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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Oct 22. 2020

#22 하늘 연못

ㅡ 신관의 춤

무진은 귀족다운 품위를 타고난 여인이었다.           


조용한 말씨,

하얗고 가녀린 얼굴과 단정한 콧날.

작지만 투명하고 맑은 눈빛,      

어디 하나 흠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품격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욕심이 많고, 사치스러운 여자였다.      

태평은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연정이 뭐라고, 당나라 모든 사내를 발아래 두어도 모자를 영애께서 이 무슨….”


외양과 전혀 다른 성격.

추하고 사악한 마음을 잘 포장을 한다면 이 세상에 곽무진, 그녀만 한 여인이 없을 것이다.


“괵왕을 버리세요! 어차피 그대에게 맞는 사내가 아닙니다.”        

       

무진의 눈에서 거짓말처럼 눈물이 사라졌다.           


“저는 싫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곳에서 견디어 왔는데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태평은 어이없어 혀를 찼다.

그의 오라비만 곽원진만 아니라면 이 골칫덩이를 자신이 끌어안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을.     


“변방에서 고생하시는 곽 장군을 생각해서라도 예서 멈추는 것이 현명할 것이오!”     

“어차피 내 몸에는 상흔이 있습니다. 왕부 외에는 어디로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대를 왕부에 두었겠지요. 아니었으면 진작 장가와 같은 취급을 받았을게요!” 

         

장가 화영. 그녀는 정말로 왕부에서 내침을 당했다.

지금 무진의 모습처럼 화영도 태평공주에게 매달리며 왕부에 머물게 해 달라 사정사정을 하다가 아비에게 끌려갔다.           


“저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무진은 얇은 입매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태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성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진의 집착은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약하고 힘없는 척은 그만두어야겠습니다!”          


공주가 앞에서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무진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공주께서 도와주십시오!’


그녀의 말에 태평이 금세 반색했다.

원래 음모나 술수, 이런 것에 흥미가 있는 여자였다.      

게다가 상대가 괵왕비라면 태평공주에게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었으니까.           


“제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녀의 오라비, 그 꼿꼿한 인간만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융기를 끌어내리는데 더없이 좋은 일이다.                    

이융기, 자신의 조카만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무측천이 세상을 떠난 후, 천하에는 오직 태평공주만이 있을 뿐이었다.     

예종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기에 그녀의 권세는 이미 황제의 머리 위에 있었다.


진국 태평공주.           

그녀는 뇌물을 좋아하고 부와 재물을 탈취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의 땅은 근교의 비옥한 땅에 고루 퍼져 있었고,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이 황궁을 능가했다.     


예종은 부와 권모술수가 넘치는 누이를 매우 존중(?)하여 국가의 큰 정사를 언제나 그녀와 상의했다. 그러나 그녀의 조카, 이융기가 태자 옹립에 거론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황궁에는 그를 태자를 옹립하려는 세력과 태평공주를 따르는 세력들로 나누어졌다.

그녀는 이융기의 재능과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태자 책봉을 못마땅해했다.        


“폐하!”

“왔느냐!”

“요즘 소문들이 하도 흉흉하여 폐하와 상의를 드리고자 합니다!”          

장안의 태극전, 태평공주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 공주께서 예까지 올 때는 중요한 일이겠지요?”        

  

누이동생을 바라보는 예종의 눈빛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융기에 대한 소문입니다.”

“평왕에 대한 소문이라?”

“그러하옵니다.”

“으흠!”          


예종은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태평은 오라비인 예종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똑똑하고 지혜로우나 황제로서 그에게는 권력욕이 없었다.      

     

“송 왕 성기는 폐하의 원자이옵고, 빈 왕은 고종의 장손이옵니다. 삼남이 원자의 자리를 넘보는 격이니 어찌 민심이 평탄하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          


만연에 웃음을 띤 태평공주는 예종을 향하여 고개 숙여 큰절하며 제 뜻을 내비쳤다.

그녀의 화려한 머리 장식이 장중하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처럼 파르르 떨었다.        


“그럼 공주의 뜻은 평 왕이 태자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인가?”     


“고모로서 융기의 됨됨이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황실에 엄연히 법도가 있으니 훗날을 위해 다시 생각하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예종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콜록! 콜록! 연달아 나오는 헛기침을 속으로 눌렀다.    

