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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14. 2020

#12 끊어진 연(連)

ㅡ 다시 청혼 ㅡ

그런데.  


그런 그의 꿈이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붉은 깃발 아래 유유히 묵철과 무천 사이에 있던 사내, 마치 태양을 누르고 올라선듯한 당당함은 상대를 한 번에 제압하고도 남을 만큼 강력했다.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자신의 앞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저 사내는 간교한 여황제보다 더 무서운 황제가 될 것이었다.     


 "나라면 흑치 장군을 죽이지 않지. 나라면……."     


 그렇다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흑치 장군이 사라져서 이득을 볼 인물, 남은 건 두 사람밖에 없었다.      


장안의 함원전이거나 낙양의 태평궁.  

하나 더해본다면 건안성까지?

사타무의의 입술이 쓰게 비틀렸다.


장안에 있는 황제는 무능했고, 위후는 권력에 눈이 먼 여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평민처럼 살아왔기에 황궁을 몰랐다.


그러나 태평궁은 달랐다. 그녀는. 무후가 가장 아끼는 공주였으며, 지금 황제의 친 누이였다. 무후의 세력도, 현재의 조정에서도 그녀의 위치는 변할 것이 없었다.

     

 "그나저나 내가 이곳을 찾아오게끔 도박을 거셨으니 이제 그 감당을 해야 할 터"

     

 이융기의 비웃음에 사타무의는 태연하게 찻잎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저녁에 태평관에서 보름 후에 있을 연회 초청장이 왔습니다."

     

 이융기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그 여우 같은 공주가 자신보다 먼저 움직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낙양 땅에 태평궁의 눈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좀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임치왕의 낯빛이 변해가자 안색을 살피던 사타무의는 실소를 터트렸다.   

  

 "아무래도 태평궁은 저보다 융경방의 행적을 더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이융기의 얼굴색이 다시 밝아졌다.     


“고맙소! 역시 그대는 내 편이었군. 알려주어 고맙소이다.”  

   

이융기의 비꼬는 말에 사타무의가 실소했다.    

 

“역시나. 전하는 남다르십니다.”     


사타무의는 건안성에서 보았던 지성을 떠올렸다. 하얀 유모를 쓰고 늘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사내. 그는 이융기에게 어떤 사람일까.     


“허나 의문이 아직 남습니다.”     


사타무의의 말에 이융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융기는 알아차렸다. 바로 괵왕 '지성'의 존재.     


“하얀 공자는 어째서 태평궁에서는 그냥 놔두는 걸까요?"     


재밌는 조합이었다. 하나는 태평공주가 일거수 하나하나 감시하는 자, 하나는 무엇을 해도 그냥 묵인해 주는 자. 하나는 혼인을 성사시키고, 다른 하나는 파혼을 시켰다. 이지성. 그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자. 그가 궁금했다.     



 

낙양의 저녁은 대낮보다 밝은 호중천(壺中天). 황궁을 가로지르는 물빛은 오색찬란한 색으로 줄기를 이루며 흘러갔다, 여기저기 떠 있는 놀잇배에서는 아름다운 여인과 달을 노래하는 소리들로 낙수의 밤은 저물지 않고 있었다.         

 

태평궁 별궁 안에 마련된 연회장에서는 무희들의 춤과 악공들의 갈고 연주 소리가 한창이었다. 연회를 즐기는 헐벗은 여인들의 짙은 사향 냄새, 삼채가 화려하게 물들여진 접시에는 보기에도 어지러운 음식들이 가득 차려졌다.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휘의 주변에만 다른 공기가 흐르는 듯 이질적이었다.     

연회에 참여하는 일이 뭐 대수라고 말했던 오만한 제 생각을 탓해야 했다.     


화려한 삼채三彩에 담긴 술잔 너머로 지성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보란 듯이 술잔 옆에 놓인 뿔각지와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저러는 이유는 뭔지. 태항산에서 보았던 남자와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지성은 이 화려한 연회장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모든 여인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무감해 보였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부여 휘,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건안성의 공주께서는 이 자리가 편치 않은가 봅니다!"     


한참 동안 그녀를 살피던 태평공주가 말문을 열었다.    


건안성의 공주.      

엄연히 백제라는 이름이 아직 살아 있었다. 전 대방군왕의 딸이었으며, 의자왕의 적손이었다. 불편한 마음이 목구멍까지 치받쳐 올랐지만, 휘는 내색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이런 연회 자리에 익숙하지 않아 그러하오니 신경 쓰지 마옵소서.”     

"앞으로는 익숙해지셔야지요. 내 많이 가르쳐드리리다.”   

       

뭘 배운다는 말인가. 방탕하고 향락적인 저들에게.

여기저기서 노골적인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뜯어보는 태평의 시선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빈약한 옷차림, 목부터 허리까지 꽁꽁 감싼 단색의 저고리와 붉은색과 초록색이 겹겹이 들어간 주름치마는 단순하면서 단아해 보였다.


 그와 달리 연회장의 여인들은 가슴을 반이나 드러내고, 그 위에 금빛 난대와 하얀 백분 가루를 뒤집어쓴 듯 보였다. 그 안에서 휘는 유난히 돋보였다.     


태평은 지그시 지성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래! 요즘 어찌 지내느냐? 함곡관에는 별일 없겠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지성에게 눈길을 돌렸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묻는 태평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는 대답했다. 그때,     


“왜 함곡관에 별일이 없습니까? 괵왕전하의 혼약이 깨어졌다지요?”    

 

지성의 옆에 있던 어떤 눈치 없는 여인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지성의 낯빛이 굳었다.    

       

“아! 그 부여 씨라 했던가?”     


