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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Nov 09. 2020

#30 영노의 검

- 잘못된 신탁 -

그리고,  무천이 죽었다.      

한때 제 사부였고, 보호자였으며, 유일한 친구였던 사람. 

날아오는 화살을 온몸으로 받은 그의 시체는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채 눈도 감지 못했다.      

그의 눈을 쓸어내리는 휘의 손은 무거웠다.      


슬픔은 나중으로 미루자. 눈물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흘릴 수 있으니, 무섭게 자신을 누르는 슬픔을 애써 지우려 노력했다. 지금은 당장 밀려드는 적을 맞이해야 한다.           

백습의 족장이 죽자, 그 자리를 금세 거란과 해족이 대신 채우고 있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 여기서 내가 죽고 모두가 죽으면 이 지옥 같은 피비린내가 끝날 것인가! 휘는 무천이 쥐고 있던 검을 대신 들었다.      


 성문은 곧 뚫릴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휘가 칼을 들고 그 앞에 서자, 그녀를 중심으로 정예병들이 모여들었다. 부서지듯 성문이 열리고, 도끼와 창을 든 거란족과 해족의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앞에서 칼을 들고 있는 그녀를 보고 멈칫한 이도 있었고. 음흉한 미소를 띠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그녀 앞에서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뚜벅! 뚜벅! 한 마리의 말이 천천히 길을 열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인영은 비치는 햇살에 가려 마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고 그의 얼굴이 선명해지자 휘의 눈이 점점 커졌다.


묵철.           

올려 묶은 머리가 하얗게 셌을 뿐 그는 분명 묵철이었다.           


“이여! 오랜만이구려 공주!”       

   

그는 멀리서부터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날, 금전사 대웅전 지붕 위에서 저에게 똑바로 활을 쏘아 날리던 어린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첫눈에 갖고 싶어 했던 여인의 모습. 지금의 부여 휘는 그날 제 어미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미를 아주 쏙 빼닮았구나!”     


회한에 잠긴 듯 자신을 보는 그의 눈길에 그녀가 든 검이 서슬 퍼런 날을 세우며 올라갔다.    

 

“네 놈이 여기 왜 있는 것이냐!”

“나? 글쎄? 누군가의 마지막을 꼭 보고 싶어서지!”     


무천의 죽음이 떠오르자 홍수는 허리에서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 든 제 물건을 보자 묵철의 얼굴이 금방 퍼렇게 돌변했다.           


“그래! 내가 오늘 내 물건을 꼭 되찾아 가겠다!”

“어디 한 번 가져가 보시든가!”         

 

휘의 비웃음 섞인 말에 그와 군사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꼭 생포해라!”     


그녀 주변으로 금세 돌궐과 거란의 군사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마치 갈대가 쓰러지듯 군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남아 있는 정예병들도 그녀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휘는 지성을 떠올렸다.

왜 하필 이 순간에 그가 떠올랐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나는 결국 그를 마음에 두었을까’          


그녀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제 앞에 높이 쳐든 칼을 피할 새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 칼을 쳐들던 거란군은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와아아아!          

온 산을 집어삼킬 것 같은 함성이 산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당의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검은 말을 탄 붉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와 그녀의 사이가 좁혀지고 있었다.           

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저를 향해 오는 말굽 소리만 느릿하게 들려올 뿐. 순간 뒤에서 날카로운 것에 베이는 느낌과 그녀의 정신이 아찔하게 멀어져 갔다. 말을 달려오는 사내의 눈이 커지고 뭔가 자신을 향해 크게 고함치는 것이 보였다.          


그를 향해 달려가고 싶다!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겨 모든 게 힘들었노라 목놓아 울고 싶다!

왜 이렇듯 절박한 상황에서 저 남자는 나타나는 것일까.      


내가 건안성의 공주가 아니고, 저이가 무서운 칼날 위에 서 있는 황족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편안하게, 서로를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을 텐데.           

