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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12. 2020

#11 다시, 만나다

ㅡ  고루(固淚)에서 부는 바람

"오랜만입니다. 공주!"

   

 지성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소 실망감이 어려있었다.     


 "사타공을 따라오셨습니까?"

    

 지성의 머리가 살짝 기울어졌다.  

   

"공주께서는 내가 반갑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제가 반가워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휘는 다시 돌을 집어 들었다.     


"제가 도움이 될까 해서 함께 왔습니다."

"도움?"   


그의 말에 그녀는 멈칫했다.     


"낮에 군사들과 함께 오셨습니까?"

     

휘의 말투가 살짝 누그러졌다.   

  

"때 맞춰 와서 다행입니다."

     

지성의 말에 휘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서둘러 자신에게 숙이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어쩌면 내 비가 될 뻔했던 여인’     


"묵철은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니까요."

     

지성이 그녀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채찍을 앗았다.     

둘은 어느새 큰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자신의 물건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들렸는데도 그녀는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거친 물건은 여인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를 타일렀다. 휘는 자신의 선인이 눈앞의 사내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철의 채찍.

왜 그걸 여태 쥐고 놓지 않는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상기시키고 싶지 않은 이와 잊지 않고 싶은 이의 기억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물건이었다.


"그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으십니까?"

     

다시 지성이 물었다.     


"복수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휘는 부드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요.”    

 

지성은 묵철이 데리고 있던 인질들을 떠올렸다.   

  

“항상 그렇게 직접 사람들을 구하십니까?”    

 

그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다 하지만 역시 공주였고, 왕족이었다.  

   

“그들을 구해야만 제가 살 수 있습니다."

     

휘의 까만 눈동자는 눈앞의 황하를 따라 과거로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에 항상 품고 있는 질문,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무천과 그녀가 데리고 있는 군사는 겨우 오백, 그러나 그들에게는 묵철의 군사나 지금의 당나라 군사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절실함'이었다.


살아내야 한다는 의지와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 적과 싸우는 군사에게 절박함보다 더 큰 무기는 없었다. 무천은 그들의 수장이었고, 휘는 그들이 믿는 '힘'이었다.


자신과 임치 왕이 군사를 끌고 오지 않았어도, 그녀는 묵철과 지지 않는 싸움을 했을 것이다. 그제야 지성은 지금의 대방군왕이 그녀를 그토록 경계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곧 건안성이었고, 그녀의 존재는 그들의 절대적인 '구원의 힘'이었다.     


“낙양으로 가십니까?”     


지성이 은근히 물었다.


“그래야겠지요?”

“싫지 않으시오?”

“무엇이 말입니까?”

“정략적으로 혼약과 파혼을 물먹듯이 하는 곳에 볼모로 가는 것 말입니다.”    

 

지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로서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그것 또한 제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휘가 작게 웃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웃음소리.

어딘지 모르게 활짝 피어니지 못하는 애잔한 웃음이었다.

두 사람은 세차게 흘러가는 강줄기를 오래도록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리들 오시오!"     


영노는 명광현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가 펼쳐놓은 매대에는  대장간에서 만든 부엌에서 쓰는 식기류나 칼, 농기구 같은 잡다한 것들이 늘어져 있었다. 하나같이 정교하고 고급스러웠다.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자! 자! 줄을 서시오!"     


 갑가지 몰려든 수십의 인파를 정리를 하고 있었지만 영노의 눈은 아까부터 골목 어귀에 서 있는 한 남자에게 꽂혔다. 남자는 건장한 체구에 멀리서 봐도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영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푸른 단령포에 금장 허리띠, 그와 어울리지 않은 괴상한 고깔형 모자에는 화려한 금장식이 잔뜩 달려있었다. 보란 듯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그를 사람들은 연신 흘깃거리며 웃었다.   

       

 매대의 줄이 줄어들고, 대장간 앞에 사람들이 뜸해질 때까지 그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영노와 눈이 마주쳐도 눈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잘생긴 턱을 높이 추켜올렸다.  

   

 '또 어떤 미친 황족 나부랭인가!‘          


 이미 똑똑하고 성한 황족들은 모두 무주 때 여제가 다 죽이고 씨가 말랐다. 어디 남은 떨거지가 어슬렁거린다고 영노는 짐작했다. 실쭉한 표정의 영노와 달리 남자는 무엇이 신나는지 연신 싱글벙글하며 늙은 노부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호탕해 보이는 기개만큼이나 목소리도 우렁찼다.     


“아니! 대체.....!”     


