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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10. 2020

#10 황하의 바람

ㅡ  구원의 힘 ㅡ

요서지역에서 화북지방으로 가는 길은 하나였다.


옛 안서도호부의 영역이었던 용성에서 석성과 광도 을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건안을 지나 노룡새로 가는 길. 이 노룡새는 동쪽으로는 산서성 동쪽을 북동 방향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산줄기에 막혀 그 생김이 노룡의 새가 둘러싼 듯한 모양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줄지은 관문이 수십이었으며, 가장 깊고 험하여 천하 사새天下四塞의 하나로 불렸다. 워낙 험준한 산세와 산성을 함께 끼고 있는 유일한 샛길, 게릴라 전술을 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석성산 줄기를 따라 무천과 그의 군사 오백은 밤낮을 쉬지 않고 험준한 산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사람의 발이 말이 달리는 부대를 따라잡기는 어려운 일. 그러나 그들은 식량과 수많은 포로들을 끌고 가는 길이었으니 아무래도 그 속도가 더뎠다.     


 복면을 쓰고 입가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아내며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돌궐군들이 빼앗아 간 것은 유민들의 일구어 낸 그들의 피 같은 땀방울이었고,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무천은 지난날의 호탕하게 웃던 흑치상지를 떠올렸다. 불어오는 바람이 생채기를 낸 듯 관자놀이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침 새벽까지 쉬지 않고 내달렸다. 거센 물살의 황하에는 떠오르는 붉은 해가 이제 막 피어오르는 안개에 싸여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텁텁한 아침 공기와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돌궐군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무천은 발을 멈추고 납작 엎드려 동태를 살폈다. 그의 수신호에 맞춰 궁수대는 재빨리 자리를 잡고 활을 시위에 걸었다. 무천은 휘에게 눈짓했다.      

     

 그녀는 등에서 조심스럽게 활을 풀어 흙이 부드러운 곳을 찾아 활을 땅에 박아 넣었다. 전통에서 촉이 괴이하게 생긴 거대한 화살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모든 이들이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를 하나의 의식처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가냘파 보이는 공주의 모습에 반신반의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 해왔던 궁수들은 휘에 대해서는 절대에 가까운 신뢰를 보였다.    

 

그들은 공주의 힘을 믿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 만든 뿔각지에 시위를 당겨 넣고, 온몸을 시위에 걸어 서서히 하늘을 향해 허리를 젖혔다. 거대한 화살은 마치 그녀의 몸에서 장전된 듯 보였다.


무천이 조용히 손을 내리자, 휘의 손에서 시위가 당겨졌다.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화살은 아침을 막 물들이고 있는 새벽을 흔들며 하늘로 휘몰아치듯 올라갔다.   

  

  깊은 산속의 모든 동물이 놀라 뛰쳐나갔다. 군영의 말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날뛰었다. 서로 머리를 박기도 했고, 스스로 고삐를 끊고 자고 있는 돌궐군을 밟고 도망을 가기도 했다.


순식간에 돌궐군의 막사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일제히 수백 개의 화살이 그들에게 쏟아지자 병사들은 혼비백산했다.  


 무천과 군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산비탈을 내려갔다. 영노와 무천은 전광석화처럼 눈앞의 돌궐군을 베어나갔다.


 그들이 잡은 포로들을 죽이기 전에 끝내야 하는 일이었다. 돌궐군은 혼이 나가 있었다. 산에서 울리는 괴이한 소리와 함께 들리는 함성소리,     


흑치 장군은 죽었다면서.... 흑치의 귀신이라도 나타났는가?    

  

그들의 눈은 공포로 변해갔다. 빨리 도망을 가야 한다. 흑치군이 이끄는 정예병은 쫓아내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질기게 쫓아가서 마지막 사막에 던져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니까. 그때였다. 돌궐의 깃발을 든 수백의 정예병이 이쪽으로 돌아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무천의 손에 땀이 흘렀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수의 군사가 시기적절하게 딱 맞추어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세는 바로 역전됐다. 그들은 그와 휘가 있는 산등성이로 말을 달리며 활을 쏘고 무릿매를 날렸다.


 무천은 군사는 겨우 오백, 저들의 기마병과 정면충돌은 자살과 다름이 없었다. 거기다 잡혀 있는 포로들까지.   

 

묵철의 군사 하나가 줄에 꽁꽁 묶인 채 앉아 있는 여인들 중 한 명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나왔다.     

 

 “비겁하게 산속에서 공격을 하다니, 건안성의 무인들은 모두 비루한 소인배들이군.”

 “흐.. 흑!”     


 이미 여기저기 찢겨 너덜한 옷을 입은 여인은 공포에 질려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어서 나와라!”     


묵철의 중저음의 굵직한 목소리가 산과 대지에 울렸다.     


 “으으.. 윽!”     


병사는 여인의 머리채를 한 번 더 세게 잡아 올렸다. 피떡이 된 여인의 입술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흑.. 흐흑!”     


숨죽여 묶여 있던 여인들이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는 산 중턱 암벽 사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화살이 쏘아 올린 자리!


그 자리에 한 묘령의 여인이 서서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곧게 날아오는 화살의 환영!

