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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10. 2024

JUST THE TWO OF US

두 여자, 그녀와 나

[JUST THE TWO OF US]  2024. 3. 10. PROCREATE IPAD. DRAWING by CHRIS



나는 불만이나 슬픔을 감추고 살지는 못할 것 같다. 많은 여자들이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부모를 위해 타인을 위해 자신의 아픔이나 과거를 가슴에 꾹꾹 눌러두고 살다가 입이 돌아가고 불면에 걸리고 화병에 걸려 이빨을 몽땅 뽑으며 넘어지곤 하지만, 그래서 주위의 또 다른 사람이 그 짐을 짊어지고 다리를 절며 살게 되지만, 일전에 모질게 주위 사람에게 공언했듯 당신들의 짐을 지는 대신, 당신들처럼 순순히 살고픈 마음은 한 톨도 없다. 뼈가 삭고 입이 말라서 내 두 눈을 찌를지언정 나는 나로 살아갈 거다.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미움과 증오, 아픔. 그것은 어리석은 형벌이다.





제시간에 항상 늦는 친구 때문에 어쩌다 표를 두 장 더 사게 되었다. 같은 극장에서 동시상영 보듯 영화 두 편을 연이어 보다니 정말 아니다 싶었다. 일부러 영화를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영화도중에 엉뚱하게 질문을 해대는 녀석에게 감상을 설명한다는 게 갑자기 피곤하고 심난해서 성질이 돋았다. "야, 조용해!" 그런 면에서 우리의 우정은 여전해도 작품감상에 빗금 친 녀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수양이 덜 됐다. 영화 두 편은 차분하게 진행되었지만 여러모로 감정이 들끓었다는 면에서 완전히 쇼박스(SHOW-BOX)였다. 그런 영화 두 편이었다. <여자 정혜>, 그리고 <독일, 창백한 어머니>.




먼저 <여자 정혜>를 보면, 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에는 싸움닭이 돼버리는 털팔이 기질의 나와 달리, 그녀를 설명하는 첫 단어는 배려다. 뚱하고 한 박자가 늦고 잠잠한 태도로 남이 간 자리를 조용히 쓸고 가는 여자는 홈쇼핑 광고와 알람을 일상에 배치하며 김치를 배달시켜 먹고 불면에 또렷해진 눈으로 아침을 연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고 뭉치 빗에서 엄마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직장동료와 늘 가던 치킨집에서 술자리를 나누고 출퇴근이 정해진 우체국에 일찍 나가 문을 열고 하루를 보내는 여자. 늦은 점심메뉴를 느릿하게 고민하고 주말엔 베란다에 놓인 화분을 손질하며 화분 깔개로 써버린 엄마의 소설책을 다시 사는, 혼자의 삶을 엮는 여자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속눈썹을 떨궈낼 때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믿고 있으면서도 한여름 어린 날 가까운 사람에게 당한 낯선 아픔과, 자신과 친했고 이해심 많던 엄마와의 헤어짐을 통해, 세상과의 문을 닫아버린지도 모른 채 멍한 눈길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뭐랄까. 그 심정을 알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답답했다. 고양이를 키우며 그리운 엄마 놀이를 해봤다가 벗어날 수 없는 기억을 완전하게 빗장 채우려고 고양이와 이별했지만 결국 힘들었던 지난 선택도 자기를 베어버리는 아픔 밖에 되지 않음을 알고 새벽에 내버린 애물단지 고양이를 찾아서 집으로 돌아오고 마는 지루한 순환은, 엄마와 비슷한 일을 가진 남자에게서 그녀 이름이 처음 불려지면서 ‘외톨이 정혜가 세상에 다시 문을 열까?’하는 의문과 함께 일단락 짓게 된다. 일종의 자가 치유가 절실히 필요한 식물을 클로즈업한 관찰일기 같던 어지러운 영상이었다. 워낙 마음이 심란해서 좋게 볼지 말아야 할지, 이해하는 게 나을지 말지, 자맥질하게 만들었다. 괜한 희망을 불어넣는 여자, 정혜.




