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천재 호소인’

자기풍자와 나르시시즘에 대하여

by Salon de Madame Saw

왜 어떤 사람은 꽤 수준 있는 결과물을 내놓아도 “천재 호소인”이라 불릴까?


두 작품이 있다고 하자. 겉으로 보기에 둘 다 비슷한 수준의 완성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하나를 볼 때는 왠지 모를 불쾌감, 심지어 역겨움까지 느낀다. 결과물 자체는 거의 같은 것으로 봐도 무방한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아마 이찬혁과 지올팍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이찬혁이 SBS ‘인기가요’에서 신곡 ‘파노라마’를 부르며 선보인 삭발 퍼포먼스.


먼저 이찬혁의 무대를 보자. 관객이 농담조로 “찬혁이 하고 싶은 거 그만 해”라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를 희화화하고, 과장하고, 망가뜨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대는 완성도가 높아 관객을 즐겁게 만든다.


지올팍의 ‘Christian’ 뮤비 속 한 장면.


그럼 지올팍의 무대는 어떨까? 그의 작품 역시 곡, 연출, 의상, 메이크업까지 완성도를 놓고 보면 꽤 수준급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면 수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기분, 그러니까 겉으로는 망가지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과거 대중음악의 틀을 벗어나 ‘예술’이라 불리던 클리셰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찝찝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보는 이에게는 오글거림이 남는다.


이 둘의 차이는 뭘까? 전자의 과감함이 자기풍자라면, 후자의 그것은 나르시시즘이다. 이찬혁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건 자기 비하와 유머일 것이다. 반면 지올팍은 어쩐지 “나는 천재야”를 외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관객이 작품을 보면서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작품에서 작가의 나르시시즘이 읽힐 때다.


그럼 왜 우리는 작가의 자기만족적 행위에 불쾌감을 느낄까?

작가가 작가로서 존중받길 원하듯, 관객 역시 관객으로서 존중받길 원한다. 작품 감상은 결국 작가가 아닌 감상자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이 타자에게 열린 언어가 아니라 오직 작가의 자기확인을 위한 무대로 전락할 때, 관객은 더 이상 존중받는 수용자가 아니라 강제로 끌려온 목격자가 되고 이 지점에서 본능적인 불쾌감이 발생한다. 이는 노출증 환자의 행위를 볼 때 우리가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와도 같다. 행위자 본인은 쾌락을 얻지만, 타인은 감상의 결과가 쾌락이 될지 불쾌감이 될지 판단하기도 전에 쾌락을 느껴버리는 행위자부터 목격하고 만다. 이 불일치가 바로 역겨움의 정체다.


결국 차이는 타자를 끌어들이느냐, 배제하느냐에 있다. 자기풍자는 자기 자신을 도구화하고 타자를 초대해 그들로 하여금 ‘느끼게‘ 만들지만,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도구화한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수준 있는 결과물이라도 때로는 “천재 호소인”의 산물로 조롱받게 된다. 우리 모두에겐 ‘타인의 딸치는 장면을 보지 않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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