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안나>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이유미로 시작해 이안나로 이어진 삶. 유미, 혹은 안나의 삶은 회피와 책임과 모면과 이동의 연속이었다.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이 내레이션을 들었을 때, ‘그렇다면 유미는 왜 사는지 알았다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보아온 유미의 삶은 “합격했어”라는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된 끊임없는 거대한 산사태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산을 넘고, 넘고, 또 넘어도 “합격했어” 이후의 유미에게는 새로운 산사태, 산사태, 산사태가 밀려왔다. 그럼에도 유미는 살았고, 견뎌냈고, 이겨냈다.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은 지원이다. 지원은 어려운 가정형편, 뜻대로 되지 않는 취업, 그럼에도 기자라는 확고한 꿈을 갖고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계속해서 헤맨다. 하지만 지원은 견딘다. 삶의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아마 지원은 자신의 현실이 지옥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당장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니까.
반면 스스로 지옥을 헤쳐나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차준호다. 차준호의 키워드는 ‘자수성가’다. 하지만 그의 삶이 정말 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이뤄온 것인가 생각해보면 전혀 아니다.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하기까지의 과정도, 경선에서 이기고 시장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보면 그에겐 항상 도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도움을 받기 위해 누군가에겐 부탁하고 누군가는 이용했다. 전자는 주로 남성, 후자는 주로 여성이었다. 차준호는 남자 밑에선 기고 여자 위에선 군림했다. 군림할 수 없고 이용할 수 없는 여성은 제거했다.
차준호가 이유미를 뜻대로 부리기 위해 데려온 인물이 조유미다. 이유미와 성만 다른 조유미. 조유미는 몇 년간 행정고시만 준비하다 결국엔 포기하고 다른 길을 도모하는 인물로, 차준호는 조유미의 존재를 통해 이유미를 감시하고 압박한다. 그래서 이유미와 조유미의 관계는 시작부터 어긋나 있었다. 둘의 날 선 관계는 차준호라는 남성의 아래서 시작되어 그의 의지 아래 지속된다. 하지만 차준호의 그늘을 벗어난 틈에서는 삭막하고, 건조하지만 그래서 적당히 다정한 관계를 이어 나간다.
“독립은 부모의 실망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난 그게 제일 후회돼.”
이유미는 문득 조유미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독백인 듯 아닌 듯 하게. 결과를 기대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에게 너무 기죽지 말라며, 자신의 삶을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는 시작은 부모의 마음으로부터의 독립이라며.
이유미에서 이안나까지. 몰아치듯 이어져온 삶 속에서 유미는 거짓말이 탄로날 때마다 말했다. “노력했는데 잘 안됐어요.” 거짓말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금방 진실을 말하려고 했는데, 혹은 진실로 만들려고 했는데, 노력했는데, 유미의 삶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부모의 실망을 직시하지 못했던 것에서부터 유미의 삶은 노력은 했지만 거짓으로 점철된 삶이 되었다.
하지만 이유미의 삶은 그를 증명해주고 뒷받침해줄 학력, 집안, 재력이 없었을 뿐 그는 매번 자신의 최선을 선택하며 나아갔다. 유미가 안나로서 얻어낸 자격과 기회들은 거짓이었지만 그 이후의 유미의 성취는 허상이 아니다.
결국에는 돌아돌아 혼자의 삶으로.
조유미는 이유미에게 신의를 지키고 싶다고 말한다. 한지원은 계속해서 미친년으로 살아간다. 이유미는 또다른 오해, 혹은 거짓말 속에서 하루하루를 쌓아간다.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지옥이던 어디던 <안나> 속 여자들은 각자의 힘으로, 건조한 연결 속에서 견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