여인은 어깨에 두른 나피삼으로 얼굴을 한껏 가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지척에서 들리는 소리에 불쾌감으로 휘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태평공주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연회에 초대된 이유를 깨달았다. 여인들은 휘를 향해 자기들끼리 속삭이며 까르르 웃어댔다.     


  지성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휘는 자신의 뿔각지를 꼭 쥐고 있는 그의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녀의 마음에 한차례가 회오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함곡관과 명광현이 손을 잡는 것을 제일 꺼리지요!’     


사타무의가 했던 말이 휘파람처럼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휘는 가늘게 웃으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황족 이지성. 사타무의의 하얀 공자. 그가 결국 자신의 약혼 상대였다.


"연회가 혼사를 논하는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뜻밖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임치왕 이 융기였다. 짙은 눈썹과 가까이 한 깊고 검은 눈동자. 보기 좋게 각진 얼굴, 한눈에 봐도 호방하고 재기(才器)가 넘치는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그는 누구를 찾는지 연신 두리번거리며 옆에 앉은 기녀들이 따라주는 술을 연거푸 입으로 가져갔다.  

        

“혼사를 논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혼기가 찬 보석을 이리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내 곧 폐하를 뵙고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태평공주가 차갑고 건조하게 그의 말에 대답했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 기류가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휘는 찻잔에서 입술을 떼지 않고 슬며시 미소지었다.       

   

"공주마마께서 하찮은 변방의 왕족을 신경 써주셔서 감읍하옵니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에 파혼을 당한지라 지금 당장 혼인은 생각하기 어렵나이다."    

 

내내 곧은 자세로 입을 열지 않던 휘의 목소리가 연회장 안으로 낭랑하게 퍼졌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휘는 힐끗 지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내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오! 하찮은 왕족이라니요! 비록 멸망하였다 하나 대백제의 찬란한 지난날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카랑카랑한 태평공주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노골적인 비웃음.

그때, 밖이 술렁였다.   


"명광현의 장주, 태평공주께 인사 올립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쏠렸다.    

훤칠하고 잘생긴 사내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금으로 세공된 화려한 금장식의 귀걸이. 한쪽뿐이었지만 사타무의와 묘하게 어울렸다.     


 그 모습을 본 임치왕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태평공주는 뜻밖에 나타난 사내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원래 주인공은 제일 늦게 나타나는 법이지요!”         

 

테평공주는 휘에게 퍼부었던 날카로움은 간데없이 봄날의 처녀처럼 나긋하게 물었다.    

 

"소신 명광현의 장주, 사타무의라고 합니다!"


 사타무의는 재빨리 공주 앞에 무릎을 꿇은 후, 한껏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를 들어 태평공주를 올려보았다. 명광현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이 술렁였다. 태평공주가 반색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용피선을 가린 그녀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걸렸다.    

      

아무도 명광현의 장주가 이렇게 젊은 사내일 거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그들이 아는 한 명광현의 장주는 키가 작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노인이라 했는데.         


지금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자는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홍안의 사내였다. 게다가 화려한 귀걸이와 남다른 복색, 태평공주는 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명광현의 장주께서 이리 젊은 미남자인 줄 몰랐구려!”          


절대로 앞에 나서지 않으니 낙양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자도 심지어 이름도 알지 못했다. 그런 그가 태평궁에 얼굴을 드러냈다. 태평공주의 손짓에 무희들과 악사들이 들어왔다. 자리는 다시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그녀는 사타무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휘에게 물었다.    


“이리 훌륭한 분들을 한자리에 모여주시니 무한한 광영이 대당에 비칠것이요!”    


태평궁의 높은 천장까지 그녀의 목소리가 장중하게 울렸다.

다들 저마다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쏠렸다.


“얼마 전 돌궐군과 있었던 작은 다툼에 대해 들었습니다.”


마치 사람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는 장군의 기개마저 느껴졌다.    

 

“땅이 흔들리고, 하늘에 불새가 날았다지요?”     


태평공주는 휘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이리 훌륭한 여인을 알게 되어 매우 흡족합니다. 공주께서 앞으로 이 태평을 위한 불새가 되어 주세요!”   

  

 그녀의 찬 미소에 휘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불새라니요. 과찬이십니다!”

“백제의 신궁을 이리 가까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태평의 입술이 환희에 찬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그녀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신궁이라!’     

중얼거리듯 이융기가 읊조렸다.     


 신궁이니, 명궁이니 하는 것들은 어차피 다 쓸데없는 말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옛날의 영화요, 부귀이니. 그것을 취하기 위해 스스로 지어낸 낸 이야기들이라 폄하했다.   


 확실히 그도 자신의 눈을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일이었다. 가냘픈 여인이 자신의 키만 한 활을 들고 온몸으로 시위를 당기는 모습은 마치 호선무를 추는 무희를 보는 그것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 얼마나 슬픈가. 이융기는 개탄했다. 버젓이 나라가 있었다면 여왕의 자리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건안성의 공주께 청혼을 하고 싶습니다.!”    


 지성의 한 마디에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끊겼다. 심지어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미 혈색이 사라진 태평공주의 눈은 재빨리 지성에게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과 무관한 것처럼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성은 내내 탁자 위에 놓았던 휘의 뿔각지를 다시 품에 넣었다.


“괵왕 이지성, 백제의 공주께 정식으로 혼인을 청하겠습니다.”      

    

 한 번의 혼약이 깨어진 사이. 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떤 마음으로, 혹은 무엇 때문에. 그녀는 지성의 갑작스러운 발언으로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그림처럼 앉아 있는 휘를 향해 아름답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농이 지나치구나.”     


태평공주는 지성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함부로 농을 할 위인은 아니지요!”   

  

이융기는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연신 벙글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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