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 34번째 가을호(2000) 수록
글을 처음 부탁 받고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내가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고 삶의 문제로 정하기까지의 과정을 밝힌다는 것. 그것은 부끄러운 내 모습 전체를 훤히 드러내는 것이다. 더욱이 그 과정과 생각들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진행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많은 것을 돌아보아야 했다. 늘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야기, 가끔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했을 이 이야기들을 한 편의 글로 담아낸다는 것은 참 쑥스러운 작업이다. 그러나 나의 이 고백이 여성학과 여성운동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혹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의 부끄러움이야 무슨 상관이랴….
우선 글을 시작하기 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 글은 학술적이거나 이론적인 글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때문에 글 속에 종종 등장하는 여성/남성의 구분이나 성정체성의 문제 등에 따르는 어려운 쟁점들은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이 부분을 건드리려면 또 머리가 아파 올 것이기 때문에….
여성 문제를 느끼기까지
여성운동에 몸담고 있거나 관심 있어 하는 이들을 만나면 처음 나누게 되는 이야기가 어떻게 여성 문제를 느끼게 되었나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다양한 대답을 들어왔다. 칼이나 총을 장난감으로 가질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차별, 가정 내에서의 문제, 대학이나 사회에서의 불평등 경험, 성희롱이나 성폭행 경험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특히 결혼을 한 선배들의 경우는 ‘결혼 제도’가 가장 큰 문제 의식을 던져주었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한 개인이 특정한 경험만을 가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서로 교차하거나 중첩되는 경험을 갖는다. 가끔 특별히 차별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는 여성들도 있지만 조금만 이야기해보면 금새 그에게서 문제 의식을 짚어내게 된다. 이처럼 경험의 차이, 문제 의식을 갖기까지의 차이는 다양하다. 그러나 “여성으로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모두가 페미니스트일 수밖에 없다”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상기시켜 보면서 나의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나는 사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부모님 아래 행복한 딸로 자라왔다. 부모님과 남동생, 그리고 나로 구성된 단란한 네 식구 속에서 나는 특별히 딸이라는 이유로 구박은 커녕 오히려 기대 속에 자랐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 눈에 조금씩 이상한, 저항하고픈 모습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하는 나와 식탁에 앉아있는 동생, 명절날이면 확연히 구분되는 지형도-음식 장만하느라 부엌에 모여 계신 어머니들 vs TV 앞에 모여 계신 아버지들-는 뭔가가 이상했다. 물론 당시에는 일하기 싫으니까 왜 나만 일 시키느냐, 저기 노는 사람들은 뭐냐…하는 불만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싫은 지형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사춘기를 훌쩍 지나버렸지만 계속 반항하고 싶어지는 모습이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내겐 많은 꿈이 있었다. 그 많은 꿈들 가운데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기자였다. 여기저기 발로 뛰어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이 왠지 모르게 좋아 보였다. 그런데 철이 빨리 들었었는지 나는 그 꿈을 마냥 꿈에 부풀어 유지할 수는 없었다. 여성 기자들은 TV에서 본 일이 거의 없었고, 만약 결혼이란 걸 한다면-당시엔 안 한다고 바락바락 우겨댔지만 그러면서도 할 생각은 했었나보다-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고 집에 들어가기도 어려울텐데 어떻게 살림을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하고 싶었던 그 직업에 대해 고민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이런 걱정을 했을까? 내 진로를 고민하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한 가지 걸림돌이 더 생긴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대학에 들어와서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는 나날을 보냈다. 