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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Oct 10. 2020

#20 드러나는 민낯(1)

ㅡ 무진의 얼굴

태평공주의 찬 목소리가 융경방 정전을 싸늘하게 울렸다.    

       

“대방군 부여경은 진과 손을 잡을 것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지성이 못마땅하게 내뱉었다.           


“그는 야망이 큰 자다. 모르느냐? 영주 땅에 오래 있었던 네가 모르진 않겠지!”

“확인된 사실입니까?”

“무엄하구나, 감히!”          


태평은 지성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믿을 만한 모습을 보지는 못하여서 말입니다!”     


알아도 모른 척, 모르는 것도 모른 척,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 여인에게 정을 주지 말라, 경고했거늘 쯪쯪."     


그녀의 말에 지성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황상께서는 묵철과의 혼인을 윤허하실 것이다.”         


 지성의 치부를 그녀는 환히 꿰뚫었다. 

술잔을 들이켜던 이융기의 손이 멈췄다.  

         

”아직 조서가 떨어지지 않은 일이 아닙니까?"

”태자가 되실 분께서 이리 술만 드시고 부황의 어려움을 덜어주지 않으시니 크나큰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용피선을 흔들었다.     

      

”고모님께서 이리 살펴주시는데 소신이 할 일이 있겠습니까?"     


잠깐의 침묵.     


”묵철이 부여의 공주를 원하니, 그리하시라 여쭈었습니다."

"마마!"          


격한 지성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네 혼사는 내가 다시 정해 줄 것이다. 어차피 초야를 치른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비에 책봉이 된 것도 아니지 않으냐!"

"하나! 이는 과한 처사입니다."      


이융기도 옆에서 거들었다.      


"내가!"     


소름 끼치는 싸늘함이 섬광처럼 회랑을 훑고  지났다. 

       

”너희에게 한가하게 정사를 논의하러 온 줄 아느냐!"         

 

용피선을 거칠게 펼쳐 든 태평공주는 거만하게 자신의 두 조카를 내려보았다.  

         

“평왕은 잊지 마셔야 할 것이오. 지금 그 자리를 누구 때문에 얻게 된 것인지 말이오.”    

      

이융기의 입매가 굴욕적으로 닫혔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태평에게 지성이 물었다. 멈칫, 그녀의 발이 멈췄다.      


“무엇을?”

“아무리 비에 책봉하지 않았어도 엄연히 왕부의 사람입니다. 제 아내가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지성의 입에서 아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그녀는 큰소리로 웃었다.         

  

“네가 이리 나오니 더욱 흥미롭구나. 파혼이 이번 한 번도 아닐진대, 설마 망국의 공주를 진짜 왕비로 맞이할 생각이더냐.”

“제가 선택을 한다면, 공주께서도 어쩌지 못하실 텐데요.”

“흥. 네가 원한다면 파혼은 어렵겠다만…. 이 사실을 조정에서 알게 된다면 사괵왕부에 자신의 딸을 보낼 이들이 줄을 설 것인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지성이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찬 미소를 보였다.      


“못할 것도 없지요!”


지성의 말을 들은 태평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그녀는 그에게 눈을 떼지 않고 태자에게 일갈했다.

      

“명심하세요! 모후께서 평왕의 모친인 두덕비를 왜 독살하였는지.”          


 이융기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 위에 군림하려 하는 여인. 달빛에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지엄하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아래로 내려다보던 눈.          


"엄연히 이 나라에는 황상 폐하의 장자가 계시오. 삼남이 황위를 이어받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융경방 회랑을 흔들었다. 그녀가 지나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궁에도 융경방에도 어디에도 그녀의 사람들이 있었고, 세상은 그녀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나는 반드시 이 치욕을 참아낼 것이다."     


이융기는 손에 들었던 술잔을 연못을 향해 거칠게 던졌다.      


"반드시 그리하셔야지요."     


피처럼 붉은 달빛에 결의 찬 두 사내의 분노가 넘실거렸다.     

      

      



왕부로 돌아온 지성은 바로 백목당으로 향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휘는 모란이 잔뜩 피어 있는 연못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성이 들어가자 곁에 있던 홍비와 찬비가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휘는 푹 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말끔한 얼굴이었다. 그는 왠지 심술이 났다.          


"잠은 아주 잘 잔 모양이군."     


지성은 휘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미 홍비와 찬비에게 한차례 잔소리를 들은 후였다.   

