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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09. 2020

#9 사타무의의비밀

- 황노 -

부여경은 천천히 물건을 쓰다듬듯 훑었다. 그의 눈이 조금씩 미세하게 흔들렸다. 흠잡을 곳 없는 정교함, 찬란한 백제의 그 날이 자신의 눈 앞에 다가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고했다. 공주는 하라는 데로 잘 따르더냐?”     


 미소를 보였던 부여경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예! 대방 전하, 무엇이든 개의치 않으신다 하셨습니다.”

“개의치 않는다라? 홧! 크하하하!”    

     

 부여경의 웃음소리가 작은 전각을 울렸다. 내내 고개를 숙이던 사타무의는 얼굴을 들어 웃고 있는 부여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권력에 집착한 왕족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똑같은 잔상을 남겼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도륙을 당해도 저들의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 나라는 자신들의 권력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이상. 개로왕의 간절한 염원은 애초에 이곳 건안이 아닌 웅진에 묻혀 사라졌다. 불에 타고 재가 된 자리에는 싹이 자라나지 않는 것이 마땅한 이치였을까.


그날,          


“이것은 공주마마의 선택입니다.”     


사타무의는 거대한 노弩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휘 앞에 섰다.     


“대방군께서도 그리 말씀하시더이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의 선택이라!”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어야 하겠지!' 어떻게든 자기 하나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사람이 지금의 대방군이었다.     


“건안성의 유민들을 위해서지요!”  


팔짱을 낀 채 사타무의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놀랐습니다. 그대가 명광현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니!”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뭐, 좋은 뜻으로 듣겠습니다.”     


사타무의는 빙글거리며 능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썩 믿음이 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상인에게 신뢰는 목숨과도 같지요!”    


휘는 그의 말에 픽! 하고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그래서, 유민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신물을 만들었다?”     


영 미덥지 못한 탓에 그녀의 말끝이 휘어져 나왔다.     


“공주마마께서 어찌 보시던, 저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타무의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젊은 장주의 눈은 영노의 삶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대는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휘는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사타무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명광현의 장주 사타무의가 아니겠습니까?”       

   

쏴아아! 낙수의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이 딛고 서 있는 어린 갈대를 쓸고 지나며 소리를 냈다.

     

“혹, 건안성이 흑치 중랑장의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까?”   

  

역시 그녀가 충족할 만한 답을 주지 않을 질문.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대방왕전하의 뜻을 전하는 것뿐이지요!”      

    

 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무표정의 사타무의를 지나쳐 발로 수레를 밟아 내렸다. 우지끈, 둔탁한 소음을 내면서 거대한 활이 그녀 앞으로 당겨졌다.     


“그대 말대로 이것은 나의 선택이오!”          


 휘는 한 번의 당김으로 몸채만 한 활을 들어 올려 시위를 당겼다. 굉음을 내며 명적이 하늘로 솟았다. 사타무의의 눈에는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신물은 무사히 전달될 것입니다.”          


탁한 미소로 향로를 보는 부여경의 누릿한 눈빛을 보며 그는 휘에게 처음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잘 된 일. 이제는 이곳을 버려야 할 때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어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진정한 부여씨들의 고향, 발해였다. 


706년 10월.     

묵철은 당과의 화친을 깨고 다시 요서 지역을 급습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달리는 기마병이 주력부대였다. 말 위에서 휘두르는 도끼와 날아오는 활을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대낮에 밀물처럼 밀려들어 한바탕 진탕질을 하고는 해가 지기 시작하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이고, 여인과 식량을 약탈해갔다.    


“저들이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나 봅니다.”     

     

 무천과 함께 모인 무장들은 삽시간에 일어난 일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영노는 백발이 성성했지만, 창을 들고 있는 그의 다부진 몸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무인의 기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조정에서 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기다릴 틈이 없습니다.”     


제법 위엄있는 무장 하나가 말을 꺼냈다. 무천의 감은 눈 사이로 미간이 깊게 굴곡졌다.     


“장안에서 이쪽의 일을 신경을 쓸 리가 없지요! 모두 우리 탓을 할 겁니다.”

