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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Oct 24. 2020

#23 초왕의 죽음

파리하게 굳어버린 남자의 낯빛은 산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창백했다.          

 

“누가 먼저인 것이 그리 중요합니까?”          


지성은 일부러 초왕을 보지 않고 반문했다.      

휘는 칼을 겨누고 험한 말이 오가는 사이에서도 서로의 눈빛은 사납지 않음을 알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여자는 내 손에 죽었어야 했어. 감히 임치왕 따위가 나서서 내 일을 그르친 거란 말이다!"


억울함과 원한이 뒤섞인 울부짖음.

결국 지성은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초왕은 독살당한 중종의 장남이었다. 위후는 당시 중종 비였던 공황후 조 씨를 밀어내기 위해 측천무후를 부추겼다. 이중복의 외조모는 고종의 외손녀였던 상락 공주. 그의 외가가 측천무후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면서 공황후도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초왕만큼 위황후와 측천무후를 죽이고 싶어 하는 이가 그 하나만 있을까.  

   

“너 같은 놈도 살아 있지 않으냐. 흥! 그 잘난 상판으로 더러운 것들과 함께 놀아난 너도!”     


칼을 든 이중복이 지성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칼을 쥔 손을 올리기도 전에 무언가 날아와 그의 손을 잡아챘다.

휘의 손에서 나간 채찍이었다.     

쨍그랑! 칼은 바위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중복은 빼앗긴 칼을 그저 멀뚱하니 보고만 있었다.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바위에 처박힌 칼을 마치 제 얼굴을 보는 것처럼 애처로웠다. 애초에 공격의 의지도 담겨 있지 않은 무의미한 초식.    

       

 “초왕께서 도모를 하셨어도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을 겁니다.”     


지성은 타이르듯 이중복을 설득하려 했다.

그는 초왕의 됨됨이를 알고 있었다.      

당륭정변으로 이융기는 가장 먼저 이중복을 복원시켰다.


그러나 이융기가 태자 책봉에 거론되자, 잊혀진 황족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잡초처럼 일어났다. 그중 이중복이라는 사람은 선하고 연약했던 인물. 연약한 황족은 그들의 이용감이 되기 충분했다.      

그런 그가 정변을 뒤집을 만한 배포가 있기는 했을까.      


"때와 시기가 맞지 않으니 그 뜻이 전하께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          


지성의 건조한 말에 이중복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째서 그 뜻이라는 것이 융기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이냐?”     

     

이중복은 세차게 흘러가는 낙수를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초왕 이중복의 어머니인 공황후 조 씨는 이융기의 생모인 덕비 두 씨와 함께 측천무후에게 독살을 당했다.      

한날한시에 어머니를 잃었던 사이.      

서로를 안타깝게 여기는 존재들.           

 외가가 모두 사라지고, 유약한 아비만 있는 그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초왕에 비하면 이융기는 좀 나은 편이었다. 자식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인 예종이 있었으므로.           

 계모인 위 씨에게도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 이중복은 낙양에서 가족들과 유폐 생활을 하던 이융기와 달리 변방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가야 했다.     

      

당륭정변으로 위 씨 일당이 죽고 나서야 신원이 복원되어 낙양으로 돌아왔지만, 이 유약한 황족에게는 남은 것은 역적의 굴레였다.           


“어째서! 나는 복수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냐!”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창백한 얼굴에 귀신처럼 풀어헤친 머리를 하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성은 골짜기를 따라 산을 오르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숲을 내려와 왕부로 들어가는 다리에 들어설 때까지 지성과 휘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어째서 잡지 않으셨습니까? 그대로 두면…….”       

   

그녀의 눈에 그는 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망산을 오르고 있었다. 사방에 붙은 그의 얼굴이 그려진 벽보만 보더라도 어차피 반역의 죄가 있으니 참형은 면치 못할 터였다.     

     

”마지막 그의 선택마저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      

    

휘보다 앞서 걷던 지성이 발걸음을 멈췄다.  

        

"초왕 전하도 태자 전하도 서로 마주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요."

“그럼, 당신은 괜찮은가요?”

“그래서 이렇게 도망치고 있지 않습니까?”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들, 죽는 것보다 못한 비참한 상황에 내몰렸던 그들에게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끈끈함이 있었다.


지성을 향해 내내 보내던 뜨겁고, 애환이 담긴 시선, 마지막까지 내몰린 그가 그 골짜기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해서.      


초왕과 태자, 지성 이 세 사람은 눈앞에서 어미가 죽는 모습을 지켜본 이들이었다.      

같은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이 다시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하는 현실,         

  

“도망치고 싶을 뿐이오.”     


지성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탄식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 앞에서 어미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는 일들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었다. 황궁은 그게 너무 당연한 곳이었다.    

         

그녀는 앞서 걷는 지성의 뒤를 쫓아 나란히 발을 맞췄다.

휘는 그제야 저한테 유람 얘기를 꺼냈던 이유를 알았다.     


