 천조각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북도 영주는 안동도후부가 있는 개주와 산 하나를 가운데 두고 있었다.

변방을 돌아다니며 매를 찾아다니고, 산을 돌아다니며 유랑할 때 그는 묵철에게 위협을 당하는 한 모녀를 구했다. 지성은 큰 숨을 들이켰다. 참 얄궂게도 어긋나는 운명이다.     

     



“물건은 잘 가지고 왔느냐!”

“예 전하!”     


 건안 궁성의 후미진 전각, 상석에 앉은 사람은 머리에 정교한 조우관을 쓰고, 자주색 관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화려한 봉황이 새겨진 금빛 난대를 하고, 귀에는 옥과 금으로 세공된 귀걸이가 화려했다. 


건안성의 대방군왕 부여경, 그는 박달나무로 깎아 만든 넓은 침상에 걸터앉아 턱을 위로 치켜들었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둡고, 쓸쓸했다.       

    

 요동은 사방이 혼란스러웠다. 백제와 고구려와 오랜 전쟁으로 당은 돌궐의 가한 묵철의 등장을 막지 못했다. 그들이 끊임없이 당나라를 침입하며 괴롭혔고, 그 결과 요서지역의 안서 도호부가 그들 수중에 떨어졌다.     

그렇게 잘 유지해 왔던 하북도 일대의 안정과 평화가 깨지고 있었다.   

       

 부여경이 대방군왕에 오른 지 십여 년, 그러나 흑치상지가 죽은 뒤, 유민들의 결속은 서서히 약화되고 있었다. 만주 일대에는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이 세력를 키워 나갔고, 그 사이에서 건안성은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그는 대방군의 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내였다. 돌궐의 침입은 매년 반복됐고, 유민들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 모든 것은 부여의 씨족이 신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백제의 신물.           


 사타무의는 탁자 위에 등짐처럼 메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허름한 무명천이 겉히고, 겹겹이 싸인 붉은 비단이 벗겨졌다.           

금동으로 만든 거대한 향로가 눈 앞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용은 머리 위에 구름과 연꽃 뿌리를 입에 물고 승천하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뿌리를 따라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 위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화려하게 피어났다.     


 여러 산과 인물들, 사냥꾼과 신선,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같은 동물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마치 천상에서 신선들이 노니는 것처럼 악기 소리에 따라 폭포가 흐르고 불꽃이 일렁이고 봉황이 춤을 추고 있는 형상이었다.   

  

 무게만해도 열 아홉근, 크기는 이척이 넘었다.     

 

잃어버렸던 백제의 신물이 드디어 다시 그의 손에 들어 왔다. 그가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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