학점 걱정은 집어치우고 학내 언론활동을 열심히 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졌고 한꺼번에 많은 것들을 배운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문 선배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음란가요라는 걸 들어야 했다. 와, 대학에 오면 이런 것도 해야 하는 구나, 재미있는 거구나… 이런 걸 듣고 기분 나빠하면 꽉 막힌 기집애가 되는 거겠지… 분위기 파악 못한다 뭐라 하겠지…하면서 나도 따라 웃었다. 근데 왠지 이상하고 찝찝했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벗겨진 여성처럼 내가 발가벗겨진 느낌… 끝까지 웃을 수가 없어 소주잔을 들이켰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경험은 성폭행이다.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화가 나서 눈물을 찔끔거리게 만드는 그 XXX들… 버스 안에서 할 일 없이 남의 허벅지나 더듬는 그 놈들 때문에 나는 여성이 처한 이 놈의 현실을 분명히 직시할 수 있었다. 성폭행은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가녀린 주인공들만 당하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성운동을 하면서 만난 많은 여성들이 정도는 다르지만 성희롱, 성폭행의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성폭행은 성적 자율성에 대한 침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꼭 강간이 아니더라도 언어 폭력, 시선 폭력 등 모두가 결국은 성폭행인 것이다.) 이 여성들은 점점 움츠러들고, 휴학을 하고, 집에 일찍 들어가도록 훈련받는다. 짜증나고 아픈,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싸안고 살아간다. 때론 죽어간다. 그런데 그 XXX들은 버젓이 잘도 살아간다. 때론 자랑스레 그 경험을 떠벌리며…
1학년을 마쳐가던 겨울방학, 본격적으로 여성 문제를 접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총여학생회에서 기획했던 기지촌활동(기활)을 취재하게 된 것이다. 마감 일정 때문에 끝까지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기활을 준비하면서 함께 했던 세미나, 며칠동안 동두천에서 나눈 경험은 내 고민을 한층 높여주었다. 그 공간 자체, 매매춘에 종사하는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너무나 예쁘기만 한 혼혈아들이 한국 땅에 설자리가 없다는 현실 자체가 나를 아프게 했다.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고민을 던져 준 그 경험 때문에 나는 책을 찾게 되었다.
『껍데기를 벗고서 3』이 처음으로 접한 책이다. 그 속에는 대학에서 여러 가지 여성 문제를 경험한 선배들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그 글들을 읽으며 난 너무나 많이 공감했고 지금까지내가 경험한, 무어라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이상한 일들이 결코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했다. 그것은 여성이기 대문에, 여성인 내가 겪어야 하는 아픔과 고민이었다. 내가 여성이라는 점이 책 속의 글을 이해하게 했다. 책을 계속 읽어나갔다. 어려운 이론서가 아닌 대부분 수필이나 개론서였다. 그러나 그 책들만으로도 난 충분히 여성 문제에 대한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게 됐고, 관심도 갖게 됐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여성 문제와 관련되어 읽혔고, 무심코 웃어넘기던 TV 광고 하나 하나가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다.
여성운동을 삶의 틀로 설정하기
사실, 여성 문제를 가슴속으로 담아두면서 내가 더 많은 관심을 두었던 것은 노동운동, 학생운동, 언론운동이었다. 진로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3학년 말경부터 운동과 나의 삶은 이미 분리되지 않았다. 문제는 무엇을 하며, 어떤 부분을 내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였다. 한동안 많은 고민을 해야했다. 여성 문제가 중요한 줄 알면서도 그것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가까운 선배 중에 여성운동을 지속하는 이들을 찾기 힘들었고, 막연했다. 너무 편파적이고 지엽적인 것이 아니냐는 운동권 선배들의 충고도 있었다. 누구 하나 여성 운동 붙들고 열심히 해보라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여성 문제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삶을 선택하건, 어떤 직장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며 살건 간에 ‘내가 여성이다’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겪어왔고 내가 평생동안 부딪힐 문제 역시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내 문제가 이렇게 처절한데 피해갈 수는 없었다. 누군가 해결해 주겠지…라고 등돌릴 수는 없었다. 내가 너무도 간절하게 느꼈던 문제이기 대문이다.
