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가는 물고기 Oct 08. 2020

#18 독을 마시는 여인

- 매화독 -

 한漢족 가문의 귀족들이 황실 황족을 천대하는 데는 딱 한 가지 이유였다. 선비라는 오랑캐의 혈족이라는 것과, 그들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이었다.          

 

무진이 본 당의 공주들은 대부분 정부를 여럿 두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녀들 대부문이 혼인하지 않고, 자유로운 사생활을 위해 근교에 도관을 짓고 매일 연회를 열어 음주가무에 취했다.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고, 과부들의 재가가 흠이 되지 않았다.     


 귀족의 가문들은 황족과 연을 맺는 것을 꺼려했다. 그것은 한족으로서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화이(華夷), 그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었다.           

무진은  스스로 유모가 되었다.


비록 왕부의 여관이었어도 그녀가 가진 한족으로서의 위엄을 스스로 떨쳐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본 부여휘는  타고난 품위를 지닌 여자였다. 하얀 순백의 도자기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여인을 지성이 관심을 보였다. 그동안 수많은 혼처를 마다하고 이루어진 혼약을 파혼하는 데에도 흔들림이 없던 사내였는데, 이 여인이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있었다.           



         



 

“공주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천세 천천세!”     

휘는 무릎을 꿇고 태평공주에게 공수했다.   


“오랜만입니다. 공주, 백목당은 지낼 만한가요?”     

태평공주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휘의 인사를 받았다. 


“예,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성 그 아이가 공주를 무척 아낀다지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     

휘는 말없이 웃었다.     

“수줍어할 필요 없습니다.”     


태평은 휘가 수줍어서 웃는 것이라 단정 짓는 듯했다. 자기 위주의 대화는 연회장에서도 사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까. 


“그 아이가 혼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고모로서 참으로 기쁩니다!”


과연 좋을까? 혼인을 가장 껄끄럽게 생각한 여인이다. 흑치가를 몰살시킨 당사자.

세상에서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위후와 안락 공주가 죽었으니 오로지 태평공주일 뿐이었다.  


“망극하신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무현각이 불탔다지요?”    


 태평공주는 휘가 자리에 앉자마자 어제 일을 캐물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왕부의 일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부에도 태평궁의 세력이 뻗쳐 있음을 실감했다.    


“범인은 잡았습니까?”          


묘한 웃음으로 휘를 보는 태평공주의 눈에는 그녀를 향한 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으나 곧 잡히겠지요!”   

  

휘는 냉담하게 대답을 했다.           


“그나저나 저를 이렇게 급하게 부른 연유가 무엇입니까?”       

   

 느릿하게 부채를 흔들던 태평의 손이 멈췄다. 태평은 역시나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대 숙일 것 같지 않은 고고함. 태평이 앞에 놓인 붉은 매화 잔에 손을 대자 옆에 있던 시녀가 잔에 차를 따랐고, 휘의 잔에도 찻물이 채워졌다.  


 휘는 물끄러미 잔을 들여다보았다. 붉은 매화꽃이 찻물에 섞여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흑치가에서 보았던 매화 문양의 잔. 휘의 동공이 흔들렸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흔히 하는 실수. 하긴, 그녀가 실수한들 그 앞에서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태평공주는 서둘러 주위의 시비들을 물렸다.  


“무현각의 불은 공주께서 내셨는지요?”     


찻잔을 바라보던 태평은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조용하고 나긋한 미소까지 띠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휘는 단숨에 차를 들이켰다. 그녀가 차를 마시자 태평은 환하게 웃으며 느릿한 걸음으로 휘에게 은밀히 다가왔다.    


“그런데 말입니다. 공주!”     


그녀는 휘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뻗었다. 


“듣기로는 무현각에 불새가 날았다지요?”

“그렇습니까?”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휘도 은밀히 대답을 했다.  

   

“그런데 무현각에는 왜 가셨습니까?”     


마치 올무에서 토끼를 지금 막 잡아챈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음흉한 승리의 눈빛.     


