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불판 위에서 자글자글하게 구워 먹는 삼겹살, 시원한 맥주 한잔과 함께 먹는 치킨, 풍미 가득한 치즈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피자 등 거리를 거닐다 보면 우리의 군침을 돌게 하는 음식들이 정말 많다.
그런데 이렇게 맛있고 기름진 음식들을 제쳐두고, 어서 집에 가 엄마가 해놓으신 소박한 된장국에 밥을 말아 깍두기를 올려 먹고 싶을 때가 있다. 특별한 레시피로 만든 것이 아닌, 그저 멸치 육수와 집 된장으로 국물을 우리고, 몇 가지 채소만이 들어가는 된장국인데도, 그 안에서 깊은 맛이 난다. 아마 엄마의 손맛과 정성이 들어가서 그런 건 아닐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꼭 그렇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만든 소박한 된장국 같은 영화다. 사랑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 흔한 키스신도 없고, 베드신도 없다. 또한 죽음에 관한 영화지만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는 그저 은은하게 서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풍기는 특유의 세심함은 영화가 끝나고도 깊은 여운을 준다.
죽음을 다루는 영화는 많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린마일' 등 인간에게 죽음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관련 영화도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 이 영화가 돋보이는 건, 관객들에게 죽음의 무거움이나 심각함을 과장되게 보여주지 않는 점이다. 담백한 서사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관객에게 다가간다.
"... 그곳에서 내 곁에 없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정원은 영화 초반 내레이션으로 죽음을 넌지시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사이에 심 정지가 온다던가, 구급차로 긴급 이송한다던가 하는 신파는 없다. 오히려 죽음과 상관없어 보이는 텅 빈 운동장에서 죽음에 대해 담담히 서술한다. 그리고 얼마 뒤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쓸쓸한 표정으로 운동장에 앉아있는 정원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후반부로 갈수록 깊어지는 여자 주인공 다림과의 관계 앞에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 원래 이런 서사에서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같이 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 재밌게 얘기를 하고 있는 둘의 대화에 "사람이 죽어서 귀신 되는 거 아니니"라고 죽음을 흘리듯이 말한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갖고 일부러 관객들에게 눈물을 짜내기보다, 담백하게 죽음의 이미지를 그린다.
영화는 초원 사진관을 통해 사랑과 죽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주인공인 다림과 정원은 초원 사진관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그리고 초원 사진관 밖에는 정원이 전에 사랑했던 지원의 사진이 걸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초등학생들이 찾아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사진을 확대하는 장면에서 정원은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 게 잘못됐나요, 뭐"라고 다림에게 말하며,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 사진관에서 사랑의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원과 다림이 데이트 약속을 하고 다림이 초원 사진관에 오기로 했는데, 약속한 시간에 찾아온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웬 할머니였다. 결국 다림은 오지 않았고, 그 시간에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찍는 정원의 모습을 통해, 정원의 앞에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는 '비'와 '눈물'을 통해 서사를 진행한다. 비는 정원의 몸 상태를 말해주며, 정원의 눈물 양과 비례한다.
처음에는 비가 한두 방울 올 때 정원은 눈물을 아주 약간 흘리며 눈을 꾸욱 감는다. 그러다 점점 비가 오는 양이 많아지고, 병원에서 안 좋은 소식을 들은 날, 천둥 번개 속에서 정원은 통곡을 한다. 비와 눈물로 정원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다림과의 관계는 점점 좋아진다. 이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은 정원을 더욱 슬프게 한다.
그런데 정원의 죽음 후, 영화의 마지막에는 '눈'이 쌓여있다.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정원의 내레이션을 통해, 다림과의 관계는 그동안 맺었던 모든 관계 중 예외가 될 만큼 소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죽음 뒤, '비'가 아닌 '눈'으로 그 예외성을 표현하고, 영화의 제목 안에 '크리스마스'를 넣어 그 예외성을 강조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눈이 즐거운 볼거리가 있지는 않다. 대신 한 폭의 수채화처럼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섬세한 표현들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볼 때 보다, 보고 난 후 '참 좋은 영화를 봤구나' 생각이 드는 영화다.
<참고문헌>
감독 허진호. 8월의 크리스마스, 오승욱, 신동환, 허진호, 1998, 우노 필름
사진출처 : NAVER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