<독일, 창백한 어머니(Germany Pale Mother, Deutschland Bleiche Mutter)>는 부서진 벽돌로 집을 짓는 삶에 대한 격한 서술이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총대를 메게 된 그리고 그 총부리에 겨누어진 누구나 악몽이 끝난 뒤 무심히 하루를 이어가더라도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처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Ich, Der Überlebende; 나, 살아남은 자, Bertolt Brecht)을 재현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엄마의 동굴에서 빠져나오던 아픔을 똑같이 느낄 때, 사람은 죽음을 인지하게 된단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 못 한 아기의 탯줄에 새겨진 숨 막혔던 고통은 죽을 순간까지 뇌리에 깊게 뻗쳐있는 것처럼 공습경보와 함께 태어났던 여자의 시끄러운 뿌리를 찾아가는 필름은 순결할 수 없는 자에게 순결을 강요하면서 정복자의 권리를 과시하는 모난 세계의 또 다른 기록이었다. 지배와 피지배의 순환기적 분열이 아직까지도 평화스러운 종결을 허락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가족사는 크게 곪은 게 아물면 곧이어 작은 상처가 곪는다며 불길하게 읊조린다. 조용해 보이는 집안을 관객에게 들춰보라 종용하는 내레이션은 극의 주문으로 작용한다.


사실, 문제가 없는 집안이 어디 있겠는가. 말해지지 않는다 하여 우린 눈을 감고 웃음을 가득하게 흘리지만 향기가 넘치는 구들장엔 시체 썩는 냄새와 모종의 악한 비린내가 숨 쉬고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 조국의 비리에 허우적거리며 독한 술로 마비되어 고통을 접던 사람들과 그 부모의 잔재들은 같은 이름이다.


‘모든 게 무너진 뒤에 쓰레기를 치우고 집을 짓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부서진 벽돌로 집을 짓는 건 새로움도 금이 가버린 곳을 불안하게 쳐다보게끔 만든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이 영화는 기대이상으로 재공사가 필요해 보인다. 파스빈더(Rainer Werner Maria Fassbinder)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로선 허무한 장치에서 뿜은 과감한 폭발과 동시에 쇳소리처럼 길게 터지는 잔혹한 여운의 이야기 흐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강렬한 시상을 이어가는 여인의 목소리는 전쟁 후에 한쪽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진 어머니를 보여주면서 분노도 슬픔도 아픔도 아닌 입가의 떨림 정도로 고통의 흔적을 마무리했다.


나치의 깃발에 들러붙은 피 빠는 모기가 까맣게 장식된 장면으로 시작된 상징적인 극의 체계들과 근작들에서 자주 발견하게 되는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적 환상은 나의 위장을 뒤집어놓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전쟁 후(Post-War)의 황폐함은 별개의 사람들을 식별할 수 없도록 이중적인 분신을 생산하고 엉켜진 사고를 쫓으며 상실되는 인간성과 끝없이 도태되고 변질되는 현대인의 슬픔을 보여주는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수 십 년이 지난 뒤에 뒤틀린 기억을 따라간다는 것은 감상자의 눈길을 얼마나 거북스럽게 만드는지 모른다. 한숨처럼 숨 쉬다 보니 극이 막을 내렸다. 종일 비관적인 사고로 현장을 마무리 짓는 것은 벗어나려고 긁는 손을 허공에 주춤하게 걸쳐놓는다. 그대로 놓아둔다면 피가 통하지 않아 온몸이 마비되어 울퉁불퉁하고 허옇게 질릴 것이다. 독일, 그 창백한 어머니처럼.




영화가 끝나고 친구는 연신 주변 사람들과 통화했다. 한마디로, 예술영화는 지겹기 그지없단 건데 녀석의 간단명료한 설명에 웃었다.


"졸리고 사람이 없고 할인 안되고 잠이 오면 다, 예술 영화더군."


그래, 너의 말처럼 지루하면 모두 예술영화라고 볼 수 있겠다. 영화 두 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작품들은 점차, 개인적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고자 온전했던 책장에서 낱장으로 뜯어지고 있다.'라고 말이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 팸플릿을 보고는 영화내용을 상상해 가며 지어내곤 한다. 무슨 내용인 줄 알지 못하면서 주인공 이름과 상황 몇 개로 나름대로 구성해서 아는 사람들과 할 이야기가 없을 때 말주머니에서 풀어내는 게 오래된 습관이 되었다. 부끄럽게도 이 영화 중에 한 편을 친구 녀석에게 미리 말한 게 오늘 성가신 언사를 불러낸 화근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선 녀석이 하품을 늘어지게 뱉으며 그런다.


