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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Nov 11. 2020

#31 부서진 향로

- 향로의 비밀 -

사타무의라 불렸던 자, 예현, 

여율재를 찾아온 그의 손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 들려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가!”

“이곳이라면 이 칼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하여….”       

   

예현은 미소 지었다. 날이 선 칼을 능숙하게 돌려 그녀에게 내밀었다. 칼은 나무처럼 가벼웠다. 범상치 않은 날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진짜 칼인지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칼의 손잡이는 우아한 봉황의 꼬리가 감싸듯 새겨져 있었다. 칼을 받는 여율재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이것은!”

“영노께서 향로의 거푸집으로 만드신 대검입니다!”          


그녀의 가슴에 한기가 스쳤다.           


“향로는 대방군왕의 명으로 영노께서 저와 함께 만든 물건이지요.”

“그것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네만!”     


그녀의 말투에 쌀쌀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는 예현을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더는 보기 싫으니 어서 나가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하나 모르시는 것이 있습니다. 향로를 만드는 진짜 이유 말입니다.”     


그의 말에 여율재가 돌아섰다.      




예현은 영노를 따라 건안성에서 처음으로 대방군왕을 마주했던 날.      


“흥! 그리 보고 싶지 않은 상판이구나.”

“군왕께서는 소인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처음에 그는 당황했다. 마치 자신을 아는 것처럼, 꼭 원수를 눈앞에 보듯이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그것을 묻는 자신이 우스울 정도였다. 그 정도로 제 얼굴이 누군가 닮아 있었으니.      


“흥! 네가 명광현의 장주라고? 영노가 미친 건가 아니면 네가 능력이 뛰어난 것이냐?”


사타무의의 질문을 싹 무시한 채 부여경은 비아냥거렸다. 


“군왕께서는 제 능력을 과소평가하시나이까?”     


어렸고, 패기가 넘치던 때였다. 그는 군왕이 자신을 낮고 작게 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어디 명광현에서 향로를 만들어 보려무나!”     


명광현은 낙양성의 부속 기관,      

기술이 있는 유민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황제 명이 없이 무엇인가 만든다는 것은 큰 제약이 따랐다. 사사로운 것도 금기인데. 그것도 대방군을 위한 향로를 만든다? 


당시 돌궐이 당의 기미주에서 벗어나 독립을 했다. 

그런 시기에 그런 물건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영주땅에서 대조영이 일어나 나라를 만들려고 하던 때, 전쟁이 나든 말든, 백성이 굶어 죽든 말든, 제 안위에만 신경 쓰는 군왕이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저를 지킬 방편 하나쯤은 만들어 놓고 싶었다.      


“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원하는 것은 모두 주지!”     


예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도대체 자신을 무엇을 말할 줄 알고?

그는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지금의 대방군왕은 미쳤거나 대책이 없는 인간이 분명하다.      


“대신! 조건이 있지.”

“무엇입니까?”     


부여경은 보따리 하나를 그 앞에 던져 넣었다.      


“이것을 태워 영노가 만드는 거푸집에 넣거라!”     


보따리 속에는 어린 여자아이의 비단옷이 들어있었다. 그는 원래 신물이니. 영물이니 이따위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순순히 부여 경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낙수에 타는 듯한 노을을 등에 지고 거대한 노를 당기는 여인의 모습은 그가 태어나서 본 가장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기에. 혹여 이 여인에게 해가 되는 일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거푸집이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영노가 죽었다. 


거푸집으로 만든 향로. 


그 안에는 분명 영노의 피와 혼이 담겨 있다.      


‘어렵겠지만 부디, 향로를 없애다오!’     


여울재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이제야 그녀가 골몰하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가 왜 자신의 거푸집으로 검을 만든 이유. 그런데 문제는 이 검으로 저 향로를 쪼갤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딱 한 분이 계십니다!”     


예현의 확신에 찬 미소로 대답했다.      




잠든 얼굴로 누워있는 휘를 보는 지성의 표정은 참담했다.    

  

“어째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오?”     


황태의는 내내 침상을 지키는 지성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에 열중이었다.      


“전에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떤 독에도 듣지 않는 몸이시니. 거꾸로 말하면 약이 듣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거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언제나 건방질 정도로 확신에 찬 대답만 해 왔던 그였다. 

