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경마공원, 경마공원역입니다.
화창한 주말, 피크닉에 가기 위해 지하철 4호선에 몸을 싣는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이 없을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나와있다. '주말에도 다들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사람들의 부지런함에 다시금 놀란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갔을까, 아까 봤던 그 부지런한 사람들이 벌써 내릴 준비를 한다. '아직 사당역도 아니고, 별다른 환승역도 아닌데 갑자기 왜 다들 내리지? 이미 내릴 곳을 지나쳤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여기가 어딘지 두리번거린다. 때마침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번 역은 경마공원, 경마공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그 우르르 내리는 틈 속에 내가 껴있었다.
혹시 경마공원에 가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한 번쯤 나와 마주쳤을 수도 있다. 나는 경마공원에서 알바를 했었다. 그리고 경마공원에는 나와 같은 수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있었다. 우리는 PA(Park Assistant)로 불리는데, 그 안에는 발매/기동/안내/질서/검표 등 다양한 직무로 나뉘어 있다. 나는 발매원으로 일했다.
발매원은 고객과 가장 가까이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며 마권 발매를 지원한다. 경마공원역에서 우르르 내리는 그 사람들은 코로나 이전에 대략 6만 명 정도 됐는데, 수백 명의 발매원들이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
발매는 교대로 진행되지만, 사실상 쉴 틈은 없다. 쉬는 시간 동안 무인발매기의 고장을 관리해야 한다. 경마는 대략 25~30분마다 있는데, 고객들은 마감 5분 전에 마권을 사기 시작한다. 몇 만 명의 사람들이 5분 안에 마권을 사다 보니 고장이 자주 난다. 고장이 나면 고객이 마권을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약 30초 이내로 고장을 처리해야 한다. 만약 재빠르게 처리하지 못해 고객이 마권을 사지 못하면, 욕 한 바가지 얻어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퍼져있는 '경마장'의 이미지는 비슷할 것이다. 왠지 <타짜>와 같은 누아르 영화처럼 조폭도 몇 명 있을 것 같고, 여기저기 싸움이 벌어지고, 빚을 갚지 못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사람 등 무서운 이미지들이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처럼 그렇게 무서운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이 경마를 하는데만 집중하고, 직원들도 묵묵히 일을 할 뿐이다.
늦은 오후에서 저녁이 될 무렵, 경마공원에는 긴 노을이 진다. 그 노을을 맞으며 말들은 뛰고 있고, 기수들은 죽을힘을 다해 결승점을 통과한다. 그 사이 고객들은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다. 그 경주에서 누군가는 돈을 따고, 누군가는 돈을 잃는다. 또 누군가는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누군가는 우리에게 분풀이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다. 약 3분간의 경주에서 인간의 모순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다. 그래서 경마공원은 '누아르' 보다는 '희곡'에 더 가까운 이미지다.
그 희곡은 금, 토, 일 오전 10시 반에 항상 시작된다.
누군가는 주연으로, 누군가는 관객으로, 누군가는 직원으로 그 희곡을 이끌어간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각자만의 이유로 모순 가득한 그 희곡에 참여하게 된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쉬어가는 그 희곡은 어떻게 다시 시작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