       

“걱정을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참으로 든든합니다. 매화 독에도 죽지 않는 여인이 비라서 말이오!”

“타고난 것이 그러합니다.”

“길든 것이 아니오! 수도 없이 먹이고 먹여서, 그대가 절대 독으로 죽지 못하도록 말이오!”          


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척박하고 작은 영주 땅에서 신궁으로 태어난 여자아이. 무슨 이유인지 대방군 부여경은 자신을 못마땅해했다. 그저 불려 가서 온화한 얼굴로 차를 건네주면 순순히 차를 받아 마셨을 뿐이었다.      


이후에는 항상 배가 아팠고, 어머니는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그녀에게 탕을 먹였다. 부자가 든 약사발을 처음 마시던 날, 송화 부인은 밤새껏 그녀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융경방에서 태평공주를 만났소,”     


태평공주라는 말에 휘의 몸이 긴장했다.      


“어떠한 처분이든 달게 받지요.”

“처분? 지금 처분이라고 했소?”   

       

지성이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지금 조정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아시오? 당신을 묵철에게 보내려 하고 있단 말이오!”     


가고 싶지 않다. 보내지 말아 달라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하길 바랐다. 그러나 부여 휘는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을 여인이었다.     

      

“그리되었습니까?”          


휘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이 한 마디에 누르고 눌렀던 지성의 화가 터지고 말았다.      

 그는 휘를 거칠게 눕히고는 그녀의 옷자락을 사정없이 찢었다. 옷이 뜯기면서 하얗고 투명한 휘의 속살이 붉게 번져나갔다.           


그는 휘의 공허한 눈을 보는 것이 못 견디게 화가 났다.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마음. 구명줄이라 굳게 믿고 있는 여인에게서 보는 무력감과 공허함. 결국, 이 여자를 자신이 가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죄책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홍비와 찬비는 방 밖에서 불안하게 서성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표정이 판이했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찬비와 달리 홍비는 두 손을 잡았다 풀었다 반복하며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가서 마실 물을 좀 준비해 오마!”      

    

찬비에게 말을 하고는 홍비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달려간 곳은 왕부의 어선방이 아닌 무진의 거처였다. 

          

“뭐라고!”     


홍비의 말을 전해 들은 무진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시비들을 이끌고 백목당으로 향했다.        

   

“그대는 이대로 묵철에게 가고 싶은 것이오?”     


마주 보고 있는 휘와 지성, 두 사람의 눈이 가깝게 마주쳤다. 

그녀는 맑고 부드러운 지성의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투명한 그의 눈동자에 말갛고 하얀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지치고, 끝을 알 수 없는 슬픔과 욕망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두드렸다.      

무진의 불편한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녀를 지나치는 시녀들이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시비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여인이 아니었다. 타고난 귀족 영애로서 그녀의 품위는 손짓하나 발걸음 하나에도 고귀함과 품위를 드러낼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절뚝이는 다리로 화원을 지나고 회랑으로 뛰듯이 걷고 있었다. 넘어질 것 같은 그녀를 부축하는 시녀들을 뿌리쳤다. 핏줄이 드러날 만큼 창백한 뺨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백목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이 문을 열어라!”

“무진님!”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홍비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지금 무진을 달래야 하는지. 포기를 시켜야 하는지 그녀조차도 헷갈렸다. 홍비는 제 주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왕부의 주인을 사랑해왔는지 알기에 지금처럼 흐트러진 무진을 보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홍비야! 어서 빨리 이 문을 열어다오.”          


이성을 잃은 그녀가 홍비에게 애원했다. 무진은 굳게 닫힌 백목당 철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여린 손의 피부가 벗겨지며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홍비는 거의 이성을 잃은 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가씨! 제발 진정하시어요! 대인께서 아시면 슬퍼하실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전하! 전하! 제 목소리가 들리시옵니까?”           


탕! 탕!      

손바닥이 찢어지고 피가 나도록 그녀는 온 힘을 다해서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외침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백목당 주변으로 파동 치듯 울려 퍼졌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에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처연하고 슬픈 목소리가 그녀의 목구멍으로 삼켜 들어갔다. 무진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평소 그녀를 알던 시비들조차 입을 벌리고 그저 바라볼 뿐 감히 다가가 무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홍비만 그녀 옆에서 애처롭게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만하시오!”          


어느새 그녀 곁에 다가온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전하!”          


