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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14. 2020

#13 배신의 늪

- 연회 ㅡ

애초 지성과 건안성 공주의 혼인을 반대한 이는 태평공주였다. 함곡관이 명광현과 합쳐진다면 그것은 임치왕에게 양쪽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니. 어떻게든 이 혼약을 깨뜨리기 위해 황제를 설득해야 했다.    

 

“네가 그 혼사를 원하는 줄은 몰랐구나!”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여기서 추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공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자신을 곱지 않게 보는 여인. 태평공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앞에 나아가 허리를 숙였다.     


“왕가의 혼인은 왕실에서 알아서 할 일, 소신은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휘는 어서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처음부터 말을 들어야 했다. 연회는 왜 나왔는지. 맞지 않는 자리, 맞지 않는 음식, 맞지 않는 사람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조롱 거리가 될 거였으면 애초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음식이 맞지 않으십니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있는데 누군가 물병을 그녀 앞으로 들이밀었다.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그 안의 물을 모두 비워냈다.     


"누구신지 모르오나 정말 감사……."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그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공주를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지성은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수건을 받아 든 그녀는 축축이 젖은 입가를 닦아냈다.   

  

"아닙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그런 것일 뿐입니다."

"모두 미안합니다!"

     

 돌아서는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맑게 흔들렸다. 자신을 향한 연정이 담긴 눈빛.


 그녀는 언니 보혜를 떠올렸다. 연정을 받은 보혜의 얼굴은 하얗게 핀 달꽃처럼 화사했다. 사내의 연정을 받으면 여인은 저리 변하는 것일까.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럴 수 있을까.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연정보다 건안성의 안위였다.


휘는 몸에 오한을 느꼈다. 등지고 걸어가는 지성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건안성에서 자신을 구했던 선인,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냥 잠깐 꿈을 꾼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사념을 털어내려 애를 썼다. 애써 몸을 일으킨 그녀는 길 잃은 아이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궁 안의 내부는 모두 비슷한 생김새였다. 출구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위험이 도사리는 미궁에 빠져버린 것처럼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는 길이나 제대로 물어볼 것을.’     


그녀는 점점 미로처럼 생긴 전각 안쪽을 헤매다 작고 고즈넉한 회랑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 안에서는 달뜬 남녀의 신음이 들렸다.


 시비조차 보이지 않는 은밀한 만남!


모른 척 돌아서야 했지만, 그녀의 머리에서 중요한 경고음이 들려왔다.  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어째서 이제야 나타난 것이냐!”


사내의 거친 숨소리 너머로 교태 섞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뜻밖에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태평공주였다.     

“공주마마의 수많은 정인에게 칼을 맞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사내의 말에 태평공주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짖궂고 유쾌한 목소리. 돌아서는 휘의 발이 충격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몸짓과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돌아서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그녀의 몸이 마음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사내는 바로 조금 전 태평공주의 발아래 머리를 숙였던 사타무의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보명 공주는 네게 어떤 존재더냐?”     


콧소리가 가득한 태평공주의 음성이 들렸다.   

  

“백제 왕실은 건안성에나 중요하지, 제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호호호 그래! 허나 오늘은 얼마나 놀랬는지 아느냐! 감쪽같이 나를 속이다니! 오늘 그 벌을 톡톡히 받아 낼 것이다!”


 휘의 몸이 휘청였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녀의 머릿속은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요란하게 경종을 울려댔다.


조심스럽게 발을 돌리다 저도 모르게 손에서 빈 물병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쨍그랑!     


“누구냐!”     


 어디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전각을 울렸다. 그녀는 잽싸게 몸을 돌려 지붕 위로 훌쩍 날아올랐다.


누군가 그녀를 향해 암수를 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채 닫기도 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내 그녀 또한 자신의 치맛자락에 발을 헛디뎌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녀가 닿은 곳은 차가운 땅이 아닌 따뜻한 사람의 품이었다.

     

‘쉿’     


그녀의 입술을 막는 가늘고 긴 손가락, 익숙한 잔향. 아까 지성에게 받은 손수건의 냄새와 같은 내음이 품에서 흘러나왔다. 지성은 그녀를 안고 그대로 미로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어느 것이 진짜고 그의 모습인가?     


석성산 전투에서 함께 했던 사타무의를 떠올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무천과 영노, 다른 식구들의 모습을 하나씩 스쳐 지났다.


쓰디쓴 배신. 배신은 왕실에서도 여기에서도 발에 채는 돌만큼 흔한 일이거늘, 매번 잊어버리고 만다. 휘는 내내 망치로 세게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시원한 대숲 향이 짙게 묻어 나오는 곳, 그녀는 다시 명광현의 아름다운 골짜기. 대장간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이곳을 통해서 나가는 것이 수월할 것이오.”     


안전하다는 지성의 말에도 휘는 얼어붙은 것처럼 자리에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지금 제가 본 것을 공자께서도 아시고 계셨습니까?”     


마른침을 삼켜가며 간신히 그에게 물었다.     


“…….”     


지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동안 사타무의, 그가 보여주었던 의기는 다 무엇이었을까. 흑치 장군, 건안성. 태평공주. 대방군….     


헛! 그녀는 더운 숨을 훅 내뱉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이 서늘함. 그녀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공자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     


지성은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이 황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가 모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도 사타무의와 태평공주의 일은 충격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흑치 장군의 죽음부터, 아니면 훨씬 그 이전부터.


휘는 계속해서 걸었다. 멍하니 자신을 보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밝고 명료해지고 있었다.  얼마 후, 장안에서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태평궁과 황제의 명으로 황족 이지성은 과부였던 위후의 여동생과 혼인을 했다. 그들의 나이 차이 열다섯, 낙양의 모든 이들이 뒤에서 비웃고 경멸했다.


낙양 최고의 사내의 명성은 땅으로 떨어졌고, 그를 사랑했던 민심은 한순간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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