      

“영월아!”          


이 영월, 태평공주의 이름이었다.         


“너는 융기가 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얼굴에 만연히 미소를 띠던 공주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막아 본 적이 없는 황제였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문제가 아닙니다, 오라버니!”

“이제 짐에게는 남은 형제라고는 너 하나뿐이다.”     

     

그녀에게 예종은 보기 드물게 유순한 사람이었다.      

영월아! 이름을 부르며 항상 푸근하게 받아주던 오라버니였다.      

황제의 자리가 사람을 바꾸는 것일까.


“세간에는 이런 말들도 떠돈다는구나!”

“......”

“태평공주와 평 왕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으니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쿠르르 쿵. 검은 구름이 몰려온 대명궁에 깊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여름을 지난가을 초입에 들어선 망산의 숲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대숲이 맑은 소리를 내며 깊은 향기를 품어내는 그 길을 말 두 필과 남녀 한 쌍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 것이오?”     

“멋대로 따라오셨으니 알려드리지 않겠습니다.”         

 

지성은 왕부를 나서는 그녀의 뒤를 말없이 따라다녔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행동.

차라리 꾸짖거나 나무랐으면 이보다 덜 미안했을까.

그는 묵묵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함께 걸으며 그는 거리를 조금씩 좁혔다.       

   

“내가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휘의 걸음이 멈췄다.           


“금좌 광록대부! 그대의 조부가 계시는 곳이겠지요?”          


그녀는 설핏 미소 지었다.

명광현은 왕들의 무덤, 북망산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걸음은 북쪽이 아닌 다른 갈림길로 들어섰다.      


“왕의 무덤은 망산의 북쪽이 아니오?”        

  

지성이 머뭇거리며 반문했다.     


“백제 대왕의 무덤은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멸망 제국 백제,     

의자왕은 온조대왕이 세운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나라가 멸하고 그는 태자 효와 왕자 융, 그리고 백성 일만 이천여 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되어왔다.      


그는 고종과 측천무후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해야 했다.

고종은 선심 쓰듯 광록대부 위위경이라는 벼슬을 내렸지만,

의자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는 것으로 그의 슬픈 생을 마감했다.                

의자왕은 망산에 묻히길 거부했다.                


‘무덤에는 비석도 세우지 말고, 자그마한 봉분으로 족하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며, 찾지도 말지어다.’               

이곳 명광현에는 백제에서 함께 건너온 유민들이 묻혀 있는 곳에 그의 무덤이 있었다.

그러나 휘가 들어선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지 않은 습지.           


“그대는 아오?”          


지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그분의 손녀입니다. 모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숲은 점점 더 깊어지고, 오래된 고목들이 해를 가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작고 야트막한 봉분이 한대 무리를 지어 있었다.      

휘는 자리에서 멈췄다.           


말에서 무언가를 꺼낸 그녀는 향을 피우고, 잔에 술을 채웠다.      

봉분을 돌아다니며 한 걸음 한 걸음 돌기 시작했다.     

 

마치 춤을 추듯이 느린 걸음, 두 손은 높이 뻗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관의 춤사위가 시작됐다. 

그녀는 한 손에 청동거울을 한 손에는 방울이 달린 부채를 높이 쳐들었다.      

햇빛에 반사된 거울이 수풀 이곳저곳을 비추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낡고 훼손된 봉분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왕의 무덤이 있었다.     


따라랑.      

맑은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람 소리에 맞추어 부채에 달린 방울이 영롱하게 흔들렸다.

한 발 한 발 느릿하고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 연못’


그들은 이곳을 하늘 연못이라 불렀다.           

명광현 깊은 골짜기에 작게 솟은 동산에는 자연적으로 솟아난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초록의 커다란 연잎과 깨끗한 수련이 가득 메운 하늘 연못, 

          

휘는 그곳을 천천히 거닐었다.     

손에 쥔 청동거울을 높이 들었다.     

다른 손에는 부채를 들고 위로하듯 기도하듯 이름 없는 작은 봉분들 사이를 걸었다.

순식간에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하얀 안개구름이 피어났다.     

          

바람 따라서 오셨느뇨.

마음 따라서 가버렸나.

