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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Sep 27. 2020

#16 태평공주와 곽무진

무현각

화영은 새빨개진 얼굴로 자리를 떨치고 앉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환영해주셔서 감읍하옵니다.”  


휘는 무심한 듯 음식이 담긴 접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시 길어진 침묵. 둘은 말없이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기다리던 찬비는 답답해 죽을 사람처럼 얼굴을 온통 구기고 있었다.     

      

"마마! 다음에는 꼭 소인이 골라주는 옷을 입고."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휘 뒤를 총총히 따라가는 찬비의 말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얼굴을 푼 지성의 눈이 그녀가 지나간 회랑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소야!"     


지성이 부르자 어디선가 평상복 차림의 미복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좌랑, 부르셨습니까?"

"그래, 알아보았느냐!"

"예!"


미복의 사내는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지성에게 건넸다.


"이것이냐?"

"그러합니다."

     

종이를 펼쳐 빼곡히 써 내려간 글을 읽어가는 지성의 낯빛이 점점 어둡게 변해갔다.

  

"이것을 평왕께 전하라."

"예!"     


대답을 한 사내는 나타날 때처럼 순식간 사라졌다.   

  

 ‘기어코 명을 재촉하려 하는가?’     


착잡한 표정의 그는 서둘러 왕부를 빠져나갔다.     

왕부를 나와 그가 걸음을 한 곳은 낙양궁이었다. 

낙양궁 황성의 정전은 불안한 어둠이 깔려있었고, 금빛 단상에는 거대한 등불이 일렁였다. 

그 흔들리는 불빛의 그림자 아래에서, 황제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왔느냐.”

“늦은 시간에 부르셨습니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있겠지?”

“지금 저자에 떠도는 소문 때문이겠지요.”     


지성은 단상에 정좌해 있는 황제를 향해 부드럽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융기 그 아이 옆에 있는 것 이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감읍하옵니다. 폐하!”     


 지성이 고개를 숙여 공수했다. 예왕 이단. 그는 매우 유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무주 때는 어머니인 측천무후의 눈치를 보며 냉궁에 갇혀 살았고, 중종 때는 위황후의 눈치를 보며 황궁의 권력다툼에는 거리를 두었던 그였다.   


“동궁전에 조정 대신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지.”     


무엇보다 황실 암투 속에서 자란 그였기에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아들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도 그가 황위를 수락한 것에는 하나의 이유밖에 없었다.  


그의 누이동생인 태평공주.       

    

 이단은 누구보다 태평공주에 대해서 잘 알았다. 그리고 모후처럼 여제가 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마도 그녀가 황제가 되면 자신의 아이들은 무주 때처럼 도륙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요즘 조정의 인사들이 동궁을 많이 찾는다 들었다.”          


은은하고 나붓한 황제의 음성이었다. 

지성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에 흐르는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당치 않으신 말씀입니다. 저속한 무리배들의 유언비어일 뿐입니다.”     


어디선가 들어오는 한기에 등불이 일렁였다. 

반쯤 비친 황제의 얼굴은 이미 온화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내가 아는 것이 중요하더냐?”     


반은 탄식이 섞인 음성이었다.


“나는 다시 황실에 그때와 같은 피바람이 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단은 동생인 태평공주를 두려워했다. 모후를 가장 많이 닮은 여인. 그녀를 볼 때마다 살아생전의 측천무후를 떠올렸다. 자신이 황위에 있었지만, 그는 정사의 대부분을 태평공주와 의논을 했다. 


그녀가 자리에 없으면 태평궁에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어볼 정도로 황제는 태평공주를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인들은 황제가 바뀌어도 무주의 귀(鬼)는 떠나지 않았다고 수군거렸다.     


 ‘지금의 황제가 무능하고 유약하니 조만간 피바람은 다시 불 것이고, 권력의 방향은 다시 태평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인의 입으로 말하고 만인의 귀로 들었으니, 이는 이미 저자의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내 너를 다시 사괵왕에 봉하고 함곡관을 준 이유를 아느냐?”    

 

황제의 음성이 점점 낮게 가라앉았다. 여린 황제가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신중한 결정이었다.     


