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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Nov 04. 2020

#28 영승제

- 이름없는 제천행사 -

무릎을 꿇은 예현의 미소가 의미심장했다.      


"나를 부른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소인이 불렀지요!"     


분명 건안성에 대한 내용은 태자를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돈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공주마마! 권력의 뒤에는 돈을 대주는 이들이 있고, 더러운 짓을 대신할 사람들이 필요한 법이지요! 그런 면에서 태평공주는 태자보다는 그나마 순수한 쪽일까요?"     


칼을 잡은 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예현이 팔짱을 끼고 가늘고 거만한 눈초리를 그녀에게 보냈다.      


"대부분의 위정자들은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녀는 예욉니다! 제가 그녀를 높이 생각하는 것도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서 태평공주의 정부가 되었느냐!"     


휘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예 현이 그녀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큰 키의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그는 거침없이 다가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너무 놀라 손에 들었던 검을 떨어뜨렸다. 이내 그녀의 몸이 반사적으로 그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대의 숙부는 반드시 그대를 죽이려 할 것이오!"

"그래서?"

" 사람들을 이끌고 같이 가 주십시오. 북쪽의 말갈이 이제 곧 고구려를 도와 나라를 세울 테니 말입니다!"    


아! 그거였다. 예 현, 그가 하려는 일.      


"역적의 자식이니 그에 걸맞게 살아야겠다는 뜻이 그런 것인가!"

"역시 영명하십니다!"

"그것이 나를 부른 이유란 말이지?"     


휘는 떨어뜨린 칼을 다시 집어 들었다. 억눌렸던 마음이 뜨거운 용암처럼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부여경의 섬찟한 미소가 죽어가던 영노의 긴 한숨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말을 잘해야 할 것이다. 내가 오늘 너를 진짜 죽일 수도 있으니!”     


예현은 내민 칼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사뭇 다름을 느꼈다. 태자 이융기 앞에서도 심지어 태평공주 앞에서도 떨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예현은 다시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와 볼모가 되어 함께 가주시면 됩니다.”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이미 그녀의 어떤 말들도 그의 마음에 닿지 않는 듯했다. 잠시 멈칫했던 그녀의 칼이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한때는 믿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영노가 아끼는 사람이니, 태평공주의 간자 노릇을 한다고 해도 참을 수 있겠다 싶었지!"     


엎드린 예현의 뒷머리가 서늘했다.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칼끝이 제 코앞에 있었다.   

   

"제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는 얘기!"     


휘는 예현의 얼굴 쪽으로 고개는 내렸다.      


"당나라도 곧 망할 겁니다!"

"그래서?"

"지금의 태자에게 일말의 희망이 보이겠지만 그는 절대 황위를 잇지 못할 겁니다." 

    

예현은 확신했다. 태평공주가 있는 한 이융기는 황위를 물려받기 어려울 거라고, 

이 세상에서 돈으로 못 살 것은 없다. 


그것이 예현의 지론이다. 그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이가 이융기였고, 가장 잘 드러나는 사람이 태평공주다. 돈은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것!      


 지금까지 이 나라는 고조 이연을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은 모두 유약하고 무능했다. 

고종이 이렇듯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이유도 훗날 여제에 오르는 황후의 덕. 태평공주의 세력은 이융기가 태자가 된 이후에도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건재했다.      


측천무후가 죽고 지금까지 내내 흔들리는 당나라 조정을 보면서 예현은 지금이 기회임을 직감했다. 백제가 다시 일어설 기회, 북쪽으로 향하는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해동성국을 건설하는 일.      


"어리석구나!"     


휘는 허탈하게 칼을 내렸다. 

지금까지 그를 과대평가해 왔던 것인지도. 

