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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09. 2024

DIE NACKTE WAHRHEIT

벌거벗은 진리 | 옷의 은유학

MONOLOGUE


은유(Metapher:Metaphor)는 사건을 서술할 때 거짓된 감정을 사용하는 순간에서 해방되게 한다. 사건을 기술하는 객관적 서술에 있어서 대상을 인간으로 가정하면, 한 인간의 삶에는 자동적인 행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감정이라는 모호한 형상이 실려있다. 개념적 사고의 바탕이 되는 사유의 확장으로 비견되는 은유는 화자가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울 때 진실에 가까워지는 유용한 언어 수단이다. 보편타당한 '진리(Veritas)'와 세부적인 '사실(Fact)'은 다른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기반하여 인생을 다루는 이들의 가장 오류는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주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처럼 진리를 호도하고 남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실(Honestly Truth)을 기술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분방한 사고를 늘어놓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다.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의 《벌거벗은 진리(DIE NACKTE WAHRHEIT)》는 퇴임하신 대학교 은사의 페이스북에 소개된 추천도서다. 소개글에서 한스 블루멘베르크가 나치의 억압을 피해 여자친구의 지하밀실에서 세상의 이야기를 흡수한 이력을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와는 다른 형태의 골방이었지만 어두워지면 미친 듯이 세상의 기억들을 흡수한 시절이 수면으로 부상했다. 근처 도서관에서 책 대여가 가능한지 봤는데 최신도서라 아직 입고되지 않았다. 쿠팡에서 결재하고 타인이 발설한 '벌거벗은 진리'를 손에 받아 든 지금, 그의 은유 속으로 진리를 향한 여행을 시작한다.





I. 옷, 은유를 선택한 변명


내가 어떤 소속감을 갖는 협회에 가입하지 않고 사회적인 모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잃어버린 8년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며 후반기 인생을 은둔으로 보냈던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해명과 비슷하다. 그와는 두 배의 시간, 가장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분방할 시기에 나의 삶의 방향은 오직 타인의 삶을 거드는 것에 쏠려 있었다. 그것도 사회적 보상이 있는 경제적 돈벌이나 학문적 명예를 얻는 지식의 헌신이 아닌, 알 수 없는 이상에 미쳐버린 거짓부렁의 환각자와 쇠약해져 가는 육체와 정신의 점진적인 망각이 점철된 환자 사이에서 또래들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달리기는 불가능했다. 뿌리부터 썩어있는 삶 속에서 아름답다고 찬미하는 대중적인 젊음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가볍게 수면 아래 흐르고 있던 이야기들조차 레퀴엠(Requiem)으로 바뀌었다.


어렸을 때는 글은 적지 않았지만 나는 학교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아이로 통했다. 전날에 통독한 소설들과 각종 이야기들을 친구들에게 짧게 축약해서 들려주면 박수를 쳤다. 이야기를 들었으니 소설을 볼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 몰래 중얼거렸다. '사실은 이런 이야기는 아니야. 직접 읽어봐.' 내가 작가의 이야기를 중간에서 해석하면서 어조는 변했다. 머릿속의 사고와 기억의 회로는 타인의 말을 돌리고 구부러뜨리고 휘감으면서 다른 언어를 번역해 냈다. 그걸 사실로 알면 안 되는데 그 이상을 넘어 나와 진실에 대해 논했던 사람은 거의 드물다고 봐야 한다.




II. 옷, 마음속 진실의 메타포


새로운 의미의 지평과 이론적 탐구의 서막을 연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은유학(Metaphorologie)은 끝을 맺기 어려운 작가주의 사람들에게 명확한 선택으로 작용한다. 나는 눈을 시원하게 만드는 그림을 보면서 끝이 없는 피안을 상상한다. 나는 물결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수면 아래의 침잠된 검붉은 황토를 기억한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글을 읽으면서 피가 흐르는 심장을 떠올린다. 나는 손끝을 떨리게 만드는 음악을 들으며 그와 격렬히 나누었던 어둠을 생각한다. 나는 기이하게 구부린 무용수의 등을 바라보며 절규하던 어제를 떠올린다. 나는 흑백의 잔선만 남은 백색의 스크린에서 지워진 기억에 대해 고민한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선 불완전한 인식이라던지 수사적인 추측에 대해 경계한다. 그러나 내가 소심하게 사용하는 아마추어적인 상대적 은유(Relative Metapher)보단 블루멘베르크가 분석적으로 사용한 '절대적 은유(Absolute Metapher)'라면 철학적 패러다임에 속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작가의 말로는 개념의 체계적인 결정(Kristallisation: Crystalization)을 위한 배양액은 정신이 추측할 수 있는 용기 속에서 자신이 역사를 기획하고 있는지 바라보게 만든다고 한다. 은유는 화학적인 작용을 통해 소진되는 개념이 아니라 개념의 결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기능을 수행하기에 개념보다 더 근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련의 의미 있는 지평과 관찰방식의 변화를 수반한 절대적 은유는 '현실의 총체성에 대한 상(像)'을 찾는 것이 목적이다.