“야, 이상하다. 영화가 어떻게 네가 말한 내용하고 이렇게 틀리냐?”


한 순간 쭈뼛해진 민망함이란.


- '그래, 이 놈아! 사실 나도 지겨웠다. 누군가와 함께 본다는 것이 이렇게 신경 쓰이는 일일 줄이야.'



남자의 시선과 여자의 시선으로 분사되었던 두 여자. 그 속에 액자처럼 끼어있던 또 다른 두 여자. 엄마와 딸. 탯줄에서 떼어도 뗄 수 없는 정(情). 영화를 보면서 나는 엄마를 생각했고 많이 착잡했다. 고통으로 울었던 시간. 그리고 잠시 멈춰졌지만 곧 다가올 4월은 나에게 정말 잔인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요즘은 망설였다가 섰다가 정신이 없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게 중첩되어 버려 다리가 흔들거렸다. 잠시 혼란해진 모습을 친구가 찍었는데 완전 두 얼굴의 아슈라 백작이었다. 우리는 영화로 야기된 불어 터진 불만의 입술을 집어넣고 멋쩍게 화해를 해 버렸다.


이 단순한 생활에서도 복잡한 관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느끼고는 기분이 들쭉날쭉하다. 영화 속의 그들을 보았던 현실의 두 여자는 어떻게 될까. 같은 곳에 놓여있다 분리된 샴쌍둥이처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우리. 어제와 오늘은 두 여자의 복합술수 시리즈로 마감한 하루였다. 두 여자. 두 여자. 두 여자.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친구와 영화를 본 것도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두 편을 동시에 봐서 세 편으로 어정쩡하게 되어 버렸지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서로를 투닥거리며 각자의 인생을 쓰고 있을 것이다.  

2005. 3. 13. 日






친구와 나, 우리가 함께 영화를 본 지도 어느덧 십구 년이 흘렀다. 삼월의 둘째 주 일요일, 날짜는 다르지만 지금의 나와 내 속의 그녀도 시점이 바뀌어 있다. 2024년 오늘로 돌아온다. 시네큐브에서 연달아 영화를 함께 본 이후로 영화는 저 멀리 던져두고 친구와 나는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대교 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으로 이사 왔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이십 분 되는 길인데 이사만 오면 자주 들리겠다고 말한 것과 달리 일이 많다는 핑계로 잘 못 가고 있다. 이사 집들이 겸 추석 잠시 들러서 밥 먹고 나선, 한 달 전 고등학교 때 삼총사였던 N남편 카페 오픈파티에서 함께 모인 두 번째인 듯하다. 우린 젊을 때보단 지금은 좀 나아졌다. 내 안의 그녀도 웃고 있겠지. 오늘밤 그녀와 나, 오직 우리 둘이서 보내는 이 시간을 즐겨야겠다.  



당신의 짐을 지고 삶을 얻었네

뼈가 삭고 입이 마른다 하여도

자유 속에서 슬퍼할 수는 없고

해방 속에서 불만은 사라지네


다정한 당신과 헤어지고 

우리의 집을 잃어버렸어

발가벗은 식물이 되었지

동굴이 숨막혀서 뛰쳐나갔는데!


시체 썩는 냄새와 폐허로 가득한 

광란의 도시는 어지러워

망각의 독한 술은 어디에 있는가

한쪽이 창백하게 일그러진 당신은?



I see the crystal raindrops fall

And the beauty of it all

Is when the sun comes shining through

To make those rainbows in my mind

When I think of you sometime

And I want to spend some time with you



Just the two of us

We can make it if we try

Just the two of us

Just the two of us

Just the two of us

Building castles in the sky

Just the two of us

You and I



We look for love, no time for tears

Wasted water's all that is

And it don't make no flowers grow

Good things might come to those who wait

Not for those who wait too late

We gotta go for all we know



Just the two of us

We can make it if we try

Just the two of us

Just the two of us

Just the two of us

Building them castles in the sky

Just the two of us

You and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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