휘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주변의 함성이 귓전에서 멀어졌다. 

말에서 떨어지다시피 내린 남자가 저를 향해 뛰어오는 것을 보며 그녀의 의식은 짙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탁자가 사납게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 앞에 있던 평복 차림의 사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어찌할 줄 몰랐다. 포주의 가장 화려한 전각에서 태평공주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일이 틀어졌다고?”

“저. 그것이…….”

“제대로 말을 해!”          


묵철과 혼인 동맹을 약속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건안성의 공주. 태평은 넌지시 그에게 그녀의 위치를 알렸다. 그녀가 죽던, 묵철에게 잡히던 둘 중 하나! 비록 황명으로 포주에 안치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변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정적이 되어 버린 조카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민족 공주를 한꺼번에 처리할 기회였기에 어느 때보다도 그녀의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실패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곽장군과 영주자사 이지성이 그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하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태자의 좌우림군이 모두 합세했다 하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자가 움직였다. 우림군을 내어준다는 것은 황제가 승인했다는 이야기. 

태평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번 일로 태자는 한 층 더 힘을 받게 되었다. 황제가 저를 포주에 갖다 놓은 이유가 이제야 명확히 보였다.     


“그리고, 곽장군은 태복경으로 임명되었사옵니다!”

“하!”          


태평공주는 기어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태복경, 사사롭게는 황제의 어가를 관리하는 직책이지만 이는 황제를 가장 측근에서 호위하는 위치다.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      

     

곽원진과 지성이 좌 우림 군을 끌고 갔다는 것은 그만큼 황제가 이번 일에 태자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 천하의 태평을. 나를 포주에 묶어두고 하고 했던 일이 이런 것이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어린애 장난 같은 권모술수가 아닌 진짜 정치를 해야 할 때. 

태평공주는 자신의 세력을 모아 붕당을 만들어 조정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익주에 있는 두회정을 부르라!”          


두회정, 조정 제일의 추남이었고, 괵왕 지성과 함께 위황후에 의해 강제 혼인을 했던 위인이었다. 위황후는 지성에게는 과부였던 자신의 동생을. 두회정에게는 제 늙은 유모를 짝으로 지어주었다. 그리고 당륭정변으로 지성이 부인이었던 숭국부인을 죽이는 것을 보고, 그 또한 제 아내를 죽여 목숨을 부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때 도움을 주었던 이가 태평공주였기에. 이후부터 그는 사사건건 오로지 태평공주의 사람임을 자처했다. 


한바탕 치른 전쟁은 건안성에 엄청난 상흔을 남기고 빠져나갔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고, 공주 또한 중상을 입고 중태에 빠진 상황이었다. 그녀의 처소로 마련된 성안의 자리를 마다하고, 그는 휘를 데리고 그녀가 어린 시절 어미와 머물던 금전산으로 들어갔다.     

      

작고 소박하지만, 운치 있는 아름다운 기와집.     

휘의 부상 소식에 이융기는 대명궁 태의를 직접 보내왔다. 코가 빨갛고 행동이 더딘 태의는 말없이 그녀를 치료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살 수 있겠지?”     

     

죽는다는 말이 나오면 가만히 있지 않을 사람처럼 지성은 낮게 으르렁댔다.           


“그리 노려보지 마십시오! 저는 상처를 치료하는 사람이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은 아니니!”

“뭐라!”          


날카롭게 지르는 지성의 외침에 태자와 곽원진이 뛰어 들어왔다. 

한 달간 눈을 감고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는 휘를 보는 지성의 모습은 처참했다. 먹지 못해 빠진 살과 시커먼 어둠이 그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 주변을 사신처럼 떠돌고 있었다.    

  

“태의는 아무 말 말고 치료에 전념하게!”     


이융기는 말을 마치자마자 원진과 함께 지성을 끌고 나왔다. 황태의는 지성이 소리를 지르건, 태자가 무슨 말을 하든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눈앞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여인.           


