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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Nov 06. 2020

#29 꺼지지않는 연기

- 건안성 전투 -

큰 북은 산에 메아리를 만들며 웅장하게 울렸다. 거대한 산맥을 병풍처럼 싸고 있기에 소리의 울림은 크고 강한 파동을 만들었다. 제단 위에 올라선 휘는 천천히 북소리에 맞춰 천천히 돌았다.     

 

동, 서. 남. 북, 사방으로 만들어진 계단과 그 위에 올라선 신녀. 

하늘과 땅, 그 사이를 잇는 곳에서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둥! 둥! 둥! 둥!     


북은 그녀의 발에 맞춰 조금씩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밑에 모인 무녀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신단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북소리가 빨라지고 무녀들은 손을 높이 들어 빙글빙글 돌며 제단 주위를 에워쌌다. 


때로는 다른 방향으로 또는 같은 방향으로 손을 높이 들어, 몸을 뒤로 젖히자 금전산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하나의 꽃잎이 벌어지며 사방에 빛을 쏟아내는 것처럼 신비롭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온전히 하늘과 태양에게 보내는 경배!     


빛을 중심으로 구름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멀리서 날아오는 한 무리의 까마귀 떼.      

구름이 모이고 다섯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제단을 향해 날아들었다.       

    

“까마귀다!”     


누군가 외치자 금전산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부산스러웠다.     


“난데없이 까마귀라니?”

“길조인거여? 흉조인거여?”          


술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여율재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검은 까마귀.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습격이다!”

“백습이 습격했다!”     


군사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요동의 남쪽에 모여 살던 백습이 거란과 함께 당을 급습해왔다. 

마지막 방어선인 건안성이 뚫리면 화북지방 일대가 그들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

금전산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아이들이 우는 소리와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보이지 않았다. 

          

“공주님, 어서 피하십시오!”

“무천! 무천은 어디 있습니까?”     


대신관 여율재의 말에 휘는 재빨리 제단을 내려오며 무천을 찾았다.

이미 그가 이끄는 오백의 정예부대는 성벽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백습의 무리와 대치 중이었다.        

   

“건안성이 내게 길을 열어 준다면 내 조용히 지나가지!”          


족장인 듯한 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가는 길에 말과 식량, 여자까지 주면 더 좋고 말이야!”

“으하하!”          


족장 옆에 있던 사내의 말에 무리 사이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얗게 새버린 무천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갔다.           


“뭘 믿고, 예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내가 있는 한 이곳에 한 발짝도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성 위에서 울려 퍼졌다.           


“아! 그대가 무천인가 보군!”

“나를 아는가?”

“요동 땅에서 그대를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남자의 말에 무천의 입꼬리가 빈정대듯 치켜 올라갔다. 하얀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서늘한 입김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백습의 족장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이거 매우 영광이군. 그런데 어찌 홀로 오셨나?”          


무천의 말에 족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빛이 변했다.           


“무어라?”          


무천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백습의 대 족장께서는 고막해와 한 울타리를 끼고 살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소?”     

“뭐라고? 저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지금 네놈이 우리 부족을 무시하는 것이냐?”          


족장 옆에 있는 사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악을 써댔다.

돌궐의 묵철이 조용한 지금. 요동의 남쪽에서는 거란과 백습, 해족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그 안에서 그들 나름의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니, 무천이 그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왜? 건안성이라도 치면 그대들의 입지가 조금 달라지나?”      

    

무천은 흑치상지도 인정하는 노련한 무장이자 전략가였다. 

그 때문에 돌궐의 묵철 조차도 그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걸 꺼렸는데. 그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흥! 무엇을 믿고 저리 까부는지 모르지만, 우리를 예전의 백습으로 본다면 큰 코다칠 것이다!”     


무천에게 바락바락 대들던 사내는 아예 성 앞까지 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백습이 혼자 싸웠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어딘가, 고막해가 생쥐처럼 숨어들었겠군!”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백습의 무리가 술렁였다. 

정말 빤히 보이는 전술. 그들이 아무리 북방의 날고 기는 유목민족이라 해도, 실제로 그들 스스로 큰 전투를 치러 본적은 전무했다.           


무천의 말대로 고막해는 게릴라 전술에 뛰어난 부족. 

그러나 그들도 옛 흑치상지의 정예군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절대로 꿈도 꾸지 않았을 일.     


그나마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 곁에 거란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 거란은 요동의 남북으로 흩어져 있는 백습과 고막해를 포함해 크고 작은 부족들의 통합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무리 건안성에 뛰어난 정예병이 있다 한들, 거란의 대군을 막을 수나 있을까!”       

   

건안성의 가장 취약점은 조정의 무관심이었다. 그들이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음에도 조정에서는 그 사실조차 모를 때가 많은 것. 그 때문에 대군이 몰려온다면. 그들 스스로 성을 지키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으하하!”          


무천의 웃음소리가 산성 주변을 꽉 채우듯이 울려 퍼졌다. 

   

“어디 나를 한 번 넘어 보시게들!”          


자신만만한 무장의 울림에 백습의 군사들이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가 느끼고 있는 기분이란 낭패, 거란이 함께 왔다면? 

당의 중앙군이 온다 해도 그들과 싸움에서는 승패를 단언하기가 어려웠다.     

      

“제일 가까운 곳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느새 무장한 예현이 그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도움?”     


무천의 눈빛에서 살기 뿜어져 나왔다. 예현은 무천의 눈길을 피했다. 

그의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기운으로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은 지난번 돌궐군과 다릅니다!”

“그래서?”

“대조영, 그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괜한 짓을 했군.”          


자신의 말을 간단하게 무시하는 무천을 예현은 잠깐 원망 섞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그리 저를 미워하십니까?”

