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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Oct 02. 2020

#17 불새

- 일부러 빠진 함정 -

그 아름답고 맑은 호박색 눈동자가 내내 그녀를 향해 있었다. 무진의 이성이 끊어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휘를 백목당에 가두고 조반이며 점심 다과도 들이지 않았다. 심한 모멸감에 집 밖을 뛰쳐나갈 거로 생각했다. 그것을 바라고 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일상인 듯 주변을 정리하며, 백목당의 정원과 연꽃을 손수 치우고 관리했다. 마치 원래 그곳이 그녀의 자리였던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한 것은 무진 그녀였다. 


 인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휘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갑자기 화영을 내치고 자신을 비로 인정한다니. 언제든 이혼장을 써주겠다 으름장을 놓을 땐 언제고.    


그때 창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서둘러 일어난 휘는 벌컥 문을 열었지만, 문 앞에 놓인 종이 외에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곱게 접힌 종이에는 ‘무현각’이라는 세 글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무 현각이라면 왕부의 서쪽 끝에 있는 무기고였다. 휘는 종이를 탁자에 펼쳐 놓고 자리에 앉아 손을 턱에 괴었다.           


‘무슨 뜻일까?’          


분명 지성이 자신에게 보낸 것은 아니었다.           

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함정임을 알았다. 도대체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내게 이런 것을 보냈을까.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자신을 향한 함정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빠져봤던 그녀였기에, 오히려 이런 순수한(?) 의도에는 오히려 호기심이 동했다.ㅣ 

       

애써 만든 함정이니 빠져 봐야겠지.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시비들이 따라올세라 조심스럽게 창문을  빠져나갔다. 이상하게도 왕부의 서쪽으로 가는 길이 그날따라 조용했다.    

 

무현각 주변은 원래 경계가 삼엄한 곳이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수상했다. 그렇게 쉽게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한쪽 벽에는 무기와 관련된 도면과 책들이 가득한 서고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거대한 쇳덩어리부터 그동안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수많은 종류의 활과 칼들이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궁성을 지키는 금군과도 맞먹어도 뒤지지 않겠어.’


놀란 눈으로 차근차근 살피는데 그녀의 눈에 낯익은 수레가 보였다.           


‘저것은…’     


사타무의가 자신의 발명한 무기라며 자랑스럽게 꺼내놓았던 황노였다.      

저것이 왜 여기 있는 거지? 건안성에 있어야 할 물건이 눈앞에 있는 것이 의아했다.      

그때였다.    

  

“불이야! 불이야! 무기고에 불이 붙었다!”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휘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려고 문 쪽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이미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잠갔다. 휘는 그제야 깨달았다. 여기서 살아서 나가든 죽어서 나가든 자신은 무기고에 불을 낸 주범이 되어야 하는 것.


이것이 함정인가?    

 

나를 죽이려는 목적. 누가 파 놓은 함정인지 모르지만, 자신에 대한 살의가 분명하게 보였다. 

      

휘는 허탈하게 웃었다.           

건안성에서도 이곳에서도 자신을 죽이고 싶은 이들은 왜 이리 많은지. 불길은 벽을 무섭게 휘저으며 그녀를 향해 맹렬히 다가오고 있었다. 휘는 생각할 것 없이 날렵하게 황노 위로 올라섰다. 끼익!  그녀의 키만 한 거대한 화살을 들어 올리고 힘껏 불길이 치솟는 지붕을 향해 쏘아 올렸다.   