무진은 지성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사내,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람. 이 넓은 왕부에서 붙박이처럼 기다리다 보면 결국 제 것이 될 남자였다.      


혼례 날. 마차에서 내리는 휘를 보고 그녀는 예감했다.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초조했다. 이런 날이 올 것을 애써 모른 척해야 했다.     

      

“안 됩니다. 안.”          


그에게 안긴 채 무진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지성은 그녀를 안고, 그녀의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휘는 이 모든 것을 열린 문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무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성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 갈색 눈동자에 드러나는 정염, 세상사 초탈한 것 같은 아름다운 사내에게서 본 여인에 대한 욕심.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이 본능처럼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별일 아니니, 오늘은 이만 쉬시오!”          


차갑고, 어두운 눈빛, 휘는 그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무진을 안은 채 돌아서 나가는 지성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끝끝내 지성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을 확인 후 그녀도 몸을 돌렸다.          


"마마!"         


찬비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홍비와 안절부절못하는 찬비가 서 있었다.     


"죽여주십시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죄를 청했다.     


"아닙니다! 마마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자포자기한 채로 앉아 있는 홍비와 달리 찬비가 나서서 휘에게 애원했다. 자매처럼 혹은 친구처럼 서로 의지해 오던 사이였다. 찬비는 그녀가 무진의 집안에서 온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이 왕부에서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 여겼다. 조금 전까지는.           


"찬비는 나가 있거라!"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위압감. 그녀에게는 백목당 전체를 아우르는 힘이 느껴졌다. 

이 순간 그녀 주변에 있던 시비들조차 긴장감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찬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홍비를 바라보며 뒷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곽무진의 사람이었구나!”          


 처음부터 무진이 데려온 아이들이었다. 그 둘 중 하나는 그녀의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미리 생각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곳의 정취에 녹아 정신이 흐트러진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름다운 지성의 미소에 마음을 조금 놓았던 것일까.      


“소비를 죽여주시옵소서!”     


홍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여주시옵소서. 천 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그녀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알알이 흩어져 바닥을 적셨다. ‘죽여주시옵소서’ 이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이들, 그들은 죽여달라는 말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 중 진짜 죽는 이는 없었다.        

   

“유모는 어떤 사람이지?”     


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무진 아가씨께서는 태원곽씨의 유일한 적녀이옵고, 안서 도독으로 있는 곽원진 장군의 여동생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어째서 왕부의 유모로 있는 것이냐?”

“그것이…….”          


홍비는 말을 삼켰다.        

   

“전하께 어린 여동생이 한 분 계셨었습니다.”

“여동생?”     


이융기의 여동생인 옥진과 지성의 누이인 녹아는 태평공주의 손에서 자랐다. 

당시 미망인이었던 무진은 태평궁에 머물면서 녹아와 가까워졌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지성의 동생 녹아는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무진의 불편한 다리는 지성의 여동생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태평궁 작은 전각에서 사고로 불이 났습니다. 녹아 아가씨가 미처 피하질 못하셨지요. 무진 아가씨께서 녹아를 구하면서 다리가 저리 되신 것입니다.”

“그럼 녹아는….”

“다행히 불 속에서 구하긴 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고, 아가씨는 다리를 절게 되었지요.”   

  

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앞에서 타들어 가는 등불만 유심히 쏘아보았다. 

그랬던가. 그녀의 머릿속에는 거리낌 없이 그녀를 안고 나서는 지성의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잘못 끼인 듯한 불쾌함. 지금까지 그가 그녀에게 보인 모든 행동이 낯설게 보였다.     

      

“마마! 소비를 내쳐주십시오! 아가씨께서도 아무 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럴 필요 없다!”          


홍비의 말을 깨끗이 잘라낸 그녀는 멍하니 백목당으로 들어오는 월광을 보고만 있었다.      


“전하께서는….”     


주저하는 홍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왕비 마마를 마음에 두고 계십니다.”     

     

그녀의 말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휘는 그녀를 차게 내려보았다.     


“그래서?”          


홍비의 고개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결국 눈앞의 왕비에게도 온전히 그녀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서.     


“아닙니다!"

“내가 결정을 쉬 내리지 못할까 염려스러웠던 모양이구나!”     


홍비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너는 참으로 좋은 신복이다. 그런데 홍비야!”     


휘는 밤 옅게 안개가 낀 밤하늘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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