그는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이네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더니 가져온 책을 뒤적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약이 듣지 않으니 일단 독부터 풀어내야겠습니다.”   

  

말을 끝낸 황태의는 다시 돌아서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헌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말하시오!”

“분명 약이 듣지 않는데 몸은 회복하고 계시옵니다.”

“그럼 문제가 뭐요?”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황태의는 솔직하게 자시의 고민을 지성에게 토로했다.      


“몸은 좋아지는 데 깨어나지 않는다?”

“그러합니다. 그냥 지금 그냥 잠들어 계시니, 소인도 기다릴밖에요.”

“그렇다면 독은?”

“어차피 풀어내야 합니다. 나중에 아기씨를 가지려면!”

“그 말은 죽지 않는다는 소리요?”     


황태의는 다시 지성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다시 두 번은 말하기 싫은 듯 오만상을 찡그렸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치료하는 사람이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도술은 부리지 못합니다. 전하!”    

 

지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어째서 깨어나지 않으시는 건지….”     


태의 또한 안타까워했다. 제 인생에 독으로 중독되지 않는 사람들을 몇 봐왔으나 그녀는 특별했다. 부자탕을 마시는 여인, 부자는 나라에 큰 죄인을 죽일 때 쓰는 사약으로 쓰이는 독이었다. 그것을 먹고도 이렇게 멀쩡한 사람은 그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      


‘전하의 비께서는 독으로 죽을 일은 없으시겠지요!'     


그는 일부러 뒤의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식을 갖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지금 그가 그녀에게 주는 처방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 아니었다.      


부자의 독을 푸는 처방.     


그런데 그 약이 잘 듣지를 않았다. 독이 이미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몸에 퍼진 걸까?

그녀가 이렇게 누워있을 때, 태의는 그녀의 몸을 제대로 살필 작정이었다. 혼자서 열정적으로 무언가 생각하다 책을 뒤적이다 끄적이는 그를 두고 지성은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지성의 눈앞에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이가 서 있었으니.     


“네 놈이 또 여긴 무슨 일이지?’

“허! 이런, 그렇게 죽일 것처럼 노려보지 마십시오! 전하!”     


자신의 검을 잡은 지성의 손이 흔들렸다.

한 때 사타무의라고 불렸던 자의 찬란한 빛의 귀걸이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생각해보니 내내 저 귀걸이가 눈에 거슬렸다. 묘하게 기분이 나쁜 저 미소도 싫었다. 


"공주마마를 살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네 놈의 입에서 들을 소리 같지는 않구나!"

"전하!"

"꺼져!"     


가뜩이나 창백해진 그의 얼굴, 황하를 담은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어둡고 쓸쓸했다.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지성을 보며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직감했다.      


"대신관을 찾아가십시오. 그럼 공주마마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남긴 예현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태자께서 하루빨리 황위를 이으실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감히! 네 놈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물론 그러하옵지요. 허나, 늦으면 나중에는 모든 걸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너에 무엇을 믿고?"     


지성이 천천히 다가와 그의 목에 검을 드리웠다. 

예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동안 뒷방에만 앉아 있던 태평공주가 스스로 정치에 나서기로 했으니까요."     


금방이라도 그를 벨 것 같았던 그의 칼이 머뭇거렸다.      


"누가 무엇을 한다고?"     


측천무후와 위황후를 겪으며 황제와 조정은 공주의 정치간섭을 극도로 꺼렸다.

태평공주 또한 스스로 나설 필요가 없었지만, 황제인 오라비와 척을 지는 것을 그녀 또한 원하지 않았기에 공주의 조정 간섭은 가시화되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나선다면. 당륭정변같은 피바람이 다시 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서 대신관을 찾으십시오!"


말을 마친 예현은 제 목에 겨눠있던 지성의 칼에서 재빨리 벗어났다. 


"꺼져라! 다시는 그 상판을 보이지 않는 게 네 신상에 이로울 테니!"


뒷걸음치던 예현의 얼굴에 쓴 회한의 미소가 걸렸다. 


"저를 죽이고자 하는 이들이 이리 많으니, 필경 저는 오래 살 듯합니다.'     




"이제부터 태자를 끌어내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시오."     


태평은 정전의 상석에 자리해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과거 여황제를 떠올리게 할 만큼 위압적이고 우아했다. 그녀 앞에 고개를 숙인 사내들은 감히 얼굴을 들어 태평공주를 올려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단 태자궁 호위들과 격구를 한판 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누군가 나서서 호기롭게 말을 꺼냈다.