“폐하!”


지성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사괵(嗣虢)은 장안과 낙양을 잇는 함곡관을 중심으로 왕도와 동도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서돌궐과 토번의 침임을 막고, 필요할 때 황성 수비의 금군을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병력을 수하에 둘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와 이융기가 잠깐이나마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 함곡관은 그들의 고향과도 같았다.     


“미안하구나. 미안하다!”     


괵왕에 봉해진 지성을 향해 쏟아진 질타는 관심만큼이나 비난이 심할 것이다.     

왕부를 지나는 이들은 침을 뱉고. 아내를 죽이고 새 왕비를 이용해 지위를 얻었다는 비난을 그는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것이다.


황제는 제 앞에 고개를 숙인 지성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약속 하마! 최후에는 내 반드시 너희들의 편에 설 것이다.’  

   

황제는 돌아서 나가는 지성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서선을 떼지 않았다.            

  



백목당 정원은 밤이 되자 곳곳에 등을 밝히고, 방과 다리를 잇는 발을 모두 걷어 올렸다.

여름의 습한 기운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언제든 원할 때는 나가도 좋다 이혼장을 써주겠다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왕비의 위치를 인정해 준다라.    

 

‘초야를 치르지 않은 왕비에 대한 배려인가?’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소에 기름진 음식을 잘 먹지 않았던 휘였지만, 그날따라 음식이 꽤 먹을만했다. 내내 화영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꼭 굽기 전 회칠을 한 새끼돼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풉!’     


그녀도 모르게 터진 웃음에 옆에서 향을 피우던 홍비가 휘를 돌아보았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홍비는 찬비와 달리 말수가 적었고, 행동 또한 신중했다.     


"그리보이냐?"     


홍비는 끓인 차를 그녀 앞에 놓았다.     


“제가 본모습 중에 오늘 가장 즐거워 보이십니다.”     


홍비도 찬비를 통해 회랑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고 있었다.  

   

“마마!”

“말하거라”

“전하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무슨 뜻이지?”

“사람들은 아내를 죽인 파렴치한이다. 말들이 많으니 마마께서도 혹여, 그리 생각하시니 여쭙는 것입니다.”

“,,,,,,”     


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찬비보다 이곳에서 오래 지내 압니다. 전하께서는...”     


홍비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 불쑥 무진이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 홍비는 말을 말아 넣고 고개를 숙였다. 


“태평궁에서 전갈입니다.”

“태평궁에서?”

“공주께서 무슨 일로 나를 부른단 말이오?”


단호한 휘의 어조에 무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태평공주의 말은 황제의 명과 다름이 없었다. 아무도 그녀의 말에 무엇 때문에 라는 토를 달지 않았기에 휘의 반응은 매우 뜻밖이었다.


 “그것이.... 상의할 일이 있으니 조만간 입궁하라는 전갈입니다.”

“제가 태평궁과 상의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소인은 미천하고 미려하여, 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저어되니 유모께서 잘 아뢰어 주십시오!”     


무진은 점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관례상 인사를...."

"제가 미천하여 아직 대명궁의 황후께도 인사를 하지 못했는데. 태평궁에 먼저 드는 것은 자칫 법도에 어긋나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법상 휘의 말이 옳았다. 무진은 더 말하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태평궁을 대명궁보다 우선시했다. 그리고 황제도 암암리에 그것을 묵인했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휘는 꺼내어 말하고 있었다.     


‘태평공주의 힘이 건안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잠시 무진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사건. '흑치준의 죽음’

무진 에게도 그때의 사건은 그녀 인생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태평공주는 어머니 측천무후에게 권력을 이어받기 위해 많은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이는 가차 없이 처단했다. 첫 번째가 흑치상지의 장자, 흑치 준이었다. 낙양의 대부분의 무장들은 흑치상지와 흑치 준, 두 부자를 매우 따르고 신뢰했다.    

 

자신의 오라비인 곽원진 또한 그 무리 중 하나였다.  