“그것이….”     


휘가 마치 무엇인가 말할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태평의 검고 어두운 눈동자가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공주?”     


시야가 어둑하니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나를 위한 불새가 되어 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태평이 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속이 미친 듯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독! 그녀가 마신 찻물에 미량의 독이 들어있었다.      


울컥! 휘는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녀는 차분하게 손수건으로 피가 묻은 입술을 닦아내고는 태연하게 남은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평의 눈이 점차 사백안으로 변해갔다.     


“대체….”     


태평공주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의 황제도 자신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지금 장안의 힘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런데, 태평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아주 소량의 매화 독이었다. 바로 죽는 것도 아니고, 중독 증세가 바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잔에 그려진 모란꽃에 섞인 매화 독은 죽은 사람의 사인은 알 수 없이 천천히 생명을 앗아갔다. 완벽한 살인.           

 휘는 태평공주가 보는 앞에서 잔을 비운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이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멸하기 전, 백제 왕실이 어떻게 오랜 시간 유지되어 왔는지 공주께서는 아십니까?”     


몇 걸음을 나아가던 휘는 반쯤 뒤로 돌아 태평을 바라보았다.          

 

“부여 씨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혈족입니다. 서로를 죽이는 골육상잔에서 왕족이 어떻게 혈족을 유지시킨 줄 아십니까?”     


휘는 다시 잔에 차를 따라 천천히 태평에게 다가갔다.  


“왕궁에서 가장 흔한 것이 바로 독살입니다.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죽게 만들지요.”     

     

부여 덕장과 송화 부인의 사인은 중독에 의한 폐렴이었다. 휘는 태평이 보는 앞에서 잔을 다시 들이켰다. 태평은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했지만 속은 경악과 함께 낭패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등골이 서늘한 기분,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지금 압도당하고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지도 않았고, 여인들이 바르는 흔한 연지도 바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휘의 홍조 띤 볼은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거기다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에 사로잡혀 태평은 눈을 떼지 못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태평공주는 애써 표정을 감추려 했으나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여 씨 가문이 나라가 멸망해도 이렇게 질기게 살아남아 있는 것은 말입니다. 공주마마.”     


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태평공주가 보는 앞에서 그녀는 매화 잔에 담긴 차를 서서히 비워냈다.           

“제 목숨을 갖고 싶으시면 더 강한 것을 준비하셔야지요. 흑치 장군과 저는 다릅니다.”     


태평공주의 등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독으로는 죽일 수 없는 여인.     


“도대체 너…. 너는…….”          


 태평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휘는 천천히 태평궁 정전을 빠져나와 가마에 올랐다. 가마에 오른 순간, 그녀는 다시 한번 울컥 검은 피를 토해냈다. 함께 마차에 올랐던 홍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게…. 어서 의원에게….”     


홍비는 허둥지둥 말을 잇지 못했다.    


“소란 떨 거 없다. 이 일은 지금은 왕부에 알리지 말거라!”     


마부를 향해 소리치려는 홍비의 말을 잘랐다.     


“마마!”     


말을 더하려던 홍비는 입을 다물었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휘에게 그녀는 더는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 옛날,

 건안성 송화 부인의 처소에서는 매일같이 뿌연 연기가 솟아올랐다. 부인을 가까이서 모시는 시녀들도 모두 내보내고 그녀는 직접 탕약을 달였다,   


“휘야! 아직도 배가 아프냐?”     


그녀는 작은 탁자 위에 누워있는 어린 휘에게 물었다.     


“참을만합니다.”     


아직 열 살도 안 된 소녀는 입을 앙다문 채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어미한테는 아프다고 해도 괜찮다.”     


송화 부인은 달여진 탕약을 투병한 유리그릇에 조금 덜어 아이에게 먹였다.   


“이것은 부자탕이라는 것이란다.”     


부자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꿀꺽꿀꺽 삼키는 딸을 송화 부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앞으로도 대방군이 주신 차를 마시면 꼭 이 탕을 끓여 먹도록 하여라!”  