블루멘베르크가 인용하는 철학적 과학적 문학적 소양의 대지에 누워본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소설, 파우스트(Faust)》의 '대지의 영(Erdgeist)'과 형이상학적인 '세계의 영혼(Anima mundi)'이란 동일한 과학적 관념은 탈형이상학 시대에 절대적 은유가 소환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 즉, 적나라한 진리는 인식 주체의 경험과 이해의 지평이란 차이와 함께 특정한 이론 체계와 방법이 기반한 세계의 유행과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제약을 초극할 보편타당성과 평행선을 이루기 때문에 서로 도달할 수 없는 거리에 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가 말한 '사실'이 어디까지나 '해석'일 수밖에 없는 현장은 한 손엔 진실의 저울을, 한 손엔 칼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에 한복을 입히고 칼 대신 법전을 들게 한 한국의 대법원뿐만 아니라 평이한 일상의 논쟁에서도 잘 관찰할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이해는 사실이 의미를 획득하는 맥락에 따라 다르고, 그래서 사건들을 건조하게 다루는 법원에서조차 사실을 놓고 피 튀기게 설전이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리는 의상을 걸침으로써 나름의 '문화'를 갖게 되는데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복식의 문화사를 갖게 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고 옷을 입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블루멘베르크는 적나라함을 이야기할 벌거벗음이 곧 나체의 모습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이나 '베일'로 단계 껍질을 가린 은유를 사용하여 진실을 드러내야만 벌거벗은 상태의 치부와 수치심을 감출 있다고 말한다. 내가 디자이너로서 동류업계의 다른 이들과 달리 껍질(外皮)에 대한 미학(美學)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그들과 표현수단을 선택한 태생도 다르지만 나에게 옷은, 다른 디자이너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미(美:Beauty)와는 다른, 내부의 온연한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윤리적 미학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유의 철학으로서의 옷과 베일나를 가장 표현할 있는 마음속 진실의 메타포이다.




III. 진리를 보는 예술가의 눈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의 순수한 신앙고백조의 개인적인 벌거벗은 진리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이르러 사회전반 체계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역사적 의미의 변화에 대해 다루던 '메타 동력학(Meta-Kinetic)'이 은유학의 탐구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근대 과학에 이르러 진리의 객관성과 개방성이 대세로 진행되다가 진리의 객관성에 대해 회의론이 대두된 19세기 후반 실증주의 사조와 맞물려 진리 탐구의 모든 가치를 전복한 니체와 무의식이라는 신천지를 개척한 프로이트에서 인간행위와 사고의 근본적 동기에 대한 탐구가 결정적으로 분출된다.


"세속화의 논리에 따라 종교가 과학으로 둔갑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블루멘베르크는 근대과학이 수사학으로 존재할 때 그 핵심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과학은 포장된 종교의 같은 말이며 수많은 사물들이 베일로 은폐되는 것과 더불어 모든 문화가 시작된다면서 '예술가'와 '이론적 인간형'의 차이를 설명한 니체의 통찰을 들고 왔다. 난 여기에 크게 공감을 했는데, 여기에 기술해 본다.


"말하자면 예술가는 사물의 외피를 벗기고 진실을 드러낼 때마다 벌거벗긴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 외피를 언제나 매료된 눈길로 하염없이 바라본다. 반면에 이론적 인간형은 벗겨서 내던진 외피를 즐기고 만족감을 얻는다. 이론적 인간형이 추구하는 최고의 쾌감은 자신의 힘으로 외피를 벗기는 데 성공했다는 행복한 과정이다."


작가의 연구에 의하면 자이스(Gais) 여신상의 베일을 벗긴 청년의 광기 어린 회한이나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최고의 학자로 등극한 파우스트가 삶의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사물의 베일 뒤 적나라한 모습이 허상이거나 또다시 베일에 쌓여있어 표면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여성적 삶(Vita Femina)'의 궁극적 아름다움은 베일에 가려져 있고 그럴 때만 궁극적 매력이 있다는 것을 블루멘베르크는 삶 자체의 풍요를 가져오는 폐쇄적 은유로 설명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에게 개연성이 담긴 진리를 수사하는 것은 어떨까? 수사학은 진리에 봉사하는 위장(僞裝)시종으로 거느리고 있지 않은가.




IV. 옷, 베일의 기능


고대의 망령들과 근대의 망령들이 대화를 나누는 퐁트넬(Bernard Le Bovier de Fontenelle)의 《사자들의 대화(Fontenelle's Dialogues of the Dead)》에서 소크라테스가 몽테뉴에게 말한 "옷은 바뀌지만 몸매는 바뀌는 것은 아니다."의 함의는 복장과 몸매의 관계는 가변적인 것과 지속적인 것, 우연적인 상황과 필연적인 실체사이의 관계와 같다는 걸 가리킨다. 