“영주에는 언제 가십니까?”

“오늘! 먼저 들를 곳이 있습니다!”     


지성은 휘를 데리고 낙양 서시西市의 작은 여관으로 데려갔다.

이미 그곳에는 왕부에서 가져온 마치와 함께 장소와 찬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두릅시다. 부지런히 출발해야 오늘 밤에 함곡관에 도착하오.”     


그는 정말 한시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서둘렀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망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뒤, 서시西市의 좁은 수로를 말 한 필과 마차 한 대가 빠르게 질주해 낙양을 벗어났다.

해가 저물고 붉은 노을이 낙양의 남대로를 붉게 물들 무렵이었다.

그 때,

낙수의 남쪽 배수로에 한 구의 시신이 떠내려가는 것을 강어귀 사공이 발견했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와 편안하게 감은 눈,      

시신은 고요하게 낙수와 함께 황궁 앞으로 흘러갔다.

초왕 이중복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함곡관은 낙양의 서쪽에 있는 관문으로 장안과 낙양을 잇는 중요한 군사적 요새였다.      

드넓은 평지 위에 가파르게 우뚝 솟은 산과 좁은 협곡으로 유명했다. 낙양과 장안을 잇는 유일한 통로.           

마차는 험준한 산길을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깊은 밤. 달이 마치의 머리 위를 지나고 있을 때쯤,

함곡관 입구인 삼문협을 통과하자 마차가 멈춰 섰다.          

장소는 역참에서 새 말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너희는 천천히 아침에 마차와 함께 들어오너라!”     


누군가의 미행을 피하기 위한 눈속임. 말에 오른 지성은 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지성의 손을 받아들였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도 모르는 길로 갈 것이오.”     


'아무도 모르는 길'

지성이 홀로 다니는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산새가 이렇게 험하니 모두가 아는 길이라 해도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산을 오르는 것이라면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는 그녀지만.      

그들을 태운 말이 사라질 때까지 장소와 찬비는 그 자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리 두 분이 다정하시니”     


찬비는 괜스레 나오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콕콕 찍어 누르며 옆으로 곁눈질을 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말에 동의해 줄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우리도 빨리 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에서 초야를 보내실 수도 있는데…. 어서 가서 준비해야….”     


 어두운 밤, 찬비는 어느새 아무도 없는 골목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히 누군가 있었는데. 그새 장소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을 한 번 휘 돌아보고는 눈물을 지우며 투덜댔다.


오늘따라 홍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 터라 그녀는 속이 상했다.      


“망할 년! 지 없이 나 혼자 어찌하라고!”          


그녀는 홍비를 생각하면 절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왕부에 들어와서 이렇게 편안하고 화목한 것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함께 기뻐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친동기처럼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찬비는 가늘게 몸을 떨며 돌아서자 골목의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래, 그들이 어디로 향하더냐!”     


태평궁, 무진과 태평공주 앞에 검은 무복은 입은 사내가 부복하고 있었다.      


“삼문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삼문협이라고?”     


태평공주와 무진이 동시에 소리쳤다.

수도방위의 최전선인 삼문협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부 허락된 거상들과 각 주에서 오는 연락병들만 오 갈 수 있는 곳,

지금 그곳으로 지성이 휘를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     


“전하의 호위 하나와 시녀 하나가 따라갔습니다.”  

   

말을 마친 사람이 나가자 태평공주는 크게 한숨을 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도 아마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겁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함곡관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입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지성의 작은 별채가 있어요.”     


오랫동안 왕부에서 지냈던 무진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곳.

그러나 그 여인을 들어갈 수 있는 곳. 무진의 심장이 날카로운 통증으로 욱신거렸다.     


“일단 그곳으로 갔으니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태평공주의 말에 무진은 질투로 온몸이 타버릴 것 같았다.

태평은 가만히 무진의 손을 잡아 주었다.      

황실이 아닌 귀족의 영애.      


황제를 두고 여인들끼리 목숨을 걸고 싸우는 황실을 모르는 여인이었다. 제 욕심만 알고 제 감정에만 충실한 여인. 마치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해 안달하는 어린애와 다를 바가 없었다.      

태평은 딱한 얼굴로 앉아 있는 무진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여인은 독으로도 죽일 수 없는 독한 여자요. 그대 상대가 아니지!’        

  

자신을 보며 차갑게 냉소 짓던 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입가에 묻은 피를 아무렇지 않게 닦던 여인이었다.


분명 일반 여인들과 달랐다. 태평공주는 그녀가  궁금해졌다.  보고, 또 보고, 다시 보다 보면 분명히 드러날 여린 구석 하나쯤은 있겠지.      

당나라 사방에 그녀의 눈이 있으니,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 일터.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태평공주도 한 걸음 물러서게 할 만큼 위압적인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었다.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불길함이었다.      


그녀가 태어나 여제가 가장 아끼는 존재로, 두 황제의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으로 조정에는 제 사람들로 채웠다.  그런데 저 여인을 만나고부터였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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