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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Oct 09. 2020

#19 사타무의의 귀걸이

ㅡ 발해로 가는 꿈 -

도대체,

그녀는 건안성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쩌면 자신보다 더 큰 지옥을 걸어왔을 것이었다.     


금전산에서 그 간절한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신이든 사람이든 누군가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주길. 그 간절함을 지성은 외면하지 못했다. 그 맑고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에 가득 담긴 공포와 공허, 그때의 그녀는 구해달라 소리치지도 못할 만큼 철저하게 혼자였던 자신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에.   

  

지성은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서.         

 무서운 여황제 앞에서 독주를 마시고 죽어가는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비에 대한 분노,

스스로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 다시는 빛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날, 그는 그녀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           


휘가 사라진 뒤, 태평공주는 침궁으로 돌아와 안에 있는 집기들을 모두 던져 깨뜨렸다.

 황제도 어쩌지 못하는 나에게 감히! 감히!          


 분이 풀리지 않아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는 값비싼 도자기들을 몽땅 깬 것으로도 모자라 은과 자개로 정교하게 조각한 목각을 열어 신경질적으로 금붙이들을 뒤적였다. 문득 태평의 손에 금귀걸이 하나가 걸렸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 반짝거렸다.  


연꽃을 물고 있는 용의 형상. 그것을 감싸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구름이 흘러가는 듯한 류운문流雲紋. 태평공주는 밖에 있는 시위를 불러들였다.     

      

“명광현의 사타무의를 불러오너라!”          


사타무의의 나머지 한쪽 귀걸이. 그녀는 이 귀걸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무너진 백제의 수치. 정확히 말하면 의자왕의 수치,   

태평은 두 해 전 사타무의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나는 이런 귀걸이 따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단다.”     


 한참이나 어린 청년이 그녀 앞에 내놓은 물건은 처음 보는 귀걸이였다.    

       

“이것은 백제의 자랑이자, 수치입니다.”          

금을 얇게 펴 오려낸 듯 조각낸 귀걸이는 정교하게 세공된 귀한 물건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하지요!.”          


곧고 단아한 미소를 가진 청년의 입매가 시원하게 호를 그렸다.           


“아비의 유품이 어째서 자랑이자 수치가 될 수 있느냐?”    


태평공주는 이 어리고 잘생긴 청년이 궁금했다.    

       

“이 물건은 돌아가신 의자왕의 물건입니다.”

“왕의 물건이라! 그대도 부여 씨인가?”

“.....”     


사타무의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 답을 하지 않았다.     


“죽은 왕의 유품을 내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냐?”

”왕의 신물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네가 신물을 어찌 알지? "          


태평공주는 놀라움 반 호기심 반으로 상체가 한껏 청년에게 쏠렸다.     

          

”이름이 무엇이냐?"

”사타무의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물과 관계가 있느냐?”

“이 귀걸이를 만든 이가 신물을 만들었사옵니다.”          


 백제의 신물. 소정방은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침공했다. 사비성을 함락하고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왕궁 안에 숨겨진 백제의 보물. 금동으로 만들어진 대향로였다. 신물과 왕은 하나의 존재, 둘 중 하나만 손에 넣는다면 백제의 멸망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미친 듯이 찾아도 보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끝까지 결전을 벌이던 의자왕을 끌어낸 것은 소정방이 아닌 왕의 호위대장 예식진이었다. 그는 신물 대신 왕의 귀걸이를 고종에게 바쳤고,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좌위위대장군에 봉했다.      

     

 그러나 고종이 원한 것은 백제의 보물이었다. 한 번 보면 세상의 모든 도(道)가 거기에 있어,

신관이 춤을 추면 저절로 향이 피어오르고, 기러기가 날아와 춤을 춘다는 전설을 그는 믿었다.     

 중원을 차지한 북방의 선비족이지만 여전히 중원에서 그들은 주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문화를 잃어버리고, 그 위에 짙고 화려한 삼채를 덧칠했다.

여인들의 짙은 화장처럼 당은 개방과 관용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 고유의 문화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비록 나라가 망하였어도 그들은 갈대처럼 스러졌다가 들불처럼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들의 꽃이 남쪽에서 금빛 향로로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북방의 빛나는 수련을, 아름다운 태양의 꽃을.     