그리고 너무나 소수라는 점 역시 나를 움직였다. 어느 정도 장성한 노동운동, 시민운동과 달리 여성운동은 짧은 역사 속에서 소수의 여성들로 움직이는 작은 운동이었다.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어머니와 친구들, 대학에서 여전히 성폭행의 위험에 노출된 후배들, 사회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해서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민은 비단 여성을 위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아빠, 남동생, 남자친구, 남성 동료들을 계속 사랑하고 싶었다. 그들과 평등하고 아름다운 만남, 생활을 가꾸어 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피해의식에 빠지는 것을 넘어 좀 더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또한 여성운동은 내가 고민했던 운동을 가장 혁신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무기였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던 어린 욕심을 가장 잘, 보다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무기였다. 여성 문제를 생각하면 정말 이 세상이 한바탕 발칵 뒤집혀져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러면서 또다시 겪어야 했던 갈등의 하나는 학문이냐 현장이냐였다. 먼저 여성운동계에서 경험을 쌓고 현실의 문제와 한계들을 맛보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학문이 운동에 더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그 선후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공부가 운동이고, 연구가 운동이며, 운동이 곧 좋은 연구와 학문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학문과 운동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 그것이 내가 여성학과에서 배운 점이다. 또한 내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점에서도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잠깐이지만 4학년때 몸 담았던 성정치위원회 활동은 그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데 대자보를 써야했고, 학우들을 설득해야 했다. 어떤 언어로 어떤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지, 늘 고민에 쌓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조차 확실히 잡히지 않은, 단지 끓어오르는 무언가만으로 철저하게 갈고 닦여진 가부장제의 틀을 벗겨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를 더 키우고 나의 언어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운동을 하고 싶었다. 내 언어가 어딘가에서 아픔을 겪는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되기를 바랬다. 이런 고민 속에 선택한 것이 여성학과로의 진학이다.
여성학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여성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많은 질문들이 쏟아진다. 그것도 학문이냐, 너무 편협하고 좁지 않느냐, 여성 우월주의 아니냐, 그거 하는 사람들은 다 남자처럼 생겼느냐, 남성 혐오주의자 아니냐 기타 등등. 그 동안은 이러한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질문이 쏟아진다는 사실 자체에 슬퍼지기까지 한다. 그냥 여성학이나 여성운동 한답시고 설치는 여성들이 싫다면, 맘에 안 든다면, 그네들에겐 어떠한 설명이나 설득도 먹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학내에서 성정치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내가 만난 여성운동가라곤 학내 총여학생회 간부들이 거의 전부였다. 본격적인 여성 운동가들을 만나기 전 많은 상상을 했다. 그들은 나처럼 순둥이로 생기지 않았을 거고, 강하고 멋진 여성들일 것 같았다. 다들 담배를 피고, 약간은 터프하며, 옷차림이나 연애엔 전혀 관심도 없는 여자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이 여성운동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도 해보았다. 그러나 다른 학교 여성 단체들과의 모임이나 여성학과에서 만난 이들(페미니스트라면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어디 멀리 과격 지하 조직에 숨어있는 이들이 아닌…)은 내 상상력을 무참히도 깨트렸다. 너무나도 다양한 모습과 다른 삶의 그들이었다. 아주 뚱뚱한 아줌마 스타일서부터 멋지고 세련된 예쁜이들까지 모두 모여있었다. 결혼한 아줌마들(난 아줌마라는 언어를 매우 자랑스럽게 긍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들, 노처녀, 젊은 아가씨들까지 연령과 사는 모습도 다 달랐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정말 다양하고 천차만별인 이 사람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큰 틀에서 만난다는 것이.
왜 하필 여성학이냐, 여성만을 위한 것이냐는 질문에 답을 할 필요는 있을 듯하다. 차라리 젠더 스터디(Gender Study)나 성정치 (Sexual Politics)라는 언어를 사용하자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룬다. 일단 여성학을 여성학으로 명하게 된 데는 그 이유가 있다.