영노는 크게 놀랐다. 이 괴상한 옷차람을 하고 있는 청년은 태항산에서 보았던 임치왕 이융기였다. 영노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공수했다.     


 “이 늙은이가 죽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 눈이 나빠 멀리 서 계시는 전하를 알아 뵙지도 못하고....”     


주절 대는 영노를 보며 이융기는 두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장주가 보자 하여 왔네!”

    

  이놈의 눈은 이제 늙어 쓸모가 없게 되었나. 이제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니 죽을 때가 된 거지, 영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말없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고, 이융기는 그 뒤를 두리번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명광현 안뜰은 겉으로 보는 것과 규모가 남달랐다. 망산과 연결된 산 끄트머리 깎아지를듯한 절벽에는 고풍스럽게 지어진 집과 회랑을 연결하는 <고루固淚>라 쓰여있는 정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타무의는 안에서 준비해 둔 차를 들고 고루로 향하고 있었다.     


"임치왕께서 예까지 어찌 오셨습니까? 부르시면 천한 노복이 찾아뵐 것을요?"

"명광현의 장주가 어디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입니까?"     


  고루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앞에 놓인 차를 홀짝일 뿐 말이 없었다. 사타무의는 차를 마시며 앞에 앉아 있는 요란한 복색의 임치왕을 찬찬히 훑었다. 전장에서 봤던 호방한 사내의 모습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어찌 나를 보자 하셨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싸늘하게 그의 머리를 쓸었다. 고고하게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모호한 미소가 걸렸다. 황족으로서 타고난 거만함은 특유의 유쾌한 표정으로 잘 포장하고 있었다.     


"임치왕께서는 어찌 이런 모습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허허, 먼저 보자 하였기에 이렇게 달려오지 않았나?"

     

 팔을 휘젓는 그의 모습이 바보스러울 정도였다.     


 "흑치 장군을 죽이셨습니까?"     


 사타무의는 조심스레 차를 내려놓으며, 그를 보지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라?"     


이융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자신이 파락호 같은 삶을 연기한다 했지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고작해야 상인 따위가 황족을 멸시하는 것은 이 자리에서 그를 베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중죄였다. 그런데 이 사내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뭐지? 이 기분 나빠야 하는데, 나쁘지 않은 이 기분은.     


'이 자는 대체 정체가 뭘까?'


"그럼 태평공주이십니까?"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이융기는 대답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다.     

"아무리 명광현이라 하지만 장주의 목은 하나가 아닌가 보구려."

"대답해주시지요. 황성의 짓인지, 융경방의 짓인지 저는 알아야겠습니다."

     

사타무의의 물음은 적에게 겨눈 칼끝처럼 집요했다.     


"내가 죽였다면 나를 죽일 셈인가?"

"설마 하니 제가 어찌 임치왕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찌할 텐가?"          


이융기의 검은 눈이  번뜩였다. 안광이 형형한 맹수의 본능 앞에서도 사타무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 있게 차를 따랐다.     


 "지금 이곳에 이리 요란스럽게 오신 이유를 제가 말씀해드릴까요?"

     

사타무의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융기는 의자 뒤 몸을 비스듬히 붙여 다리 하나를 느긋하게 의자 위에 올렸다. 한쪽 손은 턱을 괴고 다른 손은 탁자를 두드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첫째, 제가 직접 임치왕을 찾아갔다면 만나주셨겠습니까?"

"마치 내가 자네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것 같군."

"지금 낙양성에 태평공주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고모님 때문에 내가 자네를 만나지 않는다?"

"그렇지요."     


사타무의는 단정하듯 잘라 말했다. 추호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융경방은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측천무후가 물러난 후에도 태평공주의 입지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돌아섰다. 측천무후에게 핍박받던 황족들은 이제 태평궁의 눈치를 봐야 했다.     


"건안성에 그렇게 알맞은 때에 오신 것이 의아해서 말입니다, 태평공주께서도 알고 계시는지요?"    

      

 이융기는 바로 고쳐 앉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앞에 놓인 잔을 들었지만, 그의 목은 타들어가는 듯했다.     


"두 번째는?"

"황자님과 괵왕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

"함곡관과 건안성의 혼약을 추천하셨지요?"     


  사타무의는 환하게 웃었다. 마치 나는 당신의 생각을 다 읽고 있으니 어서 솔직하게 말을 해라는 무언의 미소였다. 이융기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 생각할수록 치밀하고 도전적인 사내였다. 거기다 신중하고, 질릴 정도록 조심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저 느른한 웃음 뒤에는 처절하게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생존본능이 숨어 있을 터였다.