묵철은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공주께서 오시었소?”     


사방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시야에 한  사내가 자신을 향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야 나오는군!”     


 묵철이 반갑게 소리 질렀다.     


 “크하핫! 무천 자네였나? 정예병들의 실력은 여전하구먼!”

 “식량은 내어줄 순 있지만, 여인들은 데려가야겠소이다!"     


 무천은 덤덤하게 말했다.     


 “왜 그래야 하지?”

 “아이들의 어미이고, 부모의 딸들이요!”     


묵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가한의 형제들을 더 잃고 싶으신가?”     


무천의 말에 묵철의 눈빛이 돌연 차갑게 변했다.     


“자 그럼, 여기 있는 이들을 다 돌려보낼 것이니, 공주를 내게 주게!”     


묵철의 손끝이 휘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무천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결국 이들과 정면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기어코 피를 보고 싶으신가? “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묵철이 물었다.     


"글쎄!"


무천이 말을 마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또다시 굉음이 들려왔다. 거대한 화살은 묵철의 기마병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정확히 날아갔다. 말들이 날뛰고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피를 보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요!"     


 무천의 말에 묵철은 즉시 칼을 빼어 들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 서로의 칼을 맞대었다.


챙! 꺾이지 않는 의지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무천은 이미 자신이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있었다.

    

 "개는 주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네."

 

낮게 들려오는 묵철의 음성. 무천은 더욱 눈에 힘을 주었다.           


 묵철이 손을 들자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병사의 칼이 여인의 목을 향해 내리치는 순간이었다.


쉬이익! 으아악! 무천과 묵철을 스쳐 지나는 화살이 병사의 머리를 관통시켰다. 그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모두 죽여라!"        

   

그의 말이 끝나자 커다란 도끼를 든 돌궐군들은 막사 안에 있는 인질들을 끌고 나왔다.           

그때였다.


뿌우웅! 긴 나팔소리! 대지를 흔들며 멀리서 군마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당의 붉은 깃발, 그들 맨 앞에 선 사람은 임치왕 이융기였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온 이융기는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바람을 타고 내리듯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부터 돌궐 군 중 누구라도 칼을 드는 자가 있다면, 당의 군대와 전면전을 치러야 할 거요!"


묵철은 이융기와 무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노려보았다.     


"무천! 그대의 주인은 이런 소인배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이 묵철의 철칙이었다. 당나라에 얻어내야 할 것이 있는 그로서 그들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다.     


"모두 돌아간다!”     


재빨리 말에 오른 묵철이 말머리를 돌리자, 돌궐의 기병은 모두 그를 따랐다.      

무천은 이융기 앞에서 고개를 숙여 공수했다.     


"임치왕 전하를 뵈옵니다."

"늦지 않게 도착을 해서 다행이군!"

     

이융기는 사라져 가는 돌궐군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랄 것도 없네. 돌궐군이 전처럼 영주까지 침범하는 건 곤란하니까."     


이융기는 무천을 향해 심드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안성이 있음으로 해서 영주를 포함한 변방지역이 안정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개주, 안동 도호부까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었다.   

  

  산의 깎아지른 암벽 밑에는 부채꼴로 넓게 펼쳐진 평지가 이어졌고, 암벽과 평지 사이로는 황하와 이어지는 강줄기가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휘가 앉아 있는 넓고 편편한 바위는 그들이 묵고 있는 막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채찍을 무의식적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황하의 힘찬 물줄기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곧 낙양으로 볼모가 되어 갈 것이었다. 영승제는 보고 가고 싶었다. 백제인의 혼이 담긴 신물, 그 아름다운 금빛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시간들이었다.

       

휘는 채찍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쏜 화살에 맞아 떨어뜨렸던 묵철의 채찍이었다.     


 숫산양의 가죽을 바짝 말려 여러 개로 쪼개고 얇게 꼬아서 매우 부드럽지만 단단했다. 채찍의 양쪽 끝머리는 둥근 가죽을 덧댄 손잡이가 있고, 중간에는 이음새 없이 꼰 두 개의 줄로 갈라져 굵은 돌이나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것은 한 줄로 쓸 때는 채찍으로 쓸 수 있지만, 양쪽 끝을 잡으면 돌 같은 것을 넣어 멀리 던질 수 있는 호신용 무릿매였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돌을 하나를 주어 들었다. 갈라진 가죽끈 틈에 그 돌을 놓고 양쪽 손잡이를 잡아 빙글빙글 돌렸다.


붕! 붕! 무릿매는 탄력 있는 가죽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돌은 점점 넓게 돌아가며 순식간에 위협적인 무기로 변해 갔다. 힘차게 손을 뻗자 돌은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가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공주가 가지고 다니기에는 다소 거친 물건이군요."     


 휘 뒤에서 낭랑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옷을 입고 유모를 쓴 사내는 그녀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바위 위에서 뒷짐을 진 채 편안하게 서 있었다.   


"당신은....."


 휘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선인. 그를 넋 놓고 바라보는 그녀 앞에서 선인은 가슴까지 내려오는 유모를 천천히 벗었다. 휘의 눈동자가 어릿하게 흔들리며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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