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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17. 2020

#14 백목당 왕비마마

ㅡ 초야 없는 혼인 ㅡ

당 경룡 4년(710년)

위황후가 안락 공주와 함께 황제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락 공주와 반목하던 태평공주는 임치왕과 함께 한밤중에 대명궁을 치고, 위 씨 일가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름하여 당륭정변!      

이로 인해 황제를 죽이고 여제를 꿈꿨던 위 씨 천하는 보름 만에 끝이 났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임치왕 이융기는 그 공을 인정받아 평왕에 봉해졌다. 모든 이들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혼장은 언제든지 써 줄 수 있소. 그대가 원한다면…….”     


  풀어헤쳐진 머리와 벌어진 앞섶에서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회랑 복도에서 마주친 그는 여인들의 백분향이 뒤섞여 어지러울 만큼 진한 색에 절어 있었다.     


올려다보는 것조차 부끄러울 만큼 아름답고 청초한 사내는 사라지고 핏빛으로 충혈된 갈색 눈동자는 불 꺼진 암흑처럼 어둡고, 흐렸다.    

 

“이혼은 불가합니다.”     


 지성의 취한 발걸음이 멈췄다.     


 “그대 뜻대로!”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는 느릿느릿 다시 움직였다. 휘 머릿속에는 그가 처음 남겼던 청아하고 맑은 향기를 기억해내려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기억하는 지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 존재, 그러나 그는 이미 휘의 존재조차 잊은 듯했다.


연회 사건 이후 갑자기 지성의 혼인 소식이 들려왔다. 무천과 영노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녀의 삶 속에서 이 지성이라는 사내를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던 시간, 다시 돌려받지 못한 뿔각지가 끊임없이 그와 연결된 끈처럼 그녀를 쫓아다녔다.          


 낙양의 모든 이들이 사랑하고 경외하던 아름다운 사내는 늙은 과부와 혼인으로 민심을 잃었다. 그리고 아내를 죽여 목숨을 건진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이가 되어 하루아침에 그 명성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비가 아내를 죽여 아들을 살리니, 그 아들도 아내를 죽여 목숨을 부지하는구나.     

낙양에 지성에 대한 흉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왕이 된 이융기는 휘를 직접 찾아왔다.     


“지성을 살펴주시오. 원래 그대 자리가 아니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으나, 눈빛은 간절했다. 

모두가 그녀와 지성의 혼사를 반대했다. 

이제는 볼모로 살고 있는 공주가 그런 희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와서 뻔뻔하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저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특히 사타무의는 그녀의 혼인은 적극적으로 말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휘는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황족의 혼사에 찬반의 의견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휘는 그의 말에 냉정한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황족의 혼인은 황제가 정하는 법, 누가 봐도 이 혼사에 이융기의 힘이 작용한 것은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 황상은 태평공주의 꼭두각시가 아닙니까?”

“꼭두각시라 해도 황명입니다.”

“왜 그리 돌아가려 하십니까?”     


그녀를 보는 사타무의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휘는 애써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태평공주께…….”

“이것 또한 나의 선택입니다.”     


휘는 사타무의 말을 잘랐다. 의무도 책임도 아닌 오롯이 그녀의 선택. 그리고 그의 입에서 태평공주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이 듣기 싫었다.  

    

‘그대도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소?’     


그녀는 사타무의에게 내뱉지 못한 물음을 삼켰다.           

      

 



 

낙양의 괵왕부.

북망산을 보고 자리한 황성에서 정확히 남서쪽에 자리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황성을 가로지르는 낙수의 줄기가 괵왕부의 후미진 곳까지 흘러들어 그 풍광이 매우 수려했다.      


그중 왕부 내 가장 후미진 곳, 백목당은 회랑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단청의 지붕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둥과 바닥은 넓은 연못을 끼고 이어졌고, 연꽃과 백단 나무가 가득한 정원에는 색색의 모란과 작약이 가득 피어 그 향기가 담을 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백목당은 별채로서 왕부에 드나드는 손님들이 머무는 곳이었지 왕비가 머물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침에 눈을 떠도, 주변에 시중드는 시녀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빈 물 주전자와 하얀 도자기로 만든 찻잔뿐이었다.     


 빈 주전자를 들고 어선방에 들어왔을 때는 누구를 위한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왜 백목당으로는 음식을 들이라는 말이 없는 거야?”     


어선방의 시비들의 화제는 백목당 왕비마마였다. 거기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그들의 주인은 왕비를 찾는지 찾지 않는지는 그들의 큰 관심사였다.      