하나의 성적 존재로서, 그 중 여성으로서 당하는 문제가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 이다. 만약 남성이 억압받고 있는 사회였다면 필히 남성학이 생겼을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의 뒤바뀐 현실(여성이 지금의 남성으로, 남성이 지금의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물론 함축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과장된 바가 없지 않지만 대부분 현실과 매우 닮아있다. 그 소설이 부담스럽고 껄끄럽다면 한 번 뒤돌아보시길… 그 소설 속의 끔찍이도 불쌍한 남성이 이 현실의 여성이라는 사실을, 기가 막혀 뭐 저런 년(?)이 다 있냐 싶은 소설 속의 여성이 이 현실의 남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이 그 좋은 예이다. 이갈리아는 여성인 움(wom)이 남성인 맨움(manwom)에 대해 가부장(家婦長)적(?) 권력을 갖고 있는 사회이다. 여기에선 '움 운동 이란 것이 없다. 열받은 맨움들에 의한 ‘맨움운동’이 자생하며, ‘맨움해방’을 외친다. 마찬가지로 남성운동이나 남성학이 아닌 ‘여성학’과 ‘여성운동’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 여성이 겪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여성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중앙대 여성운동이 1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면 학교에서 5년을 지낸 나는 그 중 반을 보아온 셈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든 것은 얼마 안되지만 1학년 때부터 쭉 관심을 가졌었다. 99년 이전까지 학내 여성운동의 흐름을 움직여 온 것은 총여학생회(이하 총여)이다. 총여를 건설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배들의 노력과 고민이 있었는지는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피땀어린 노력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음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 내가 총여를 보며 느낀 점은 너무나 안쓰럽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수’인 운동에 참가하는 주된 활동 인원은 많으면 5~6명, 어떨 때는 달랑 2명 정도이기도 했다.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이 적으면 활동은 힘겹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뚜렷한 기반 단위나 여성 모임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런 상태에선 사실 창조적인 운동을 기획하기는 커녕 현상 유지를 하는 것도 힘들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접했던 총여 선배들의 모습은 늘 지쳐 보였고 힘겨워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신명나게 해도 모자랄 판인데, 축 쳐진 모양새가 조금은 답답했다. 무언가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도전, 학교가 들썩거릴 수 있는 운동이 있어주었으면 했다.
학내 여성운동이 이렇게 침체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중앙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몇몇 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교와 사회의 여성운동의 현실은 대부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기서 근본적인 점들을 몇 가지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여성 문제가 문제로조차 여겨지지 않는 현실이다. ‘조선시대를 봐라, 지금 여성 차별이 어디 있느냐, 다 배부른 소리다’ 라는 말들,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다, 여성 상위 시대다’ 류의 선전 문구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남성들은 커녕 여성들 스스로조차 자신이 억압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학교에서 만난 새내기 여학생의 당찬 질문이 떠오른다. 여성운동에 관심은 많은데 자신은 여성이 어떤 억압을 받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배우고 싶다라는…
게다가 여성문제를 인식 못하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고 미워하는 ‘페미니스트 혐오증’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작년 말 군가산점제 폐지를 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그 동안 가려져 있던 이 부분을 잘 드러내 주었다. 니들이 남성의 고통을 아느냐, 군대가 어떤 곳인지 가봐야 안다는 논리로 전체 여성과 페미니스트들을 집단 공격, 테러, 스토킹까지 했던(이러한 테러는 대부분 사이버상에서 이루어졌고, 한 선배는 실제로도 스토킹을 당했다) 일부 남성들이 있다. 조금이라도 여성을 위한 발언을 하면 가차없는 폭탄 공격 메일이 쏟아졌다. 여성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적 시각을 지닌 한 남성까지도 사이버 상에서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 사건 이후 여성들은 사이버 상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말을 조심하게 되었다. 무언가 말도 꺼내기 전, 의견을 교환하고 고민해 보기도 전에 여성들은 움츠러들고 만다.
