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가는 물고기 Sep 23. 2020

#15 망루

ㅡ  태평공주와 곽무진

“그대가 여가는 어쩐 일인가?”     


지성은 대담하게 왕부의 담을 넘어온 사내에게 물었다.     


"아니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반응이 영 실망스럽습니다. 전하!"

"그럼 왕부 무단침입 죄로 여기서 죽여줄까?"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느른한 목소리였다.    

 

“이크! 그리 고운 입으로 험악한 말씀을 하시고 그러십니까?”     


정말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사타무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원하시는 것을 얻은 전하께서 어찌 표정이 나라를 잃은 표정을 짓고 계시냐 말입니다.”     


이내 웃음기를 지운 사타무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하는 것이라! 흥! 진심으로 하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는군.”

“진심이 아니라니요. 어찌 전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하하하! 명광현의 장주가 진심이라? 지나가는 똥개가 웃겠군.”     


지성은 조소가 가득 담긴 비웃음을 사타무의에게 일갈했다.     


“과찬의 말씀을.”

“그래서 나를 위해 그날 나를 명광현으로 불렀느냐?”

“우연입니다.”

“웃기는 소리!”     


지성은 다시 술병에 입을 가져다 댔다.     

 

“어쨌든 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나를 위해서라고?”     


그의 갈색 눈동자에 다시 핏빛 분노가 어렸다.   

   

“다시 말하지만, 공주마마의 혼인은 제 뜻이 아니라 황실과 임치왕께서, 아니지. 이젠 태자 전하가 되실 그분의 뜻이지 않습니까?”

“나는 네가 태평공주와 평왕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을 알고 있어. 거기에 공주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더냐?”

“크하하하!”     


사타무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제가 이용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 않겠습니까?”     


웃음 뒤에 그의 표정은 이전에 보았던 선한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저는 다리만 놓았을 뿐 선택은 두 분이 하신 것입니다.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는 것, 황족의 혼인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건안성의 공주는 특별하지 않은가?”     


지성의 하얀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감돌았다. 거기에 붉은 입술이 더해져 지옥에서 올라온 아름다운 야차의 얼굴이 되었다.     


“풋! 명광현이 건안성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

“그것은 그들의 일, 저와는 무관하지요!”

“그대들은 한 민족이 아니던가?”

“나라나 민족 따위 그것은 다 지배자들이 만들어 놓은 장기판 같은 것이지요. 저는 위정자들을 믿지 않습니다. 고구려니 백제니 신라, 그런 것들이 저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상인은 그저 돈을 따라다니면 그뿐, 나라는 돈을 벌기 위해 건너는 다리나 같은 것이지, 그 이상은 될 수 없습니다.”     


사타무의의 말을 듣고 있던 지성은 이미 어두워진 낙수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렇군.”     


차가운 미소가 지성의 얼굴을 스쳤다.      


“그래! 그래서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냐?”     


망루를 밝게 비추는 달을 사이에 두고 불꽃이 번쩍였다. 검은 달무리가 몰려들고 있었다.      


“제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평왕 전하의 비밀 만기군대장을 만나기 위해섭니다.”


만기군. 이융기가 대명궁을 한 번에 칠 수 있었던 것은 만기군의 도움이 가장 컸다. 그들이 알아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그 만기군을 이끌었던 이가 바로 이지성이었다.


“내가 만약 태평공주에게 간다면 어찌할 것이냐?”

“소인은 전하께서 평왕을 놓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활한 놈!”     


지성의 관자놀이가 푸르르 떨렸다. 애초부터 이 자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다. 내가 이 자를 찾은 것이 아니라 이자가 나를 찾았었는지도.     

 

“평왕께는 자신을 어찌 믿게 하실 건가?”

“건안성의 공주가 사괵왕부에 있는데, 설마 저를 내치시겠습니까?”

“공주는 돌아갈 것이다.”

“그리되면 안 될 것입니다.”

“어째서?”

“어째서 공주를 건안성의 보석이라 불리는지 아십니까?”

“!”     


지성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사타무의는 자신이 공주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지성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지금의 조정에서 골치를 썩이고 있는 곳이 돌궐인 것은 전하께서도 아시는 일이시지 않습니까?”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지성의 얼굴에서 사타무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태평공주께서  황제 폐하에게 화친의 의미로 건안성의 공주를 돌궐 가한에게 보내라 그리 주청을 드리셨답니다.”     