 저 사내의 진짜 얼굴은 무엇인가 숨기고 있을 것이다. 마치 자신처럼.      

  

"나와 지성은 형제이자 친구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헌데 왜 그러셨습니까?”

"알아듣기 힘들군!"

"정확히 말하면 황성에서 계획을 하고, 임치왕께서는 묵인하셨지요!"

"그래서?"

"어째서 그리하셨습니까?"

"내가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해주셔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자네가 내게 이리 자신만만한 이유가 궁금하군!”         

  

 이융기가 맹수의 이빨을 드러냈다. 사타무의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 그는 타고난 기회주의자였다. 누가 시켜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인으로 백제인으로 살아야 했던 숙명이 준 후천적 본능이었다.     


"전하께서도 원하는 것이 있으니 이리 친히 오신 것이 아니십니까?"

"내가 원하면, 그대는 줄 수 있는 것이오?"     


   낙양은 온갖 물류와 상거래의 중심지였다. 서쪽의 함곡관과 동쪽의 대운하를 연결하는 낙수의 수로는 외부와 원활한 교통을 이루었고, 황성뿐 아니라 장안의 고관대작들까지도 상단과 내통하기 위한 본거지였다.

무주의 시대가 끝이 나고 수도가 장안으로 옮겨가도 낙양성의 화려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단 명광현은 좀 달랐다.  

   

  명광현은 유민들 중 기술자들이 모여 있는 막촌이었다. 그들의 삶은 오히려 나라를 갖고 있을 때보다는 부유하고 윤택한 삶을 누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자신의 기술을 내어 놓은 이들에게는 부와 명예를, 기술을 내놓지 않는 이들에게는 힘든 막노동뿐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 기술을 전수하지 않은 채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다. 그런 그들에게 마음 부칠 곳은 오직 하나였다. 건안성을 위해 마지막으로 신물을  만드는 것. 그것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사타무의는 이들이 안타까웠다. 나라가 무엇이기에. 고향을 떠나 이곳까지 떠밀려 온 삶은 그들에게 '구원'을 주었을까. 그러나 그들의 삶은 나라가 있으나 없으나 달라지지 않았다. 이용당하고 여전히 핍박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버리지 않았다.    

 

 오로지 忠!     


 건안성은 그들에게 아직 살아있는 백제이고, 위대한 부여였다. 무기를 만드는 독자적인 기술, 철과 금을 제련하고, 활을 다루는 것에서만큼은 아무리 서역과 교류를 통해 무기를 만든다 해도 당나라가 명광현을 따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어째서 이들은 그렇게까지 멸망한 나라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나라는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는데. 끝끝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는 것일까.     


"나도 묻고 싶군. 지난번 명광현은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했을까?"     


 이융기는 대장간 마을에서 쏘아 올렸던 명적을 콕 집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들은 드러내 놓고 일을 벌이지 않았다. 숨겨진 무엇이 더 있었다. 이융기는 그것이 궁금했다.       

"태평공주를 믿으십니까?"

"그날 만든 것은 진짜 무엇인가?"     


사타무의는 질문에 대한 답보다 끝끝내 태평공주를 물고 늘어졌다.     


"거사는 언제 치르는 것입니까?"

"이보게 장주!"     


 이융기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지금 감히 황족을 겁박하는 것이냐?”

“지금까지 명광현이 황성에 어떤 존재였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타무의의 낯빛이 진지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흑치 장군을 죽였다는 건가?”

"측천무후가 상양궁으로 물러나셨으니, 관계된 세력을 제거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함부로 넘겨짚지 말게!”     


이융기는 자신이 쓴 모자를 벗었다. 모자 하나에 사람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우스꽝스럽고 방탕해 보였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조각같이 깎아 놓은 얼굴은 예리하게 빛나는 눈을 반쯤 내려 앞에 앉은 사타무의를 쏘아보았다.       

 

 나라를 막론하고, 모든 황족이나 귀족들에게는 그들만의 특유 냄새가 있었다. 텁텁하게 기름진 향유 냄새와 여인들의 분 냄새가 어우러져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겨댔다. 그것은 타락의 냄새요, 멸망의 냄새였다. 당나라 곳곳에서 악취가 났다. 사타무의는 알 수 있었다. 당나라는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 무측천이 죽자 사타무의는 희망을 품었다. 당이 멸하면 건안성의 모든 유민을 데리고 발해로 돌아갈 꿈을 꾸었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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