지금의 북방이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안동도호부를 함락한 돌궐의 묵철과 영주를 포함해 화북지방 곳곳에 퍼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거기에 말갈이 합세하면서 남쪽의 거란과 유목민족으로 떠돌던 습족에게까지 독립의 움직임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일촉즉발의 혼란스러운 상황,      

이와 중에도 조정은 갓 즉위한 황제와 막 책봉된 태자, 그리고 그 자리를 위협하는 태평공주의 세력들로 삼분 오열 정치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어째서 두고만 보십니까?"


태평공주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세찬 비를 뚫고 정전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재상들 중 절반 이상이 나의 사람이거늘." 


태평궁 사저에 모인 대신들은 그저 묵묵히 태평공주의 말을 들을 뿐, 

누구 하나 나서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더 필요한 게요?"   


돈이라면 황실의 내탕금보다도 그녀의 재산이 많을 터였다.      

거기다 자신은 태자의 고모이자 황제의 하나뿐인 누이동생. 그녀의 말에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태평공주는 답답했다.      

아무리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조정에 제 사람들로 하여금 폐태자를 논의해도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굳은 결심이 생긴 듯했다. 


제일 좋지 않은 상황. 그녀는 황제인 오라비와 싸우고픈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지난번 직접 그 일을 논의한 일로 황제는 그녀를 포주에 근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일로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다.      


“지금 변방이 어지러우니 잠시 숨을 고르시는 것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중년의 중신이 말을 꺼냈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거요?”     


태평공주는 그를 향해 비웃음이 섞인 조소를 날렸다. 


“변방이 어지러운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요! 그대들의 무능을 내 탓을 하면 되겠습니까?”  

   

태평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부병의 문제라든지 도호의 문제가 그녀의 말처럼 지금 벌어진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만 황제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음을 매번 일깨울 뿐이었다.      


“송구하오나 마마!”     


사위인 당진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지금 변방이 심상치 않습니다!"

"전쟁이라도 난다는 뜻이오?"

"거란과 해족이 움직일 듯합니다!"     


곧 변방에 큰 변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당진의 생각에 자칫 큰 전쟁을 치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 폐태자를 거론하는 것은 옳은 방법 같지는 않아 보였다. 중신들을 향해 마구 화를 내던 그녀도 사위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앞으로 아주 작은 것도 놓치지 말고 고하라!"     


태평공주는 태자에 대한 감시망을 더욱 촘촘히 짜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태자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피붙이처럼 아끼는 지성도 감옥에 가두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도무지 조카의 꿍꿍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왕부에서 무진을 내쫓기 위한 수, 그런데 왜 괵왕비를 파하자마자 건안성으로 돌려보냈을까. 

뭔가 지나치게 조용하고 순순히 일이 풀렸다. 

기분 나쁠 정도로.      


"마마 소인 들었사옵니다!“     


늦은 밤, 홀로 차를 마시는 태평의 방에 은밀하게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흑의에 검은 복면을 쓴 여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 동태가 어떠하더냐!"    

 

태평은 마시던 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금 건안성이 몹시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그래?”

“공주는?”

“현재는 아무헌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사옵니다.”

     

태평공주는 미소 지었다.     

묵철은 끊임없이 조정에 혼인 동맹을 요구해왔다. 당은 그들과 전쟁을 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이미 대조영은 진국의 이름을 바꾸고 발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고, 당은 영주땅 일부를 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당은 영주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어머니 측천무후 때처럼 설인귀나 흑치상지 같은 명장이 없다는 것이 한이었다.      


마지막 요서의 경계, 건안성을 두고 당과 돌궐, 발해의 신경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때에 건안성에 공주를 순순히 보낸 의도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절대 지성이 허락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건안성의 공주가 낙양에 볼모로 있는 한은 건안성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터였는데.     


"나는 실컷 구경이나 해야겠다! 너는 공주의 주변에서 눈을 떼지 말거라!"

"예! 마마!"

  

자리를 벗어나는 검은 복면의 여인은 재빠르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찬비야!"     


내내 고개를 돌리지 않던 태평공주가 복면인의 이름을 불렀다. 

총총히 걸음을 옮기던 복면인의 발걸음이 멈췄다.  