“그래도 아직까진 궁수대가 잘 막아주고 있으니 괜찮습니다만, 저들의 기세가 너무 빠릅니다.”

“돌궐의 기마병이야 정면으로 당해낼 수 없지 않겠습니까?”     


 모여있는 부장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탄식을 했다. 그들 중 돌궐의 기마병을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서쪽의 토번과 동쪽의 돌궐은 흑치상지의 게릴라 전술을 가장 두려워했다. 북방의 야만족이라 불릴 만큼 사납고 잔인한 그들에게도 흑치상지의 정예병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풀 밟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훅치상지의 군대는 새처럼 가볍고 늑대처럼 빨랐다.


 소리 없이 야밤에 들이닥쳐 그들의 말을 전부 죽이고, 보급로를 철저하게 끊어냈다. 그 때문에 식량을 잃은 묵철의 병사들은 고향에 돌아가기 전에 태반이 아사하거나 중상을 입어 불구가 됐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난 이야기들. 흑치상지가 없는 지금의 묵철은 달랐다.     


“내가 비록 노쇠했으나 아직 쓸만하네"     


영노가 나서며 일갈했다.     


“안 됩니다!”     


무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가 만든 황노(趪弩)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사타무의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수레 뭉치 이름이 황노였소?”     


 영노가 무심하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 이곳까지 따라왔는가?”     


 무천은 못마땅한 어조였다. 애초에 낙양에 휘를 데리고 간 목적은 명광현의 황노 따위가 아니었다. 황노는 낙양성의 눈을 돌리기 위한 하나의 연극, 공주는 부여경이 던진 미끼였다.   

  

“제가 낙양성 몰래 저 아이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서운한 말씀이십니다.”    

 

무천은 벌레를 보듯 그를 노려봤다.    

 

“그래도 고구려인이 굳이 건안성의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하오!”

“제가 고구려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만.”     


한 무장의 말에 사타무의가 받아쳤다.     


“백제인도 아니지 않소? 아니여야 하겠지만!”  

   

무천이 사타무의를 쏘아보았다.     


“허나, 명광현 장주로서 이곳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타무의의 음성에는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훗!”     


무천이 실소했다.    

 

“그 황노는 말이야. 그대 스승이 내게 부탁한 물건이지 원래 자네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찌 만든 자가 따로 있고, 주인이 따로 있다는 소리로 들리옵니다?”     


팔짱을 낀 사타무는 삐뚜름하게 섰다.     


“장주! 우리에게 저렇게 큰 무기는 쓸 일이 없네.”     

     

영노가 끼어들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아쉬울 때, 오히려 무천이 이렇게 그를 내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쓸모가 있고 없고는 따저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타무의 또한 지지 않는 말투로 무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듯 했다. 

     

“화살은 쓸모가 있습니다.”     


문이 열리며 담담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휘였다.     


“공주께서 전장에 나가려 하시나이까?”    

 

사타무의는 들어오는 휘를 보며 반색했다. 그녀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기대감마저 가득 담겨 있었다. 

    

“여자라고 전장에 나가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그럼요! 공주님은 충분히 능력이 되시는 분입니다.”    

 

사타무의는 공주의 말을 받으며 신나했다. 무천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갔다. -

     

“돌궐의 군사들을 너무 얕보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자비를 기대선 안 됩니다.”     


 반대의 뜻을 돌려 말하는 무천을 향해 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들을 모른다고 하였습니까?”     


 선명히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 잊지 못할 얼굴.     


“상나라 무정의 왕후였던 부호 또한 정치가이자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습니다. 그뿐입니까. 후한말 조앙의 아내 왕이 또한 전장에 나가서 싸움을 했던 여인이지요. 그리고 당나라에도 무후가 계셨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공주의 정체를 알리고 싶은 겁니까?”     


무천은 진지하게 휘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조정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대방군께서 원치 않는 일입니다.”     


영노의 음성이 점점 불안함으로 흔들렸다.     


“대장군도 뭐라 말을 좀 해보시오!”     


 영노는 괜히 무천에게 역정을 냈다. 무천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번 고집을 피우면 절대 꺽을 수 없었다.     