바람길 하늘 지나,

마음길 숨결 지나,

사비로,    

그리운 고향으로


편안히 가소서.        

   

지성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남국의 언어.

주문을 외우듯 부드러운 음성은 잠든 영혼을 위로했다.               

바람을 부르고, 구름을 일으키고, 숲 속에서 떠돌다 잠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춤.   

그녀는 마지막 발걸음을 멈춘 곳에 연꽃을 놓았다.      

   

누구도 다녀간 흔적이 없는 이름 없는 무덤.     

잡초와 풀이 우거져 그 모양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봉분이었다.

그녀는 공손하고 예를 다해 큰절을 올렸다.

지성이 조심스럽게 그녀 옆에 다가갔다.      

    

“대백제의 마지막 국왕이십니다.”          


마지막 왕의 무덤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지에 따라 그의 무덤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이름이 없는 풀이 자라고, 봉분의 형태는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억울하게 끌려와 묻힌 유민들과 함께하길 바랐다.      

이제는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잠들어 있는 곳,      

그 한가운데에 흰 수련만 가득 피어 있었다.     




경운 원년, 7월 27일               

드디어 평왕 이융기는 태자 자리에 올랐다.     

정변이 일어난 지 꼭 한 달만이었고, 황제가 즉위한 지 삼일 만이었다.

생각지 못한 황제의 결단에 조정이 들썩였다.            

   

“태자는 폐하의 적장자가 아닙니다.”           

     

태평공주는 계속해서 태자를 물고 늘어졌다.          


“황실의 장남이 태자가 되지 아니하면, 훗날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태평공주 편에 서 있던 관료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위황후에 의해 내 처졌던 중종의 장남인 초왕 이 중복. 잊힌 황족.       

   

“지금의 태자가 공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태자 자리에 오르는 것은 마땅치 않다.”     


사실 그는 이부시랑 장음과 함께 낙양에서 군사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위후는 이융기에 의해 이미 주살된 후였다.

그때까지 아무도 초왕에 대해 언급한 이가 없었다.      





낙수를 따라 흐르는 골짜기에 두 남녀가 다정했다.

명광현 대장간 마을에 머문 지 열흘이 다 되도록 휘는 떠날 생각이 없었고, 지성은 묵묵히 그녀 옆을 지켰다.          

“이대로 변방으로 함께 떠나지 않겠소?”          


지성의 뜻밖의 제안에 휘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지금 많이 바쁘실 때가 아닙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주변에서 멀어지는 것이 지금의 회오리에서 멀어지는 길입니다.”    

 

휘는 아까부터 자신들을 지켜보는 이가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불편한 시선이 자꾸 대숲으로 향했다.

지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영주를 다녀올까 하오!”          


영주! 지성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       

   

“함께 유람이나 떠날까 하는데 어떻소?.”         

      

난데없이 유람이라니.

태자가 된 이융기와 태평공주 간의 기싸움이 본격화되고 있을 때였다.      

이 와중에 그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는 그냥 바람을 쐬러 나왔다고 했지만,

지성이 그녀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면 왕부로 돌아가는 길이 편안치는 않았을 터.

앞으로 왕부로 들어올 후궁들을 생각해서도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다짐하고 있었다.     


“다시 왕부로 돌아오시오!”     


그녀가 사라질까 두려웠다.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어차피 돌아가야 하는 곳. 그것만은 변함없는 현실이었다.

지성은 마음을 놓았다.           


“다시 돌아올 때는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 생각해주시니 감읍하옵니다.”      

    

휘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환하게 웃음 짓던 지성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이곳까지 숨어 들어왔으나 어떻게 도망하려 하십니까?”      

    

지성이 숲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하자, 대나무가 크게 휘어지며 칼을 든 한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무장한 사내였으나 헝클어진 머리며, 초라한 행색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일전에 장소를 통해 분명 경고를 드렸습니다.”

“흥! 내가 이곳에서 너를 죽일 수만 있다면. 낙양에서 다시 도모해 볼 수 있겠지.”

“초왕께서 그냥 잠자코 계셨으면 좋은 세월을 더 사셨을 것을 어찌 이리 명을 재촉하십니까?”

“내가 먼저였다.”          


초왕이라 불리는 사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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