수나라가 고구려를 욕심내듯 고종은 백제를 갖고 싶었다.

수시로 백제의 음(音)을 탐하고, 호선무라 불리는 그들의 가무를 즐겼다.     

태평공주는 사타무의 귀걸이를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태연한 척 가장하였으나. 그녀의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허나! 내게 이것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탄하던 그녀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명광현에 대해서 잘 알지 않습니까?”

“흥!”     


태평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런 천한 대장장이들 따위야! 늙어 죽을 때까지 산속에 처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나는 모후와 달라!”          


그의 귀걸이를 보는 태평공주의 두 눈에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부황과 모후가 왜 그렇게 바다 건너 남쪽 나라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아름다운 것들을 아끼셔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타무의는 조롱 섞인 태평의 말에 진중하게 답을 했다.     


“그래서?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이가 명광현에 있다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그녀는 정교하게 세공된 사타무의의 귀걸이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아름답구나! 망가뜨리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영롱하게 비치는 금빛 귀걸이 앞에 태평공주의 눈매가 나른하게 풀렸다.

사타무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들었다.     


 그의 손짓에 수공후와 비파, 거문고와 쟁을 든 악공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곧이어 연주가 시작되고 그는 공주를 보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률에 따라 조용하고 여리게 시작된 리듬은 반 박자씩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사타무의는 한 발 한발 부드럽게 움직이다, 길고 유연한 두 손을 높이 들어 천천히 빙글빙글 돌았다.           


때로는 절도 있게 때로는 부드럽게 바람에 나부끼듯 사타무의 몸이 아름답게 흔들렸다. 마치 기러기가 우아하게 날갯짓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유연했다. 아름다운 음악과 황홀한 춤사위에 태평공주는 빠져들고 말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한쪽에 걸린 그의 귀걸이가 작게 빛을 떨어뜨리며 흔들렸다.  

         

원진이 호선무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러운 춤이라 했거늘…….     

태평은 감탄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호선무와 격이 다른 춤사위.     

음악이 멈추고 악공과 무희들이 쓸려나가는 모래알처럼 자연스럽게 퇴장했다. 그러나 사타무의의 춤사위는 멈추지 않았다. 사타무의는 넋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태평공주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문득 태평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떠올랐다. 혼인을 두 번이나 했고, 장성한 아들을 두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내의 얼굴이 꽤 잘 생겼음을 깨달았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부드럽고 지적인 미소.           


”너무 아름답구나! 망가뜨리고 싶을 만큼."    


태평은 사타무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내 곁에 있어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마!”

“그것이 제가 원하는 것이옵니다. 마마!”

“이 귀걸이는 내가 가져야겠다. 정인의 증표로!”         


 태평은 사타무의에게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날 사타무의는 태평궁을 나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는 종종 태평궁을 드나들었다, 이후 명광현은 낙양에서 막대한 부를 쌓아갔고, 그 일부는 건안성으로 흘러 들어갔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휘를 보자 지성은 알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다시는 네가 스스로 독약을 마시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할것이다.’     

그가 분노를 가득 누르고 왕부를 나설 때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노인이 문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긴 어쩐 일인가?”

“그걸 몰라 물으십니까?”


영노는 골이 잔뜩 난 얼굴로 지성에게 따져 물었다.     


“아무래도 왕부에 사람을 바꿔야 할 듯하구먼.”

“공주마마는 괜찮으신지요?”          


‘명적으로 쏘아 올렸으니 명광현에서 나의 생사를 궁금해할 것입니다’          

전날 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괜찮네.”

“당연히 괜찮으시겠지요!”     


소리를 버럭 지르던 영노는 주변을 살피며 말을 끊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휘의 안위를 묻기 위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영노는 다급하게 물었다.     


“알 거 없네!”     


공손하게 물어오는 영노의 말을 지성은 싸늘하게 잘랐다.

지금은 이 화가 많은 노인의 말을 받아 줄 만큼 그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지금 태평궁에 가실 일이 아닙니다.”     


 지성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슨 말인가?”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볼 틈도 없이 영노의 입에서는 무시무시한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방군왕께서 황제께 파혼서를 보내셨소. 이제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지성의 몸이 그대로 얼어 버렸다.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 이혼해 주겠소.’      