    

"네 가족들은 아주 잘 살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따스한 음성이지만 소름 끼치게 맑은 쇳소리. 태평의 음성은 칼처럼 날카로워 그녀의 가슴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 칼에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저는 공주마마를 믿습니다.”     


말을 마친 여인은 다시 재빠르게 몸을 놀려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곧 거란과 해족이 움직일 것입니다!'

당진의 말을 떠올리며 태평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곧 재미난 일이 벌어질 터인데. 자신이 포주로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 어디 우리 조카님 능력을 시험해 볼까?"     


어차피 발해의 건국은 막지 못할 것이고, 거란과 돌궐의 침입은 쉬지 않을 것이었다. 

만에 이번 일이 잘못되어 영주와 건안성이 그들 수중에 들어간다면? 


그때 가서 폐태자 논의를 해도 늦지는 않을 일이다. 

그녀에게는 돈과 시간이 넉넉했다.      

거기에다 볼거리까지. 말 그대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모든 것이 지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금전산 정상에 제단을 쌓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크기별로 정사각형의 평평한 돌계단을 만들고, 정상에 대리석으로 만든 선단을 만들어 향로를 올릴 자리를 만들었다.      


이제 곧 열릴 영승제.      

매해, 이때마다 돌궐의 침입을 받아 왔지만, 올해 제단을 쌓는 인부들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웃음이 만연했다.      

“돌궐과 곧 화친을 맺는다지?”

“진즉 그리했어야지! 어디 살겠는가 말이야!”

“거기다 올해는 대신관이 아닌 공주께서 직접 제를 올린다고 하니, 기대가 크구먼!”

“태어날 때, 대신관의 신탁을 받으신 분이 아니신가!”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도 유독 한 사람만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 자네도 한 마디 혀봐!”     


그러자 키가 크고 좀 마른 듯한 사내가 시끄럽게 떠드는 사내들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지금 웃음들이 나오는 거여? 영노어른이 돌아가신 마당에 참 팔자들도 좋당께?”     


영노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왁자지껄 웃음꽃을 피우던 사내들의 입이 단번에 일자로 닫혔다.      


“그리고 나는 그 묵철인지 뭐시깽인지 영 믿음이 안 간단 말이지. 원래 일을 저지르던 놈이 갑자기 딴짓을 하면 그건 무조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여! 뭘 알고나 지껄이드라고!”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인부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아무 말 없이 다시 제단을 쌓는 일에 열중했다.      




둥! 둥! 둥!

영승제를 알리는 북소리가 금전산 자락에 울려 퍼졌다. 제단에는 추수한 곡식들과 사냥한 동물들이 쌓였다. 하얀 대리석 선단 위에는 거대한 금빛 향로가 위용을 떨치듯 자리했고, 주변은 하얀 수련이 제단을 감싸듯 놓여있었다.   마치 구름을 타고 봉황이 날갯짓하는 것처럼 향로에서는 약하게나마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스로 향을 피우는 향로.      


영노는 피어오르는 연기를 멈추기 위해 스스로 거푸집을 없앴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를 약화시켰을 뿐,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윽고 신물이라 불리는 향로 앞에 휘가 섰다.     

 

머리는 진주가 알알이 박힌 두건을 쓰고, 소매가 긴 하얀 옷을 입은 그녀의 목에는 청동으로 만든 거울을 걸고, 금사로 꼬인 여러 겹의 줄이 가늘고 유연한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여율재는 처음에 그녀를 말렸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 앞에 서게 됐을 때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 했다. 

그러나 휘는 말리는 그녀의 말에 딱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신탁이 그러하다면 제가 어디 선들 안전하겠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든 피하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녀는 수련을 집어 들었다. 태양의 꽃이라 불리는 흰 수련. 


해가 고개를 돌리듯 그녀를 향했다. 그 빛을 받아 그녀의 목에 걸린 청동거울이 반짝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삽시간에 제단 주변으로 검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북쪽에서 검은 무리가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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