격구를 통해 먼저 기선제압을 하다는 뜻일 터. 태평의 낯은 별 반응 없이 시큰둥했다. 

당시 격구가 성행이었으니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참으로 터무니없구려."     


그때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자가 느릿하게 정전의 문을 열고 등장했다.     


"공주마마를 뵈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의 등장에 태평공주가 반색했다.     


"어서 오세요! 익주에서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태평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정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 노구는 마마께서 오라 하시면 소인! 지옥 불에서라도 뛰쳐나올 것입니다!"

"호호호! 아무렴 제가 지옥에 계시는 분을 부르겠습니까?"     


태평공주 앞에서 몸을 낮추며 아첨을 하는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이 쏠렸다.      


"그럼 고명하신 대인의 의견을 묻겠소!"     


격구 이야기를 했다가 망신을 당한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 앞에서 굽신거리던 그는 말을 꺼낸 이가 가소롭다는 듯이 턱을 들어 그를 내려보았다.      


"격구 시합이라니! 그런 것은 어린애도 생각하지 않을 거요!"

"뭐요?"

"생각해보시게! 황제 앞에서 벌이는 시합을 그 앞에서 대놓고 이기면 태자와 폐하의 입장이 뭐가 되겠나? 그것은 상대를 오히려 자극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네! 그리고!"     


두 회정은 좌중을 주도하는 제 말재간이 썩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거만하게 주변을 한 번 쓸어 보더니 길고 하얀 제 턱수염을 부드럽게 쓸었다. 


"격구로 태자를 꺾겠다는 그 말 자체가 되지도 않을 일."     


이융기의 무리들. 즉 지성을 포함한 이들은 선황제 때부터 격구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때문에 선황인 중종은 당시 임치왕이었던 이융기와 지성을 사냥 시합 때나 격구 시합 때는 빼놓지 않고 데리고 다녔다.     

 

“그럼! 두 대인의 의견을 한번 말해보시지요!”     


태평공주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리자 두 회정을 둘러싼 어수선한 분위기가 단번에 정리됐다.      


"태자 이융기는 활발하고 호방한 면이 있지만, 술과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합니다."

"오호! 그래서요?     


태평공주가 그의 말에 관심을 드러냈다.      


"태자의 신분임에도 기녀들과 어울려 노래와 춤을 일삼으니 이 어찌 문란하다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두 대인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제 무릎을 탁! 하고 치며 태평공주가 반색하자 주변에서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사내는 술과 여인 때문에 망하는 법이지요. 이를 폐하께 간해야겠습니다!"     


태평공주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음날부터 장안과 낙양의 거리에는 태자를 비방하는 벽보가 붙기 시작했다.      

'태자는 방탕하여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아니하니, 나라에 변란이 끊이질 않는다. 이는 오로지 사람의 부덕함이니 태자를 폐하는 것이 마땅하다!'     


변란이 일어나고 민심은 사나워지고 있을 때였다. 

때 없이 붙는 벽보에 온 장안이 술렁이자 황제도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다. 

     

"태자는 어디 있는가?"


황제는 태자의 스승인 위안석을 불러들였다.      


"아직 건안성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으흠!“     


그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눈을 감았다.      


"경이 보기에도 태자가 방탕한가?"


갑작스러운 황제의 물음에 위안석은 정갈하게 무릎을 꿇어 두 손을 가슴에 대고 공수했다.     

 

"폐하! 어찌 사사로이 유언비어처럼 떠도는 말을 믿사옵니까? 그것은 진정 나라를 망치는 길이옵니다!"  

   

위안석의 말에 황제의 표정이 좀 누그러졌다.      


"지금 이 나라에 그런 비어를 퍼트릴 이는 오로지 태평공주 한 분뿐이옵니다. 태자께서 사직에 공로를 세우고, 어질고 밝고, 효성스러운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 온데, 부디 그런 비어에 의혹되지 마소서!"     

"내가 경의 말을 잘 새겨듣겠네. 여봐라! 태자를 속히 불러들여라!"     


황제는 그의 말이 몹시 흡족했다. 가슴 한켠에 자리하던 의심 한 자락도 싹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만연하게 미소 짓는 예종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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