    

지성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옆에 두지 않는 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혼인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마음에 둔 여인을 옆에 두면 지금처럼 두고두고 그녀를 괴롭힐 일만 생긴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파혼서를 보낸 이유를 아십니까?”     


지성이 말없이 말에 오르자 영노는 다급하게 그를 잡았다.     


“묵철에게 보낸다고 합니다.”     


지성은 말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영노께서는 장주를 얼마나 믿으시오?”     


뜬금없는 질문에 영노는 당황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고맙소! 그래도 진정 공주를 걱정하는 것은 그대뿐인가 보오.”  


지성의 흑마는 원래 목적이었던 태평궁이 아닌 융경방을 향해서 바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융경방 별채의 호수에서는 옅은 물안개가 마치 구름처럼 자욱했다. 


한쪽에서는 잔물결을 일으키며 유유히 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끝에 아담하게 지어진 정자에서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융기는 기루의 여인들과 한참 비파 연주에 빠져 있었다.        

   

“드릴 말이 있습니다!”     


지성의 한 마디에 연주가 멈추었다.

눈을 감은 채 한참 연주에 취해 있던 이융기의 반듯한 미간에 못마땅하게 찡그렸다.     


“무슨 일이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성은 이융기에게 다그쳤다.     


“지금 조정에서 묵철과 화친혼을 추진한다지요?”     


참착하게 말을 꺼내는 지성을 보며 이융기는 슬쩍 미소 지었다.         

  

“그러기에 진작 왕비 책봉을 서둘렀으면 좋지 않았느냐!”

“....”


지성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바마마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때였다.     


“이리 오실 줄 알았지요!”     


지성의 등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노랑 비단 치마 위에 붉은 모란이 그림처럼 수가 놓여 있었다, 밤바람을 막기 위해 어깨를 감싸고 있는 금사로 짜인 나피삼은 그녀의 발치에서 작은 몸짓에도 유연하게 흔들렸다.           


“어이쿠! 고모님이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이융기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요란하게 태평공주를 맞이했다.

그녀는 시녀의 부축을 받아 옥으로 깎은 단상에 걸터앉았다.          


“그래 무엇을 따지러 예까지 왔느냐?”          


지성은 말없이 이융기를 노려보았다.

이융기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평공주에게 찻물을 우린 잔을 내밀었다.        

  

“고모님께서야 말로 어찌 예까지 친히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그야! 너도 있고, 너도 있으니 참으로 잘되었구나!”.     


태평공주는 살포시 접은 용피선으로 이융기와 지성을 나란히 가리켰다.     


“이 조카가 아둔하여 고모님의 말씀을 받들고자 합니다.”  


이융기는 느긋한 표정으로 내민 잔을 그녀 앞에 두었다.

지성은 말없이 일어나 돌아서 나가려 했다.          

 

“얘야! 오늘 내 이야기를 듣고 가는 것이 좋지 않겠니?”    

 

태평공주는 지성을 불러 세웠다.          

 

”명광현에서 금기를 어겼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명광현이라는 말에 이융기와 지성의 눈길이 태평에게 쏠렸다.     


”사라진 백제의 신물!“     


이융기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들이 그동안 그렇게 막대한 부를 이룬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금전산에 신궁을 짓고, 제를 지낼 신물을 만드는 것이지.”

“아무 힘도 없는 그들에게 그런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이융기는 슬쩍 술잔을 채우며 히죽 웃었다.           

“그들은 절대 황실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이다. 돌궐이 그러하듯!”   


태평공주는 강한 어조로 단정 지었다. 오랜 기간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그녀였다. 모후만큼은 아니었지만 태평공주 역시 정치적인 촉은 남달랐다.      


“신궁을 짓고 신물을 만든 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이융기를 바라보는 태평공주의 눈빛이 차게 변했다.     


“내 앞이라 모르는 척 말거라. 부여씨들에 대한 것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영주 땅에 모인 그들이 진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 말이다.”        

  

 ‘진’          

진국(振國) 또 다른 이름. (훗날 발해渤海)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진. 아직 당은 진을 나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토벌할 여력도 없었다. 돌궐의 묵철이나 서쪽의 토번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아직 나라를 세우지 않는 집단까지 돌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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