지성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의 황제가 태평공주에게 의지하고 있는 형국이니, 천하가 태평공주의 손에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요동의 방패였던 흑치 장군이 아니 계시니, 그다음, 이용할 가치가 있는 것이 공주가 아니겠습니까?”     


원래 상인의 입은 머리와 가슴이 달랐다. 그러니 그의 진심은 그의 머리에 있을까, 가슴에 있을까. 작은 땅덩어리 안에서 죽도록 싸워도 그들은 이 대당에서는 하나였다. 고구려인이든 백제인이든 신라인이든.     


“평왕전하께서는 막아 주실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믿지?”

“평왕전하의 뜻이 아니었으면, 공주께서 어떻게 이렇듯 빨리 왕부로 들어오셨겠습니까?”

“후후!”     


지성은 실소했다. 미안함이라든가. 고마움이라던가. 그 모든 감정도 양손에 들어 이용가치를 재며 살아가는 곳이 황실이었다. 이융기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내였다.


“이러고도 전하께서 평왕전하와 척을 질 수 있겠습니까?”     


지성은 눈을 감았다. 태자 책봉. 지금의 황제 이단은 무능력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황제였다. 그러니 무후의 손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당륭정변때도 아무것도 모른 채 황위를 물려받아, 지금껏 누이동생 치맛자락만 붙들고 있는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거사만이 앞당길 뿐이었다.      


“굳이 그런 일이라면 나를 찾을 그것까지는 없는데, 네 목적은 따로 있는 듯하구나!”

“아! 역시 혜안이 높으신 분입니다.”     


사타무의는 낮게 웃었다. 어떻게 들으면 비웃음처럼 다르게 들으면 맹수의 경고음.      


“때가 되면, 공주마마를 놓아주십시오.”

“훗, 웃기는군.”

“선택은 전하의 몫이지만, 거사는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택?”

“태평공주와 평왕, 아니군요. 그때는 태자 전하라고 해야겠지요? 두 분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타무의의 말에 지성이 몸을 고쳐 앉았다.      


“장주는 죽고 싶어서 그리 안달인가?”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 또한 살고자 이리 하는 것을요."


교활하고 여우 같은 자!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임은 분명했지만, 지금은 사타무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왜 구진천이 너를 제자로 거두었음에도 믿지 않았는지 알겠군.”     


지금까지 평상심을 잃지 않던 사타무의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달빛을 받아 그의 귀걸이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아무래도 너에게는 천보노의 비밀이 없는 듯하구나. 하긴 그것이 수중에 있었으면 벌써 팔아치웠을 텐데.”

“소인을 그리 과대평가해주시다니 황공하옵니다.”     


잠시 스친 감정을 지우고 그는 지성 앞에 정중하게 공수했다.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망루에서 훌쩍 떨어졌다.


‘놓아달라! 누구 마음대로!’


지성은 달빛에 비친 낙수의 윤슬을 길고 오랫동안 쏘아보았다.

태평공주의 에 대한 적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왕부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달라진 한 사람.

바로 유모 곽무진이었다.




이른 아침 한 시비가 다녀간 후부터 의 처소에는 홍비 찬비가 요란을 떨었다.

이 옷을 입어라, 저 옷을 입어라. 굳이 그녀들이 들이미는 옷을 내던지고 고집스럽게 목까지 꽁꽁 싸매고 허리에 비단 띠를 두른 그녀를 보고 홍비가 혀를 찼다.      


“공주마마는 앞으로 비마마가 되실 분이십니다.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우셔야 한단 말입니다. 말을 저리 안 들으시니 원!”

“나는 이것으로 족하네.”     


그런 를 찬비는 다시 거울 앞에 앉히고는 또다시 홍장이니 주훈장이니 다섯 가지도 넘는 화장법에 대해서 줄줄이 읊었다. 휘가 보기에 낙양의 여인들은 화장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이들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아침부터 부산을 떠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느닷없이 그에게 아침 식사를 초대받은 것이었다.그녀들의 잔소리를 물리치고, 휘는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지성의 회랑에 발을 들였다.      


 지성의 처소는 크기는 했지만, 필요한 것 외에는 어떤 장식품도 없었다. 그럼에도 질좋은 흑단으로 만든 넓은 식탁과 의자만으로도 매우 고풍스럽고 말끔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가 시비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 내실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여인들의 속닥이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렸다.     