   

딸이 주는 빈 유리그릇을 받아 든 그녀는 딸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독은 다른 독으로 다스리는 법.

휘가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오는 날이면, 송화 부인은 어김없이 부자탕을 끓였다.    

 

휘는 백목당의 처소에 홀로 앉아 탕약을 끓였다. 한참을 약탕기를 바라보다 그녀는 소매에서 노란 종이뭉치를 꺼내 펼쳤다. 물끄러미 그것을 들여다보다 망설임 없이 탕에 쏟아부었다. 휘가 태평궁에서 돌아왔다는 말이 들리자마자 지성은 서둘러 백목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중문 앞에 홍비와 찬비가 쩔쩔매며 서성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서 뭐 하는 것이냐?”

“저…. 전하!”     


지성의 목소리를 들은 홍비와 찬비는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뭐하냐고 물었다.”

“그것이….”     


서로 눈치만 보던 차에 홍비가 입을 열었다.     


“약을 달이신다고 소인들뿐 아니라 시녀들을 모두 물리셨습니다.”         

 

홍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성은 잠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옅은 독향에 지성은 서둘러 천으로 코를 막았다. 익숙한 냄새였다. 평소 같았으면 활짝 열려 있을 문들이 모두 닫혀 있었다. 지성은 굳게 닫혀 있는  안쪽 문까지 모두 열어젖혔다.


뿌연 연기와 짙은 부자 향이 온 방에 진동했다. 마지막으로 휘의 방문을 열자 약탕기 옆에 그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지성은 서둘러 그녀를 안아 들고, 자신의 침실로 들어왔다. 

         

“어떠한가?”     


지성은 휘를 진찰하는 태의에게 채근했다.      

태의는 키가 작고 몸집이 제법 나가는 중년의 남자였다. 어디서 술을 진탕 마셨는지 그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태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떠냐니까?”     


지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도 그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맥도 안정적이고, 지금은 그냥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지성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분명 휘는 빈 약탕기 옆에 쓰러져 있었다. 피를 토한 듯 붉은 손수건도 그녀의 품에서 발견을 했다.  

    

“냄새로 보아 부자탕을 드신 듯한데…….”

“뭐라고?”

“무엇 때문에? 그 독약을 먹는단 말이오?”


지성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걸 난들 아느냐는 표정을 짓던 태의가 말을 머뭇거렸다.     


“말하라!”

“아무래도 마마께서는 부자에 중독이 되지 않는 체질이신 것 같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요?”     


그는 술기운으로 빨개진 코를 연신 훌쩍이다 부산스럽게 머리를 긁었다.    

 

“소인이 생각하기로는….”     


나이 든 태의는 말을 중간중간 끊어내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해독제로 부자를 달려드신 듯합니다.”

“해독이라!”

“그런데…. 그것이….”     


그가 또 말끝을 흐렸다. 지성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자 태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꾸준히 복용해 오신 듯합니다.” 

    

말을 마친 태의는 주섬주섬 기구를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아니 그냥 가는가? 약이라도 처방을 해야 하는 거 아니오!”     


지성을 힐끗 올려다본 태의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부자탕으로 스스로 해독하는 이에게 약은 무용 하지요. 자금 주무고 계시니 충분히 잘 자고 일어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펴지지 않는 허리를 일으키면서 얼굴을 구겼다.  


“이 일은 태평궁이나 함원전에는 알아서 함구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는 지성이 말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할 말을 모두 마쳤다.

원래부터 기인으로 소문난 태감의 최고 어른, 모두 그를 황태의라고 불렀지만, 황제 외에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없었다.    


“아마, 비 마마께서는 독으로 돌아가실 일은 없을 듯합니다.”   


태의는 고개를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지성은 단정하게 눈을 감고 숨소리도 없이 잠이 든 휘를 내려다보았다. 황실에서 독살은 아주 흔한 죽음이었다. 그도 황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윗전에서 주는 음식은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처럼 독을 몸에 품고 다니지는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17 불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