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한뭉치 Jul 25. 2022

그 언덕 동네에서 우리는

스물세 살 때쯤이었나. 친하게 지내던 언니 D가 말했다. “엄마 아빠 이혼한 거 말하고 다니지 마. 사람들이 얕잡아 봐.” 엄마와 아빠가 헤어진 건 여덟 살 때 일이었고, 내 삶과 가족의 일상에 대해 말하는 건 주저해 본 적이 없었다. 언니의 진심 어린 걱정이 낯설기도, 불편하기도, 한편 고맙기도 했다. 그때까지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 모부의 이혼이 책 잡힐 일인 건가? 아빠의 부재가 서럽고 허기진 적은 있어도, 부끄럽다거나 약점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내가 유년시기를 보낸 달동네 공부방은 모부의 이혼 따위가 나에게 꼬리표로 붙지 않는 공동체였다. 이혼가정은 으레 그렇듯 한둘도 아니었고, 가난이든, 폭력이든, 방임이든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지지고 볶는 사연 하나 없는 친구가 가끔 부럽기도 했지만 (글쎄, 과연 그랬을까), 그런 부러움은 별다른 노력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진짜 소화하기 어려웠던 마음은 억울함이었다. 내가 자란 동네에서 차별과 불평등은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야말로 공기처럼 존재했다.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 날숨에는 서러움과 억울함이 섞여 나왔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공부를 못해서, 엄마가 학교에 한 번을 찾질 않아서, 반에 햄버거 한 번 돌린 적이 없어서, 숙제를 안 해가서, 아빠가 장애인이라서, 급식비가 밀려서. 준비물을 안 챙겨가서 손바닥을 맞고 교실 뒤에 서서 벌을 받던 날, 나는 이를 간다는 게 뭔지도 모른 채 이를 갈았다. 손바닥은 아프지도 않았다. 엄마가 새벽에 우유 배달을 나가면 동생은 울다 지쳐 잠들고, 나는 동생이 어질러 놓은 물건 더미 사이에 누워 동트기를 기다리던 나날이었다. 내가 등교할 때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엄마의 얼굴에는 고됨만이 드리웠다. 숙제라던가, 준비물이라던가 그런 걸 일상의 주제로 삼기엔 우리 각자의 삶이 이미 너무 고단했다.


어느 날은 공부방이 늦게 끝나 친구들과 함께 집에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우리가 거슬렸던 걸까. 어떤 아저씨가 길 가는 우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우리 중 제일 체구가 작은 친구의 뺨을 갈겼다. 우리가 조금 더 컸다면, 우리가 조금 더 변변한 옷을 입고 있었다면, 아니, 이 가난한 동네에 사는 어린이가 아니었다면, 그래도 그 아저씨는 우리를 때릴 수 있었을까. 수학여행으로 갔었던 경주에서 우리가 귀엽다는 듯 말을 걸던 아주머니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을 때, ‘서울 봉천동에서 왔어요’ 하니 얼굴색을 싹 바꾸며 ‘저리 가서 놀아라’라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  


씨발. 존나 빡쳐.” 우리는 쌍욕을 입에 달고 살던 초등학생들이었다.  말이 가장 쉬웠으니까. 둘러앉아 숙제를 하면서 “, 존나 하기 싫어”, 말뚝박기를 하면서 “ 니가 먼저 반칙했잖아 씨바알-!”, 학교에서 맞은 얘기를 하면서 “미친, 개짜증나”. 쌤들한테 매번 혼이 나도 욕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욕을 잘하는 만큼 울기도  울었다.  명이 울면 같이 울었다. A 아빠가 장애인이라며 멸시당했을 , 아빠의 폭력을 견디던 B 가출했을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샘이 열렸고 결국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서도 욕은 멈추지 않았다. “으허엉. 존나 빡쳐.” 비좁은 공부방에서 부대끼는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주눅 듦, 화남, 억울함을 단박에 감지할  있는 능력을 키웠다. 말없이도 이해할  있었다. 열받지. 나도 그래. 울고 털자 씨발.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배가 고팠다. 공부방에서는 뭐든 다 맛있었다. 누가 더 많이 먹나 경쟁하듯 간식을 먹어치웠고, 간신히 숙제를 끝내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타거나 같이 돌림노래를 불렀다. 공부방을 찾는 자원교사쌤들은 수학, 영어, 글쓰기 수업을 준비해서 왔지만, 우리는 쌤들 손을 이끌고 놀러 나가기 바빴다. 쌤들 중 많은 수는 공부방에서 가장 가까운 S대 재학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다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우리는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란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신 같이 밥을 먹고 수다를 떨 뿐이었다. 가난하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는 말 따위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놀라운 일이라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우리는 이제 30대가 되었다. 우리 중 몇 명은 사회운동을 하고, 누군가는 광고회사에서 일하고, 누군가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한다. 우리 중 누구도 부자가 된 사람은 없다. 여전히 화가 많고, 여전히 눈물이 많다. 공부방에서 보낸 시간 동안, 우리는 서럽고 고단한 삶을 윤이 나게 닦아 아껴주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삶을 아끼는 방법을 알게 되자, 그 삶을 누군가가 침범하거나 무시할 때 발끈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직장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아내폭력을 겪거나, 성폭력을 당했을 때 앞 뒤 재지 않고 들이받을 수 있었던 건 공부방에서 쌓은 배짱 덕분이었다. 우리는 가끔 시위에 같이 나가고, 단체를 후원하고, 새로운 공동체에 속해 새로운 연결을 만들며 또 다른 누군가의 배짱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D 언니의 충고를 들었던 20대의 어느 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언니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더 말하고, 더 울어야 한다고. 그리고 같이 우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그래야만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게 가난과 모부의 이혼 따위가 아닌, 우리를 약자로 만들어버리는 세상이 된다고. 그래서, 언니의 이야기는 무어냐고 묻고 싶다.


공부방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우리는 ‘범생이’가 아니라 눈에 독기 가득 품은 ‘싸움꾼’들이 되었지만, 어쩐지 그 편이 훨씬 편하고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