“그야 난들 알겠어? 우리는 그저 윗전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이상하잖아. 어차피 왕비 마마가 되실 분인데. 왜 백목당에 머물게 하시는지.”

“화영 낭자가 먼저 측비가 될 거라는 말도 들리던데.”

“하긴 나라도 왕비 궁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을 거야?”

“왜?”     


 음식을 하는 시비들의 소곤거림이 휘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숭국부인 귀신이 붙어서 아무도 얼씬을 안 한다는데?”     


 문 앞에서 멀거니 그들의 하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뒤에서 여관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천박하게 음식을 하면서 입을 놀리는 게야! 너희가 진정 치도곤을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여관의 찬 소리에 시비들은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마마! 즉시 백목당의 식사는 어찌할지 물어보고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여관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휘에게 공수했다. 빈 주전자를 들고 있는 그녀를 보고 주방의 모든 시비들이 바닥에 엎드렸다.      


“되었소! 나는 이곳 음식은 너무 기름져 입맛에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휘는 찻물을 데우며, 스스로 조촐하게 다과상을 차려냈다. 그녀를 보는 시비들과 여관은 난색을 표했다. 이 일이 왕부에 들어갔을 때 자신들의 처지를 걱정해야 했다.     


 아무리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 하지만 명색이 왕비였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자, 시녀들은 그녀를 돕지도 못하고 멀뚱거렸다.


그들의 시선은 뒤로하고 휘는 작은 다과상을 들고 백목당으로 돌아와 정원을 감상하며 차를 마실 때쯤  무진이 시녀 둘을 데리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송구합니다. 마마! 대접이 소홀하였나이다. 하지만 왕부의 법도이니 이해하소서!”     


픽! 휘의 입에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초야를 치르지 않으면 밥도 주지 않는 것이 이곳의 예법이군요?”     


무진은 납작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은 소인의 불찰입니다. 화영낭자께서 처소에 손님을 들이셔서 …….”     


아차! 싶은 얼굴로 무진은 입술을 말았다.     


 “나는 언제든 나갈 사람이라는 소리입니까?”    

 

연잎이 들어 있는 잔에 휘는 더운 찻물을 따랐다. 쪼르르 찻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침에 문틈으로 넘어 들어오는 치자꽃 향기와 어울려 방안은 금세 기품 있는 색으로 가득 담겼다.    

무진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나가시다니요! 다만 왕비마마가 기거하기에 백목당은 충분치 아니하여...”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그녀의 음성이 떨렸다. 휘는 문득 무진의 얼굴이 궁금했다.     


“괜찮습니다. 뜻대로 하라는 말씀이 있었으니 저는 이곳을 나가지 않을 작정입니다.”     


휘는 찻주전자를 들어 무진에게 차를 따르며 미소 지었다.

    

“그러셔야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끝끝내 얼굴을 들지 않은 무진은 서둘러 말을 마친 후 하녀들을 불렀다.     


 “홍비와 찬비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왕부에 오래 있었던 이들이니 여기 두고 부리시지요. 그리고 오찬부터는 소인이 신경 쓸 것이오니 주방으로 발걸음을 하지 마시옵소서!”     


무진은 편안하게 앉지도 못한 상태에서 휘에게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유모께서는 이리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초야가 없는 왕비는 빈 껍데기가 아닙니까?”     


무진의 폐부를 깊이 찌르는 말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핀잔을 주는 말이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불쌍한 여인은 자신 하나뿐이어야 했다. 그녀에게는 이지성이라는 사내에게 안쓰러워 보여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차라리 오만한 숭국부인이나 철없는 화영은 그녀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건안성의 공주는 활과 칼을 잡는 여인이라 했다. 그러니 성품은 거칠고, 제멋대로 일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무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휘는 달랐다.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고 침착하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 줄 알았다. 어차피 초야 없는 혼인이라 가볍게 봤던 것이 실수였다.  거기다 왕족으로서 태생적인 기품마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휘의 속사정은 달랐다. 이유야 어쨌든 제가 데리고 있던 시녀마저 거절당했다. 잇달아 일어난 정변으로 왕부의 경계는 삼엄했기에, 새 황제가 등극한 시기에 급하게 치러진 혼사로 왕부는 공주의 입궁만을 허락했다.     


이제 와 보니 이곳은 애초에 휘 본인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백목당의 여름은 온갖 꽃의 향기들로 가득했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답답했다. 백마사에라도 들려 공양이라도 올릴 핑계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거절을 당했다. 


'그것은 소인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돌아오는 무진의 대답은 냉정했다. 

유난히도 붉은 노을이 펼쳐진 하늘을 보니 그녀의 마음은 벌써 왕궁 담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오는 건, 한 숨뿐이었다. 


