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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Oct 11. 2020

#21 드러나는 민낯(2)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휘의 가슴에 붉고 음습한 바람이 불었다.           

왕비가 아닌 왕비로 그녀는 이곳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망부석처럼 한참을 기다려도 지성은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 없는 초처럼. 

너른 들에 아무렇게나 박힌 돌처럼 

그녀는 무던해야 했다.  

    

남녀 간의 상열 지사 같은 것 따위야 원래부터 주어지지 않는 사치스러운 감정들. 

그럼에도, 지성의 눈부신 미소가 그녀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대가 원한다면 이혼장을 써 주겠소. 언제든지!’          

     

마음에 없는 말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를.        

   

그러나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안고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휘는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깨닫고야 말았다.                

한 번만.

한 번만 돌아봐 줘.          

제발.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마! 이곳을 떠나십시오.”        

  

홍비의 말에 멍하던 휘의 낯빛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결심한 듯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다. 

단단한 화강암 바닥에 금세 피가 맺혔다. 

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돌아가면 너의 주인은 이곳의 주인이 될 수 있느냐?”          

     

‘마마께서 다치실 것입니다!’       

   

홍비는 차며 말로 꺼낼 수 없었다. 

이미 배신의 죄가 큰 노비. 그런데도 그녀는 무진을 마음에서 저버릴 수 없었다.      

누구보다 제 주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갖고 싶은 것은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여인,           

겉으로 보기엔 연약하고 청아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무진의 비뚤어진 욕심을 홍비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아가씨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여인의 몸으로 성한 곳이 없는 분, 더는 갈 곳이 없으십니다.”               

휘의 눈 밑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슬프구나. 내가 들어줄 수 없는 것이라!”          

   

             



 무진의 처소에 다가갈수록 그윽한 꽃향기와 짙은 향유 냄새가 진동했다. 방 안의 물건들은 모두 값비싸고 진귀한 것들이었다. 서역에서 건너온 듯한 나무로 만든 작은 탁자와 크고 매끄러운 오색 항아리. 한 눈에도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즐비했다.         

  

빈방에 침대와 차 판과 다구茶臼가 다인 휘의 방과는 대조적이었다. 

자칫 왕비의 처소라고 착각할 만큼 무진의 방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지성은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른 무진은 눈을 떼지 않았다. 

지성이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이제 놓으십시오!”               

“싫습니다!”             

  

 이런 기회를 그녀가 놓칠 리가 없다. 

왕비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안고 처소로 온 그였다. 

조금 전까지 무너지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녀는 확신했다.      


지성은 절대로 자신을 놓을 리 없다. 그 많은 혼사가 어그러졌으니,     

왕비는 있으나 마나 한 자리다.


한때는 왕비 자리를 탐을 냈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숭국부인이 죽었다. 무진은 그때 불안한 위치에 있는 왕비보다는 죽을 때까지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어차피 그 옆에는 여인의 그림자는 없을 테니까.          

그녀가 슬퍼하면 그가 돌아봐 주었다.      

누군가에 의해 그녀가 핍박을 받으면 그는 다시 돌아봐 주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왕부에서 가장 슬프고 연약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무진은 가녀린 목을 힘겹게 들어 올려 지성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어두운 그의 눈을 보자마자 불안함이 엄습했다.     

      

‘나를 떼어 놓지 마!’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다음 말이 무엇인지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은 분명 자신을 불행하고 고독하게 만들 것 같았다.           

지성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무진은 그의 팔에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매달렸다.    

      

“부탁이 아니고, 명령입니다.”          


가녀린 무진의 어깨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떨었다. 

지성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이제 이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들 거리던 그녀의 어깨가 멈췄다. 

지성은 옷자락을 꼭 쥐고 놓지 않는 무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동안 모른 척하였습니다.”    

      

그가 등을 돌렸다. 

그녀의 손에서,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의 마음에서 그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무진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무현각!”               


지성의 한 마디에 돌처럼 굳어 있던 무진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곽 장군의 얼굴을 보아 그대의 죄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멈추십시오!”   

            

조용히 시조를 읊조리듯 천천히 지성의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      

지성은 단 한 번도 그녀를 특별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왕부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곧 그녀에게 특별함이었다.      

화영이 건방지게 굴 때도. 

위 씨 부인이 차갑고, 거친 손길에서도 

그녀를 위해 방패가 되어 주었던 것은 지성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러나.           

이대로 여기서 멈추기에는 너무 멀리 왔지 않은가.      

무진은 회랑이 떠나가라 웃었다. 

이제는 가련한 척 가면은 벗어야지.


      



휘는 말에서 내려서 명광현의 깊은 골짜기를 걷고 있었다. 

말 한 마리와 사람 하나가 간신히 걸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얼마나 가야 합니까?”          


뒤에서 지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휘는 발걸음을 멈췄다. 언제부터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따라오십니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무감하고 뭉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비께서 가는 길이니 따라가야겠지요.”          


그 말에 대꾸 없이 그녀는 고개를 획 돌려 길을 재촉했다. 

지성의 얼굴에는 어느새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는 여인이었다.      


크게 웃거나 크게 울거나 화내지 않는 사람.           

그런 그녀가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었다.     

      

“매우 바쁘신 분이 아니셨습니까”     

     

잔잔하고 고요한 여인의 목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누구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소. 요즘!”

“제가 전하뿐만 아니라 왕부 사람들까지 번잡스럽게 만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소?”             