여성운동이 부차적인 운동, 부문운동으로 취급된다는 사실 역시 여성 운동을 침체시키는 기능을 한다. 내가 여성운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총학생회에서 성정치 운동을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이것이다. 지금 중요한 운동이 따로 있지 않느냐, 민중이 아니라 왜 여성만을 위해 운동하려 하느냐. 학내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는 많은 이들, 심지어 그 속에 있는 여학생들 마저 이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것은 무엇이며, 중요한 것처럼 부차적인 것을 나누는 것은 누구인지.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교에 남아있는 몇몇 후배들을 보며 힘을 얻는다. 여성문제와 성정치를 고민하는 이들이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준비를 하고 있다. 여성/성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풀어내고 싸워서 바꾸어야 할 대상임을 발견한 것이다. 좀 더 자신들의 생각을 가다듬고 더 나은 중앙대의 여성운동, 성정치운동을 고민하는 그들을 나는 희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희망을 좀 더 활기차게 풀어낼 수 있도록, 선배들이 겪었던 오류를 더 이상은 겪지 않도록 몇 가지 잔소리를 하려 한다. (바로 여기서 나는 한없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잔소리를 할 처지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먼저 저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여성운동가임을, 성정치운동가임을 자랑스레 생각했으면 한다. 그것은 거창하고 두려운 명칭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말하는 것, 내 주위에 있는 조금 이상한 것들을 말하는 것,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바꿔보려는 것이 운동이다. 물론 이런 명칭이 선전용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을 갖고 삶에서 풀어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여성운동이 우리 삶의 운동이자 전체 사회를 뒤집을 운동이라는 점에 대한 확신으로 활기차게 움직였으면 한다. 그것이 진정한 커밍아웃(Coming Out)이다.
각자가 어떠한 처지와 위치에 있든지 운동은 가능하다. 집회장에 피켓을 들고 나가야만 운동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 자체가 운동과 투쟁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정말 경쟁하듯 열심히 해보았으면 한다. 노선을 정하고 운동의 방법을 정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과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답은 없다. 이것이 옳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식은 없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도 별로 없으니 잘못한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다. 여성운동 혐오주의자들이 뭐라고 한다면 단합해서 싸우고, 정 먹히지 않으면 그냥 무시하면 된다. 정말 창조한다는 생각으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신명나게 해 봤으면 한다. 지금 존재하는 다양한 모임들이 제각기 다양한 노선으로 활동을 펼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면서 같이 할 건 같이 하고 따로 할 건 따로 하면서 말이다. 때로 서로에 대한 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그 비판이 서로를 위한 애정 어린 비판이라면 더욱 아름답고 발전적인 여성운동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해야 할 때가 왔다. 운동을 하는 이들이라면, 학문을 하는 이들이라면, 세상을 바꾸어내고자 하고, 성을 이유로 발생되는 모든 억압에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자세이다. 자기 성찰성(self-reflectivity). 성찰성이란 주체를 객체화시켜보는 것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말 자체는 굉장히 쉽다. 자기의 이해관계가 어떤 맥락 하에 있는지를 드러내고, 왜 거기에 있는지 자신의 위치를 보자는 것이다. 즉, 내가 완벽하다는 생각,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이것만이 정답이라는 식의 지나친 자신감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지식은 그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의 위치와 물질적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다. 때문에 그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오류와 오류의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잇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재단하고 나의 틀로 판단해버리는 엄청난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이는 태동하는 여성운동이 특히나 조심해야 하는 점이다. 온 세계의 여성, 남성, 성적 소수자들의 개인적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이 운동의 자만에 찬 선긋기, 벽쌓기는 한 여성(모든 인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리고 함께 하는 지식 공동체, 운동 공동체, 동지들과 끊임없는 만남과 토론을 거쳐야 한다. 바로 그 장이 서로를 자극하는 자리이고, 자극 받을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한 만남을 지속하면서, 학내 여학생들과 모든 성적 소수자들을 기억하면서, 씩씩하게 도발적인 운동을 펼쳐나갈 멋진 후배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글 신라영
한국에서 여성주의는 어느새 금단의 선을 넘는 것과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페미니즘 서적은 불온서적 취급을 받고, 단지 쳐다보는 것, 들여다보는 것, 관심을 가지는 것,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눈치를 주고 눈치를 보게 되는 요즘이다. 단지 눈치에서 멈춘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여성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혹은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에게는 수많은 실제적 위협이 따른다.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스스로 사유하는 기회를 갖는 것 자체에 대한 견제와 간섭은 사방에서 들어온다.