        

쒸이이익!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명적이  불길에  휩싸인 지붕을 뚫고 날았다. 화살이 밤하늘을 굉음을 내며 가르고 올라갔다. 마치 어두운 밤, 하늘에 불새가 비상하듯 불꽃은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커다란 구멍이 난 지붕 위로 막 뛰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한쪽 벽이 무너지며 서가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곳에서 뿌연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누군지 확인할 새도 없이 그는 휘의 얼굴에 검은 천을 뒤집어씌우고는 뚫린 무현각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낙양의 고요하고 적막한 하늘에 요란한 굉음을 내며 불꽃이 치솟았다. 불길이 치솟는 가선방 주변의 모든 방의 문이 닫혔고, 왕부는 시비들부터 군인들까지 모두 나서서 불을 끄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휘는 매캐한 연기를 마신 탓인지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답답함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참을 누군가의 어깨에 매달려 갔을까. 시야를 가리는 검은 천이 걷히고, 하얀 옷을 입은 선인이 자신 앞에 서 있었다.    

       

그날 어미와 자신을 구하고 홀연히 사라진 사람. 뿌연 시야가 점점 초점을 찾아 또렷해지자, 맑고 그윽한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숨을 쉴 수 있겠소?”     


자신의 머리를 편안하게 받치고 있는 지성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휘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현각에는 왜 간 것이오?”

“그것이…….”     


휘는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이내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백목당이 분주해졌다. 왕부안에 불이 난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다. 안채에 지성과 휘가 함께 있는 것을 본 찬비는 부지런히 물을 데우고, 우린 차를 내어 왔다. 홍비 찬비가 방문 앞에 서 있자 안에서는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내가 여기 있을 터이니 모두 물러가라!”

“예? 예. 예!”          


넋 나간 얼굴의 홍비와 달리 찬비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기쁨의 발을 동동 굴렀다.

정신을 차린 휘의 코앞에 지성이 보였다. 그는 불에 덴 휘의 팔에 정성스럽게 약을 바르고 있었다.   


“제가 거기 있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내가 그곳에 있는 것보다 그대가 거기에 있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소?”     


휘는 조용히 입술을 말아 넣었다. 왠지 자신을 조용히 혼내는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서신 하나를 받았습니다.”

“서신?”     


휘의 하얀 팔에 불에 덴 자국이 선명했다. 그곳에 연신 조심스럽게 연고를 바르던 손이 멈췄다.

그녀는 품속에 있던 서신을 꺼내 지성에게 보였다. 무현각이라고 쓰인 필체는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의심이 가는 이가 있소?”     


지성은 무심한 듯 그녀를 보지 않고 물었다. 그러나 말투와는 달리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매만졌다.     


“화영은?”

“화영이 범인일 리가 없습니다. 무기고에 불을 낼만큼 대담하지 않지요.”

“아무리 미워도 사람을 죽일 만큼 악랄하지도 않지.”     


 휘의 말에 지성이 맞장구치듯 대꾸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간 것이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지성은 되물었다.    

 

“파놓은 함정이니 빠져봐야 실체를 알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숨을 걸고라도 말이오?”     


지성이 휘의 팔을 꽉 쥐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휘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팔을 빼지는 않았다.     


“어째서 제가 죽는다 생각하십니까?”     


휘는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지성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함정에 수도 없이 빠지다 보면 아는 것이 하나 생기지요. 처음이 가장 서툴고 쉽다는 것을 말입니다.” 

    

휘의 말에 지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년 전 죽어가는 어미를 붙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던 어린 소녀의 눈이 기억이 났다. 그녀 또한 얼마나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을까.     

이상하게 그때의 휘를 생각하면 그의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어째서 황노가 왕부 무기고에 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휘의 질문에 지성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아…. 그것은.”

“사타무의 그자가 다녀갔겠지요?”   

  

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명광현에서 만든 물건이라 내가 후한 값을 주고 가져왔소.”

“그자가 또 무슨 감언이설을 늘어놓았을지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참 다행이오.”     


더 이상 집요하게 캐묻지 않았다.

지성은 그녀가 처음으로 황노를 쏘아 올리던 때를 떠올렸다.     


“명적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명광현에서 제 구조신호를 보았으니 제 생사를 확인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을 살렸군….”