“네가 이런다고 누워있는 사람이 일어난다더냐! 태의를 믿고 기다려봐!”     


이융기의 말에 문 앞에서 지성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제가 너무 늦은 것입니다!”          


지성이 눈물을 터트렸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보여 본 적이 없는 눈물, 

어미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죽은 아비를 찬 땅에 묻을 때도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는 사내였다. 이융기는 그때 사력을 다해 말을 타고 달려가는 그를 붙잡았다.      


그를 붙잡아 데리고 간 곳은 함곡관. 

그곳에는 뜻밖에도 황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해족과 백습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그들을 막아라!”

“그래봤자 떠도는 유민들입니다”     


황제의 말에 이융기가 반문했다. 그들은 그냥 노략질을 일삼는 작은 부족들이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 중앙군이 개입하는 것은 지나치다 여겼다.      


“거란과 돌궐이 합세한다면 이는 노략질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건안성이 함락되면 영주를 포함한 화북지방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거기다 이미 영주는 반절이나 돌궐에게 빼앗기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번엔 돌궐의 목적은 영주가 아니다. 건안성이지!”       

   

건안성이라는 말에 지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건안성에는 그녀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 그녀의 숙부가 있었다. 영노가 직접 찾아와 저에게 했던 말.           


“공주님은 절대로 건안성에 돌아오셔서는 안 됩니다!”     


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의 목숨이 위태롭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 혼자 움직이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좌 우림 군을 함께 내어주마. 안서 도호 대장 곽원진이 도울 것이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군을 꾸려야 하는 일이었다. 


“당분간 영월이 포주에 있을 것이니 서둘러라.” 


황제 이단은 마지막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뜨며 이융기에게 시선을 맞췄다.


“태자의 자리는 스스로 지키는 것이다. 아비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니.”         

 

이융기와 지성은 서둘러 군사들과 건안성으로 달려갔다. 

도착한 성주변은 처참했다. 칼이 없는 이들은 맨손으로 성을 지키기 위해 항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터 한가운데서 보게 된 믿을 수 없는 장면.      


푸른 검기를 든 여인이 전장터 한복판에서 위태롭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꼿꼿하고 대쪽 같았던 여인이 눈앞에서 서서히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있었다.

그는 제 심장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달려가는 그 순간까지 제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숨이 막혔다.     


죽음에 절대로 지지 않을 것 같았던 여인이었다.

지금껏 죽음과 싸우며 살아왔기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피 흘리는 전쟁터에서도 저에게 미소를 날릴 것 같았던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눈앞에서 쓰러지고 있었다.      


그의 세상이 무너저 내렸다. 마치 이곳에서 제 백성들과 함께 사라지려는 것처럼 그녀가 저에게서 멀리 달아나려는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서!     


백제!      

북방의 춥고 거친 황무지를 그들은 열심히 경작하여 비옥한 토지로 만들어 냈다. 번번이 침략해오는 돌궐을 막아내며, 변방의 최전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당을 위해 싸운 것도 아니요. 제 잇속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마지막으로 그들이 일구어 온 땅, 그리고 사람들.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칼을 맞고 쓰러진 그녀의 모습은 처참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피와 살이 엉겨 옷은 더러워져 있었고, 그녀의 손에 들린 칼은 내내 퍼런 살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지성은 제 갑옷을 벗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누구도 그녀를 보지 못하게 제품에 꼭 안고 일어섰다.     

 



여율재는 제 앞에 놓인 향로를 안타깝게 보고 있었다. 

점점 사그라드는 연기.           


‘대신관 제가 본 것은 기러기가 아니라 분명 까마귀였습니다!’          


휘의 말이 내내 그녀 마음에 걸려 있었다. 신탁이 잘못되었다. 


‘어려운지는 알고 있다만 향로 연기를 멈춰다오!’          


영노의 말은 끝까지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처럼 그녀를 골몰하게 했다. 

무엇일까? 그때 누군가 그녀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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