“여기 이러고 계시면 어찌하십니까? 어서 준비하십시오.”

“무슨 준비?”     


두 시비 중 나이가 있어 보이는 시비가 그녀를 재촉했다.     


“아직 단장을 아니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도 충분하네.”


휘는 자신의 입은 옷을 요리조리 살피며 말했다.

     

“아닙니다. 당장 오늘이라도 초야를 치르 실지 어찌 압니까?”     


시비의 입에서 나온 초야라는 말에 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놈의 초야! 왠지 이 집을 스스로 나가겠다 선언하거나, 아니면 지성이 제 발로 오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들을 것 같은 소리였다.     


“저희는 공주마마 초야를 돕기 위해 온 시비인, 찬비와 홍비라 합니다. 

꼭 성사시킬 것이오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무슨 전장에 나가는 장수들처럼 그녀들의 눈빛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찬비라 불리던 시녀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는 휘의 옷을 강제로 벗겨냈다. 찬비는 헐벗은 휘의 몸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리 마르셨으니, 전하께서 눈길을 아니 주시는 겁니다.”     


찬비의 말이 끝나자 홍비도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내일부터는 무조건 기름진 음식을 드십시오! 여인은 무조건 토실토실하니 살이 올라야 피부도 좋아지는 법입니다! 세상에 여인의 손이 이리 거칠어서야 원!”     


양쪽에서 혀를 차는 시비들의 소리를 듣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치 흑치부에 있는 것처럼 마음 한 구석에서 따스함이 밀려왔다.     


“낙양의 여인들은 무조건 아침에 일어나면 몸단장을 제일 먼저 해야 합니다. 분도 바르시고, 연지도 바르시고, 눈썹도 그려야 하고, 요 예쁜 미간에 꽃 모양 장식도 붙이시고, 액황을 덮고 장엽도 찍고, 사홍을 구부리고, 입술연지도 바르셔야지요! 할 일이 태산입니다.”     


찬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비는 허리춤에서 긴 가죽 주머니를 능숙하게 그녀 앞에 펼쳐 보였다. 화장을 하기 위한 갖가지 도구들,


 붓의 종류만 해도 십여 가지가 넘어 보였다. 휘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물론 그대로도 아름다우시지만, 무릇 여인이 꾸미는 것은 자신을 아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괵왕 전하야 워낙 미모가 출중하신 분이시니 왕비마마까지 아름다우실 필요는 없, 윽”    

 

찬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홍비는 찬비 옆구리를 세차게 꼬집었다.    

 

“송구합니다. 왕비마마! 노비가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둘은 연신 굽신거리며 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휘는 괜스레 웃음이 났다. 정신없고,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나는 괜찮으니 계속하시게.”     


 화내지 않는 윗전의 모습에 찬비는 재빨리 일어나 휘 옆에 앉았다. 홍비는 수십 기지의 꽃문양과 눈썹 모양, 머리 모양을 일일이 휘의 얼굴에 대보며 즐거워했다.     


 “저희만 믿으십시오! 이 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 드릴 터이니!”

 “전하께서 내가 초야를 왜 빼먹었을까 한탄하게 만들 것입니다.”     


까르르 그녀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통에 지붕 위에서 누군가 그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휘는 까맣게 모르고 즐겁게 웃고 있었다.

    

"후! “     


지성은 괴로운 한숨을 토해냈다. 평소 습관대로 노을을 보기 위해 올라온 곳이건만 뜻밖의 장면을 보자마자 지성은 서둘러 망루로 돌아왔다.     


꿈에서나 그리던 여인이었다. 그녀를 생각하며 정원 망루에 올라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것은 언제부턴가 생긴 그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그녀가 있다.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근심 없이 웃는 얼굴은 그가 내내 꿈꿔왔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이혼장을 써주겠다 말을 하기 위해 하룻밤을 꼬박 술을 마셔댔다. 그냥 그녀를 취하고 눌러 앉혀도 말없이 따를 사람인 것을 잘 알기에 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처럼 시궁창에 더럽혀지는 것은 생각조차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오로지 휘에 대한 그의 마음은 거둬내고 그녀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았다.    

  

“이혼은 불가합니다!”     


 그녀의 확신에 찬 대답에 그는 처음으로 마음 깊이 벅찬 세상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시면, 아무리 사내라 해도 안아주고 싶어 지니 말입니다."


어느새 망루에는 괴상한 차림을 한 사내가 기둥에 선 채, 삐딱하게 지성을 응시했다. 그의 고갯짓에 따라 한쪽에만 있는 금빛 귀걸이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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