“그 어느 것도 저를 살리지 않습니다. 스스로 살아남는 것이지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불속에 있었던 그가 머쓱할 만한 대답이었다. 하긴, 그녀는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그곳을 빠져나왔을 것이다. 지성은 탁자에 머리를 괴고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여휘, 자신과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치도 뛰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나락에서도 그녀는 가뿐히 뛰어올랐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과 다르지 않을까. 생각이 머물자 더욱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소첩은 이제 괜찮습니다. 어서 건너가 쉬시지요!”     


비비적거리며 일어나려는 휘를 도로 누운 뒤, 지성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아대 위에 걸었다. 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무슨….”

“오늘은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안전할 거요.”

“괜찮습니다. 굳이 그리하지 않아도….”

“자객이라면 걱정하지 않겠지만, 정작 무서운 건 다른 이들의 눈이라오.”

“황궁에서 보는 눈을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태평궁의 눈을 말씀하십니까.”

“둘 다요.”     


 시큰둥 대답하고 지성은 그녀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휘는 그녀는 눈을 감은 지성의 옆모습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지성이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깝게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숨소리 하나에 코끝이 간지러웠다.

지성이 눈을 떴다. 빛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지성의 아름다운 갈색 눈이 마주쳤다.      

    

“무현각이 불에 탔으니 어찌합니까? 서고에 중요한 문서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무현각은….”


지성이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대가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소. 그런데…. 태평궁에서 불렀다지요?”     


지성이 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에게서는 시원한 대숲 향이 났다. 그녀의 기억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도 몰랐으나 싫지 않았다.     


“저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없나 봅니다.”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도 지금도.”     


지성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의 동요를 휘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휘의 붉은 입술이 아름답게 호를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소. 나의 제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통 모를 일이었다. 당황실에 이혼을 묵인하는 전례가 많다고 하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후궁을 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나도 좋소.”


그는 의외로 편안해 보였다.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녀는 애써 침묵으로 삼켜냈다.    




찬비가 부르는 소리에 휘는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일어나 빈 옆자리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그동안은 알지 못했던 찬 기운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마마! 어서 소세하고 단장하셔야 합니다.”     


찬비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휘를 보는 내내 싱글벙글하였다.


“편안하게 주무시었습니까?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요!”     


잔뜩 기대감을 품고 있는 찬비를 보고는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밀려왔다.     


“그것이….”     


차마 입으로 그녀가 바라는 대답을 하지 못해 휘는 우물쭈물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서 나가시며 신신당부하셨지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둣 찬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다 안 다는 건지. 무엇을 당부한 건지.     

“전하께서는 언제 나가셨느냐?”

“마마께서 잠이 드신 후에도 한참이나 지난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나가셨습니다. 그것이…”

“흠흠….”     


밖에서 무진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더 말을 하려던 찬비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속살이 살짝 비치는 연분홍 저고리에 푸른 비단 치마를 입은 무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 보였다.          


“태평궁에서 가마가 도착했습니다. 어서 준비하시지요!”     


그녀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어도 내내 미소를 지어주던 무진은 휘에게 고개를 숙인 채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무현각의 불은 어떻게 되었소?"


휘의 물음에 무진의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불은 다 잡았으니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불을 낸 이는 잡았는가?"     


무진의 대답이 없었다. 휘가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젯밤에 왕비 전하께서는 그곳에 왜 계셨습니까?”

“지금 나를 의심하는군!”     


휘는 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내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았던 이유가 납득이 됐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신은 그저 왜 그 시각에 계셨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녀를 보는 휘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자세한 것은 전하께서 아시네.”     


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진의 옆을 스쳐 지나가다 잠시 멈췄다. 

    

“설령!”     


휘의 한 마디에 무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내가 불을 지른 자라 해도, 그대가 감히 내게 그것을 묻는가!”

“송구합니다. 소신이 망각하여 무례를….”     


무진은 어쩔 줄 몰라하며 바닥에 바싹 몸을 엎드렸다.     


“다음부터는 잊지 마시게.”     


휘는 무진을 스쳐 느릿하게 걸었다. 무진은 몹시 무력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손과 발이 덜덜 떨려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위압감에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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