그러나 흑치준이 의문사를 당하자, 원진은 스스로 좌천하여 안서도호부로 넘어가 중앙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때  오라비를 따르던 자신의 남편도 돌궐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지성이 괵왕에 책봉될 것을 제일 먼저 알고 움직인 곳은 태평궁이었다. 그녀는 지성보다 그의 비인 휘를 보고자 했다.         

  

”하! 망국의 공주도 공주라 대접을 했더니 진짜 왕비라도 된 듯이 말을 했단 말이지!"


태평은 탁자에 놓인 커다란 진주가 달린 뒤꽂이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다.     


“그래서 뭐라 하더냐?”

"조금 기다리시면 만족할 만한 답을 가져올 것입니다.”     


태평이 집어던진 뒤꽂이를 주워들은 여인이 한 걸음 한 걸음 공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거울을 쏘아보는 공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거울 속 태평공주의 얼굴 위로 보이는 뜻밖의 여인의 얼굴이 비췄다. 

           

“설마 하니 왕부에 너 말고, 다른 여인을 그 아이 옆에 두려는 것은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진은 주워 든 뒤꽂이를 조심스럽게 공주의 머리에 꽂았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건안성의 공주를 받아들인 게야?”     


그녀가 손질한 머리를 다시 쓸어 올리며 태평은 거울 속의 무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원한 일이었습니다.”   


태평의 손이 멈췄다.     


“그 아이가 비를 들이기 원했다고?”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분해 보이는 입매와 수정처럼 아름다운 두 눈에서 범상치 않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더는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돌궐의 묵철이 혼인을 청해왔다.”     


 태평공주의 말을 들은 무진의 손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무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화려함은 없으나 나무랄 데 없는 미인이었다.   

  

태원 곽 씨는 하동 류 씨와 청하 최 씨. 범양 노 씨와 함께 한족을 대표하는 사성본 중 하나였다.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인 당나라 황족도 부러워하는 명문가 중의 으뜸이었다. 또한,  그녀의 오라비인 곽원진은 18세에 진사를 지낸 수재였고, 큰 재상이 될 인재라 모두 칭송하는 이였다.     


그가 스스로 무인이 되어 안서도호부로 좌천하지 않았다면, 진정 훌륭한 재상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네가 아무리 노력을 한들 왕부에서도, 네 집안에서도 허락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를 잘 알지 않느냐?”

     

 태평은 한숨을 쉬었다.

 측천무후는 황족과 명문가 집안의 혼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외척이 과도하게 권력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 황족들도 될 수 있으면 명문가 집안과는 혼인을 기피했다.     

 그런 그녀가 왕부의 유모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지성의 아비가 신주로 쫓겨가 병을 얻을 때쯤 지성에게는 어린 동생이 하나 있었다.  


 영주로 떠나기 전, 그는 태평공주에게 잠시 동생을 위탁을 했다. 당시 태평공주는 이융기의 여동생인 옥진을 데리고 있었기에 흔쾌히 지성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때마침 공주궁에 머물고 있던 미망인 무진이 자처해서 지성의 어린 동생을 돌봤다. 그런 이유로 지성이 돌아온 후 동생과 함께 자연스럽게 왕부로 들어왔던 것이다.     

 지성도 무진의 존재를 묵인했다. 어차피 그는 혼인을 할 생각이 없었고, 왕부보다는 낙양에서 멀리 떨어진 함곡관 별채에 홀로 지낼 때가 많았기에, 그녀가 왕부에 있는 것이 큰 무리가 없었다.   

    

무진도 왕부에서 자신을 비로 받아줄 거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숭국부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내를 죽이고, 망가진 지성의 옆을 지키는 것은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와 시간을 보내며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입을 혼례복을 짓고, 지성과 함께할 이부자리를 손수 만들었다.     


 기다리는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 넓은 왕부에 지성과 그녀만이 있었기에 무진의 기대는 곧 희망으로, 현실로 이루어질 거라 염원했다.  그러나 무진 그녀가 만든 혼례복을 입고 걸어 들어오는 휘의 모습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부디 온전하시길.’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돌이킬 수 없었다. 고작해야 망국의 이름뿐인 공주. 그러나 휘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달랐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그녀를 보는 지성의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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