“싫은데도 이유가 있느냐? 그 귀걸이! 나머지 한쪽은 어디에 있지?”          


무천의 말에 예현은 입을 닫았다.           


“할애비는 왕을 팔아 그 귀걸이를 받더니, 그 손자는 그 귀걸이를 받쳐 무엇을 얻었는가?”

“저는…….”

“예 총관이 그 귀걸이를 어떤 마음으로 받았는지 네 놈이 알기나 하느냐?”      

    

예현의 얼굴이 굳었다. 이 귀걸이는 역적의 증거, 나라를 팔고, 왕을 판 대가로 얻은 패물.     


“왕께서는 스스로 잡히신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을 호위했던 그에게 군왕이 준 마지막 하사품이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스스로 역적의 굴레를 쓴 총관이 마지막까지 한 일을 네놈은 모를 것이다! 그래서 난 네 놈이 필요 없다!”  

   

예 현의 얼굴은 충격으로 하얗게 질렸다. 

장안에서 소문난 명문가, 그러나 왕을 잡은 역적의 집안. 그러나 그 안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었다.      


“네깟 놈이 무슨 수로 명광현의 장주가 될 수 있었단 말이냐!”          


자신을 명광현에 들인 것은 영노였다. 그리고 구진천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낙양에서 순식간에 높아졌고, 이 모든 것은 집안을 벗어나 제가 스스로 일구어낸 것이라 자랑스럽게 여겨 왔다.           

그런데….          


“네 아비가 영노에게 너를 부탁할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          


충격과 경악으로 예 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조영은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힘을 잃은 예현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너는 나만큼이나 그들을 모르는구나! 발해? 그들은 뼛속까지 고구려인들이야! 절대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없어. 말갈족과 손을 잡아도 절대로 우리를 돕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것!”     


무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하는 함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양의 화살들이 성안으로 날아들었다.           


“모두 방패!”          


칼을 뽑아 든 무천의 말에 천사백여 명의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날카롭게 벼리 된 칼날 같은 화살들이 성벽과 성안 쪽 기둥 이곳저곳에 박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함성! 채 정비하고 공격을 준비하기도 전에 거란군과 고막해가 한꺼번에 성 쪽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게릴라가 아닌 전면전이었다.           

         



“공주께서는 어서 이곳을 피하십시오!”     


서둘러 무장을 하는 휘를 따라 들어온 여율재는 계속해서 그녀를 말렸다. 

대신관이 아무리 그녀에게 애원해도 그녀는 요지부동 제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신탁은 틀렸습니다! 대신관!”

“예?”     


무장을 마친 휘가 돌아섰다. 

영문을 모르는 여율재를 지나치며 그녀가 바람처럼 속삭이며 지나갔다.          

 

“오늘 내가 본 것은 기러기가 아니라 까마귀였습니다.”           


문을 열고 나기는 그녀를 붙잡지 못하는 여율재의 손이 허공에 머물렀다.      

신탁이 잘못될 리가 없다.           


“분명, 기러기였는데…….”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달려간 성벽은 불타오르고 있었고. 곳곳에서 신음과 다친 병사들로 아수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 구석에서 자신의 머리를 틀어쥐고, 웅크리고 있는 예현을 발견했다.      


“황노가 있는 곳을 말하라!”          


그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휘는 얼이 빠져 있는 예현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렸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한 예현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비실비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신음을 냈다. 

       

“황노! 어딨느냐?”

“공주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 어서 도망가십시오! 성문이 곧 열릴 것입니다.”

“글쎄! 어딨냐니까?”          


휘는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에 그의 황노가 놓여있었다. 

성 위에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바닥에 마치 고장난 수레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얼이 빠져 있는 그를 내팽개치고, 사력을 다해 활 수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성 밖을 노려보았다. 보이지 않는 적장을 향한 단 한 번의 기회!      

서서히 그녀가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성벽을 오르는 적을 아무리 베어내도 그들은 끝없이 밀려들어 왔다. 

무천은 제 피인지 적의 피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온몸에 피 칠갑하고, 야차처럼 달려드는 적을 베어냈다. 베고 베어, 칼이 무뎌질 만도 하건만 그의 칼은 더욱더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이겠지요!”

“영노께서 무슨 그리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대장군께 그동안 이놈, 저놈, 무례도 참 많이 저질렀습니다.”         

 

제 칼을 닦던 무천의 손이 멈췄다. 

심상치 않은 영노의 말!

무천의 앞에 방금 만든 것 같은 장검은 서슬퍼런 빛을 발광했다.     


“제가 대장군께 드리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이것은…….”

“내 힘을 모두 모아 만든 것이니, 필요하실 겁니다. 쓰일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영노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제 손에 든 검은 절대 무뎌지지 않을 영노의 신검. 마지막으로 이 검과 함께 여기서 죽을 수만 있다면.           


‘무장이 편안하게 침상에서 죽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것은 없느니라!’          


흑치상지가 늘 내뱉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옥사했다. 그의 아들은 독살을 당했으니. 

어쩌면 저만 전장에서 죽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백전노장! 쉼 없이 적의 목을 베어내는 그를 향해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피를 뒤집어쓴 그가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그의 하늘에서 붉은 비가 흘러내렸다.      


쉬이이이!           

큰 함성을 잠재울 만큼 엄청난 쇳소리가 울리자 성 밖의 말을 탄 군사들이 혼비백산했다. 

성안 쪽에서 날아드는 거대한 화살이 곧게 하늘 위로 솟구쳤다. 

곧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화살은 정확하게 백습 군대의 정 중앙을 관통했다.      

순간 서로를 향하던 칼끝이 멈추고 전쟁이 끝난 것 같은 적막이 흘렀다.           


“적장이 죽었다!”


우와아! 함성이 건안성에서 쏟아졌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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