가끔은 혼란스럽기도 하다. 몇 년 전만 해도 다들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모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며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인 현실을 직시하고 함께 고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금세라도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될 것 같았고 여성해방이 당장이라도 이루어질 듯,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휘몰아치듯 페미니즘은 모두를 덮쳤고, 빠르게 다가왔던 만큼 백래시의 물결도 거셌다. 몇 년이 흘러 돌아온 대선에서 여성들은 마치 없는 사람 같았다. 모두가 ‘이대남’을 외쳤고, 남성 정치인들은 남초 사이트를 돌며 “펨붕이들 안녕?”하는 인사를 건냈다. 여성이 언급되는 때는 ‘여성가족부를 없애겠다’는 남초 공략 ‘어그로성’ 정책을 펼칠 때뿐이었다. 그 누구도 여성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표를 받으려면 어떤 공약을 내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여성들은 마치 공기처럼 허공을 떠도는 듯했다.
그러던 중 박지현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이 등장했다. 박지현 전 위원장은 n번방을 취재해 세상에 알린 추적단 불꽃 소속의 활동가로 이재명 전 대통령 후보 측에서 이대남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뒤늦게나마 20대 여성들의 표심을 얻고자 영입한 인물이다. 박지현의 등장은 효과적이었다. 이재명도, 윤석열도 뽑을 수 없었던 여성들의 마음과 표가 모였다.
용기 있는 여성이 세상을 바꾼다. 실천하는 여성이 세상을 바꾼다. 거센 백래시에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은 점점 숨기고 싶어지고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내 당장의 삶만 생각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가 멀다하고 나를 찾아온다. 그럼에도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계속 여성운동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용기를 내고 행동을 보여준 여성들이 이끌어낸 변화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당장 그들처럼 나서진 못하더라도 나의 지지와 행동 또한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성운동을 한다는 것. 이의 기반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일이다. 묘했던 공기 중에 혐오를 알아채고 불쾌함을 만끽해야 한다. 실컷 분노하고 소리치고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를 묶어두었던 두려움과 자책을 끊어내고, 혹은 그를 이고 지고서라도 세상에 여성으로서 나서는 경험을 하는 것이 여성운동이기 때문이다.
지난 녹지가 쓰인 2000년으로부터 23년이 지났다. 정말 놀랍게도, 그리고 어쩌면 예상했던 대로 사회는 소름 끼치게 그때와 닮았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여전하고, 처벌은 지지부진하고, 여성들이 느끼는 사회는 비슷한데도 여성상위시대가 왔다 한다. 대체 20년 전부터 왔다던 여성상위시대는 어디로 간 걸까. 여전히 임금차별도, 여성에 대한 폭력도, 가부장제도, 여전한데 대체 여성상위시대가 어디에 있다는 걸까.
‘여성’을 언급하는 것조차도 억압당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여성들이 겪는 경험은 과거의 것이고, 허상이며, 망상으로 치부되고 무시되는 시대를, 우리는 여전히 뚫고 지나고 있다. 백래시는 거세지고 ‘여성’의 입지는 좁아지는 현실이다. 다만 그럼에도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더욱 크게 소리쳐야 한다. 100을 요구하니 10을 던져주는 그들에게 10이라도 던져줌에 감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여성의 몫을 내달라고, 우리가 요구한 것은 100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며 소리쳐야 할 것이다.
23년 전에 쓰인 저 글 속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유사한 것처럼, 세상은 정말 숨 막힐 정도로 느리게 변하고, 때로는 되돌아가기도 한다.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보다 대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차별을 받고 사는 우리이기에 더욱 의식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성혐오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무시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단지 누군가가 나서서 바꿔주기까지 기다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여성들이 함께 움직이고 함께 소리칠 때 세상을 좀 더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다.
나는 나를 포함한 여성들이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길 바라지 않는다. 원하는 만큼 바라고, 누리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두려움에 숨지 않고 나서는 경험도 해보고, 쟁취하는 경험도 해보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나아가길 원한다. 두렵고, 피곤하고, 지난한 길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20여 년 뒤의 내 삶을 생각했을 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또다시 23년이 흐른 뒤에 이 글은 어떻게 읽힐까.
나는 여성이다. 나는 여성주의자다.
더는 이 말들이 두려움 틈에서 발화된 비장한 선언이 아닌 세상이길 바란다.
글 서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