휘는 걸음을 멈췄다. 

괜히 화가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혼장은 써드릴 수 없습니다."

"그대와 이혼할 마음도 없소."

"이제라도 생각이 바뀌시어 다행입니다."

"큰 실수를 하였지요!"

"참으로 그 마음이 가벼워 우습군요!"     

     

차가운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휘는 지금 지성의 위치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들,      

술에 절어 혼탁한 그의 눈빛이 아프고 슬펐다. 


건안성을 위해 낙양에 볼모로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와 분명 다른 사람인데,      

어째서 자신보다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에게 당신이 꼭 필요하오!’               


이융기가 건넨 말은 뜻밖이었다.        

        

"태평공주가 황상과 위후를 불러 연회를 열었지요.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             

  

곡을 연주하는 악사들이 무희들과 줄지어 연회장을 채웠지만, 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갈고 연주자가 빠져있었다. 태평공주는 지성을 돌아보았다.           


“너의 연주가 뛰어나니 한번 듣고 싶구나!”     


황제와 황후가 보는 앞이었다. 

평소라면 있는 듯 없는 듯 그의 존재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뭔가 의도가 다분히 숨겨진 행동이었지만 지성은 말없이 태평공주의 말에 응했다.      

지성의 갈고 연주가 시작되자 화려하게 치장한 한 여인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와 위후 옆에 앉았다.        

   

숭국부인, 위 자연.

위황후의 여동생이었다. 그제야 태평공주의 간계를 깨달았지만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위후는 자신의 여동생을 지성과 맺어 주고 싶어 했고, 황제는 그 자리에서 둘의 혼인을 승낙했다.  

   

“지성이 그대를 배신한 것이 아니오!”          


이융기는 힘주어 말했다. 

숭국 부인과 지성의 혼사는 그야말로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장안의 화제였고, 낙양에도 떠들썩하게 소문이 돌았다.                


‘시대가 불운하여 사내도 여인의 힘에 기대 권력을 탐하도다.’         

    

무엇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당시 휘 또한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황후의 여동생과 혼인이라니.

그녀는 자신에게 청혼하던 지성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태평공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면, 왜 그를 돕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이융기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과 자신에게 내는 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할 수 없었소!”

“그분을 아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명을 어기는 것은 곧 반역!”. 

“그럼 하나만 묻겠습니다. 이 말을 이제 와 제게 하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묻는 건가?”

“그렇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굳이 그대에게 왜 하는 것일까?”


마치 자신의 사람인 듯 그녀에게 스스럼이 없었다.      

한 번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      

황실에서도 갖은 냉대와 혹한의 겨울을 견딘 사내였다. 

그가 태평공주의 계략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아무도 믿지 않소. 다만 이용할 뿐이지. 나쁘든 좋든 간에. 선택은 자신의 몫이야.”


굳이 그녀에게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너를 이용하고 싶으니 선택은 네가 알아서 하란 말에 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으하하!”     


중저음의 맑은 웃음소리가 크게 골짜기를 흔들었다.          


“형님다운 말이오!”          


대리사에서 풀려나던 날 골목까지 쫓아와 휘에게 다시 청혼하라던 이융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과 너무나 상반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대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소?”         

 

지성은 지금까지 그녀에게 품었던 불안한 마음을 지우기로 했다. 

여인은 자신이 아는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함정인 줄 알면서도 빠지는 여인.         

독인 줄 알면서도 마시는 여인.      

이용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내 곁으로 들어온 여인.     


“저는 한낮 변방의 초라한 이름뿐인 공주일 뿐인데, 전하께 이용 가치가 있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지성의 눈썹이 휘어져 올라갔다.      

     

“그렇기에 다행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싹이 진작 잘렸을 것이오.”          


흑치 준의 죽음을 염두하고 한 말이었다. 그리고,        

  

“태원 곽 씨는 황실과 연이 없는 가문이오!”          


무진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연은 없어도 정은 있겠지요.”      

    

냉랭한 휘의 대답에 지성이 걸음을 멈췄다. 

내내 앞을 보고 걷던 그가 돌아서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휘의 맑은 눈에 명광현에서 망산으로 이어진 깊은 골짜기가 길게 이어졌다.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투명하게 담겼다.      

    

산을 뒤흔드는 소녀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산 밑까지 여자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도 군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걸음을 멈춰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의도적인 행동.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 모녀의 죽음이었다.     

어머니를 살려달라 울부짖던 어린 날의 자신의 모습이 그녀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그날의 어리고 유약했던 어린아이는 아직 그 나락에 머물러 있었다.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도 없는 그 깊은 암흑 속에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더 아름답고 단단해져서.           


“그것은 이미 그대가 다 가져가지 않았소!”          


지성이 그녀를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휘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이 사람은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이혼장 따위는 그대가 써달라 해도 이제 줄 수 없소!”          


그들이 서 있는 골짜기에 대숲의 청아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불어오는 바람에 서로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엉겨 붙었다. 

끊어지지 않는 연의 실타래처럼 엉기고 붙들며 서로의 마음을 휘감았다.       

          

   



무진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태평궁 정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마!”

“마마 도와주십시오!”     

     

무진이 태평공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무진을 보는 태평공주의 얼굴에는 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마치 또 하나의 귀찮은 일거리를 떠안은 듯 무신경했다.     

      

“이, 무슨 일입니까?”


“마마! 그 여자를 제발 제 눈앞에서 치워주십시오!”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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