“대방군께서도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녀의 말에 아무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허락을 하시었다고요?”     


영노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금지옥엽은 아니어도 건안에 남은 단 하나의 공주였다.     


'뜻대로!'

     

휘가 부여경에게 들은 것은 단 세 마디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송화부인을 생각하셔도 공주님을 전장에 내보내실 수는 없습니다.”     


영노는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쳤고, 무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잠자코 자리를 지키던 휘도 자리를 뜨자 사타무의는 영노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공주께서 나서신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닙니까?”     


 사타무의의 말에 씩씩거리며 화를 삼키는 영노의 입술이 비죽 올라갔다.     


“장주께서 지금 건안성을 우습게 보는 거요? 물론 한 사람이 아쉽긴 해도 하나밖에 없는 공주님을 그 놈들에게 노출 시킬 이유는 없소이다.”

“아니 공주께서는 웬만한 무장보다 나은 실력을 갖추고 계시지 않습니까? 일당 백은 능히 하실 것을요.”


사타무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주께서는 그냥 왕족이 아닙니다. 백제의 잃어버렸던 혈족이란 말이오.”     


영노는 멍한 채로 주절거렸다.     


“혈족? 그런 게 정말 있소?”     


사타무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스승에게 말로만 듣던 옛날이야기였다.     


“딱하구려! 그때 눈으로 보시고도 모릅니까?”     


아차! 사타무의는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그랬군, 그랬어!"

"쯧쯧!“     


영노는 혀를 차며 방을 나갔다. 사타무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이내 표정을 지웠다. 

저녁 무렵, 건안성을 벗어난 무천의 무리는 태항산 평지에 막사를 만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무천은 사타무의를 조용히 불렀다.     


"대방군께서 부탁한 것은 활이 아니지 않은가?"

“그랬지요!”

“물건은 가지고 왔는가?”

“중요한 것이니 제가 직접 오지 않았겠습니까?”     


무천은 사타무의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영 미덥지 못한 표정. 사타무의는 차를 홀짝이며 자신을 미덥지 않게 바라보는 무천을 힐끔거렸다.     


“그 물건은 도착하자마자 이미 대방군께 전해 드렸습니다.”        

 

그제야 얼굴의 의심을 푼 무천은 자리에 앉아 칼을 뽑아 자루에서 날까지 손끝으로 천천히 훑어내렸다. 

    

“그럼 이제 말해보게. 왜 낙양에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사타무의는 여차하면 저 칼이 자신의 목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영노에게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언제까지 공주 전하를 숨겨둘 작정이셨습니까?”

“숨겨두고 아니고는 그대가 정할 것은 아니지.”    


묵철의 눈이 무섭게 휘어졌다.     


“나는 너 같은 이를 제일 혐오한다. 네게는 백제도 고구려도 신라도 우습지 않더냐. 아니지 이젠 당나라도 그러한가?”     


사타무의는 무천의 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도 명광현의 장주인데, 말씀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닙니까?”

“흥! 장주? 명광현이 언제부터 태평궁의 끄나풀이었던가! 지금 그곳에 있는 이들이 과연 건안성과 관계가 있느냐?”     


사타무의는 싱긋 웃었다. 막사에서도 그의 귀고리는 유달리 반짝였다.     


“경고하마! 나는 네가 태평궁과 무슨 관계든 상관하지 않는다. 허나, 건안성과 공주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니 명심하거라!”

“제가 공주께 해가 되는 사람이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사타무의는 억울하다는 듯이 무천에게 항변했다.     


“이 일로 공주가 낙양에 볼모로 가게 될 것이다. 그걸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오히려 여기보다는 그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벅저벅 사타무의를 지나치려는 무천이 그의 옆에 멈췄다.     


“그래도 천한 고구려의 사생아보다 반쪽이라도 백제인이 되고 싶었던 것 아니더냐. 그 귀걸이가 가진 의미를 잊지 말거라!”    


태평해 보이던 사타무의의 얼굴이 금세 흙빛으로 변해갔다. 

그는 나가는 무천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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