아내를 죽인 사내의 재취로 들어간 망국의 공주, 그녀가 아직 살아있는 것에 다행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의 안타까운 시선이 휘의 마음에 읽혀 들었다. 이곳저곳에서 그녀를 향해 숙덕이는 소리가 귓가에 어지러이 맴도는 것 같았다.      


“공주마마께서는 어인 일이십니까?”    

 

화영이 불쑥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전하께서 함께 식사를 청하여 왔습니다.”     


전하라는 말에 화영의 얼굴이 굳었다. 온 얼굴이 술 취한 사람처럼 온통 붉은색이다. 저것이 주홍장인가? 아까 찬비가 한 말이 화영의 얼굴에 겹쳐 보이였다.      


“헌데!”     


휘는 차를 한 모금 넘기고 지성에게 얼굴을 돌렸다.   

   

“평소 지붕 위에서 훔쳐보시는 것이 취미이신가 봅니다.”     


컥! 지성이 물었던 찻물을 토해냈다. 풍위(風衛) 바람처럼 스쳐 지나는 발걸음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만기군 총관.


“그대가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었군.”


지성은 찻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윽고 찾아온 침묵. 

음식을 앞에 두고도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참다 못한 화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공주마마께서 백목당에 계속 머무시니, 주변에서 말들이 많습니다.”   

  

휘를 생각하는 척, 돌려서 말했지만, 그 안에는 가득 조소가 담긴 감정이 뒤섞였다.      


“누가?”     


시큰둥하게 지성이 물었다.     


“예?”     


평소 아무 말 않던 지성이 대답하자 화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지성은 그녀 쪽은 보지도 않고 재차 물었다. 반드시 알아내겠다는 질문.      


“아! 그러니까 그것이…….”


 당황한 화영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탁! 지성은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놨다. 그의 옆에 서서 지성의 시중을 들던 무진은 깜짝 놀라 잔 옆에 작게 튄 찻물을 서둘러 닦아냈다.  


“화영아!”

“예!”     


지성이 자신의 이름을 다정히 불려주자 화영이 금세 낯빛을 바뀌었다.    

 

“이제 곧 대인의 생신이시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전하! 어찌 소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너를 내 집에 들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하지만 이미 어른들끼리 정한 약조가 있지 않았습니까?”     


화영의 약조라는 말에 지성의 눈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약조? 누가 한 약조 말이더냐. 무주 때 약조를 말하는 것이냐. 위서인과 약조를 말하는 것이냐!”    

 

서늘한 그의 음성에 잔을 든 화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지금 이 집에는 자신과 같은 여자가 차고 넘칠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그녀의 아비 장위랑은 측천무후와 중종을 거쳐 태평공주 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줄타기를 잘하는 자로서 위후가 숭국부인과 혼인을 명할 때 자신의 딸을 지성의 첩실로 보낼 것을 부탁한 이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장위랑의 뜻이라기보다 그의 딸 화영의 요구였다.  

   

"이미 집을 찾아 나온 소녀가 집이 또 어디 있어 가라고 하신답니까? 너무하십니다. "    

 

체면도 잊고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화영은 지성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걸했다.     


"대인께서 걱정하신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소녀 왕부의 식구가 되고자 집을 나왔습니다.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화영이 고집을 부렸다.      


“왕부는 엄연히 규율이 존재하는 곳이다. 네 마음대로 드나드는 곳인 줄 알았더냐!”      


지성의 찬 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사방에 있던 모든 시비들이 무릎을 꿇고, 그를 향해 엎드렸다. 화영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전하!”     


화영은 곧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녀가 입은 노란 나비잠이 바닥에 그림을 그리듯 흘러내렸다.      


“이미 아버지께서도 저를 이곳 사람이라 생각하실 것이옵니다.”     


지성은 음식을 먹는 듯하다가 멈췄다.      


“태평궁에 전하거라!”     


지성의 입에서 태평궁이라는 말이 나오자 내내 눈물을 흘리던 화영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곧 왕부의 왕비가 책봉될 것이니, 조만간 찾아뵐 것이라고.”     


이번에는 이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 않고 밥을 먹던 휘의 젓가락이 멈췄다.      


“네게 사흘 말미를 줄 것이다. 그만 나가거라.”

작가의 이전글 #14 백목당 왕비마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