현대사회는 벌거벗은 진실을 보고 싶어 하고 비밀을 들추기를 좋아한다. 정치계든, 경제계든, 사회문화계든, 연예계든, 스포츠계든 개인적인 폭로에 폭로가 거듭되다 보면 저것을 떠벌릴 정도로의 커다란 비밀인지 의문스럽다. 그것은 개별적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기보단 최고급 식도락의 세계에서 펼쳐져 있는 시판용 오렌지 주스처럼, 있는 둥 마는 둥 그 어떤 영향력 발휘하지 못한다. 떠도는 마음의 위안을 제공하기 위한 각종 신앙이 판치는 사회에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은 삶에 관한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삶에 관한 질문은 답변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프로이트가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사람은 아픈 사람이라고 말한 것과 상통한 것이라는 이야기에 어딘가 뜨끔 했다. 나의 의문의 끝은 어디인가? 문학적인 적나라함이 궁금할 땐 현대의 극에서 가장 많이 올려지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작품을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했듯이 "구약성경의 직설적인 문체"를 연상시키는 소름 돋는 벌거벗은 모습이란 말에서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근대의 미지의 영역은 별이 빛나는 하늘과 인간의 몸이었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가 천문학의 한계를 허물었고 해부학의 원조인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가 의학의 한계를 허문 이후로 몸속은 점점 미지의 영역으로 파고드는 은유가 되었다. 요즘 한국의 의학계를 가르는 밥그릇 싸움의 근본에는 해부학과 생리학, 병리학이 인간의 표피 아래를 탐구하면서 천시되던 인체에 칼을 대는 행위가 질적인 기술과학으로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의사의 하얀 가운이 정치과학적으로 매력적이고 근사한 신의 유니폼으로 변용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신체를 아무리 열어보아도 최종적인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최종적인 것에 도달하면 그 최종적인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본질적 행위를 꿰뚫는 해석이다.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이 원하는 본질을 살펴보면 신이 아닌 이상 신체를 열다가 보면 죽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여성이 결혼생활의 사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가상을 꾸미면 이것은 허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 용도를 벗어나면 아마 허상일 것이다."


가상의 기능은 사랑할 수 있는 진리에 하등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독창성(Genie)에 기반한 형이상학 사고를 가진 학문적인 《순수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제시한 칸트(Immanuel Kant)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피해 생각을 베일로 감추는 방법을 고안하는 게 어렵다고 했다. 이런 수줍은 독신 철학자는 시각적 이미지조차도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말았다.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는 '간접적인 의미전달'면에서 소크라테스(Socrates)와 유사성을 들었으나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위해 죽은 소크라테스처럼 실체증명을 하기보단 목소리만 남기는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되진 못했다.


프리기야(Phrygia) 왕국의 노예 이솝(Aesop)이 지어낸 우화는 진리의 은유인 베일의 질적 수준을 보여준다. 평이한 듯하나 심오한 베일의 투명성은 짧고 강렬한 이야기 속에 리드미컬한 운문이 싣고 있는 메타포로 작용하며, 기억의 저장고에 가장 먼저 도달하도록 철학적인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볼테르(Voltaire; François-Marie Arouet)《제니의 이야기(Histoire de Jenny)》에서 무신론과 광신주의의 양쪽 극단에서 미덕이 통하는 좁은 지대는 그 사이의 중간에 있다고 말하는 주인공처럼 나도 생각과 실행, 좋음과 싫음, 애정과 증오, 삶과 죽음처럼 모든 극단의 가운데에 핵심이 있다고 여긴다.





V. 옷, 진리의 위장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눈을 감으면 꿈의 선열(腺熱)시달렸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 프로이트(Sigismund Schlomo Freud)와 융(Carl Gustav Jung)의 저서들을 탐독했었다. 그때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보다는 프로이트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동양적 연금술과 독자적인 심리기저를 융합한 융의 분석심리학에 호감이 갔다. 이상하게도 통쾌한 배설보단 탐식적인 흡입과 섭취에 매몰된 구강기적 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권력형 자아의 프로이트에게서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지하의 저승세계'로 가는 문을 연 프로이트의 문학적 상상력은 인류의 언어를 풍요롭게 했다는 알퐁스 파케(Alfons Paquet)의 지적은 블루멘베르크만이 아니라 나도 공감하는 바이다. 영상의 언어에서 프로이트는 자주 차용되는 의식의 수면 아래 놓인 이름의 아버지이다. 죽음의 행방을 묻는 요지경 거울을 들고 있는 백설공주를 질투한 마녀처럼 프로이트는 상상력은 구강기에 머문 전제적인 남성의 입술을 벌린다. 프로이트는 벌거벗은 상태와 대비되는 옷을 입은 상태를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의상철학(The Tailor retailored)》을 참조하여 의상을 꿈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위장으로 잠재적 꿈 사고의 은유적 수단으로 채용다. 다만 그의 성욕이 결핍의 근친으로 승화하여 리비도의 극치가 모성이나 변질된 부성에게 들러붙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는 심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블루멘베르크 역시,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악의 본성과 동일시되던 1930년 히틀러 시대에 타락한 예술로 제물 바쳐진 프로이트의 저서의 이율배반적인 근간을 드러낸다. 히틀러가 차용했던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거부감과 폭력적 공격은 동일한 언어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석에 대한 프로이트의 완강한 거부는 무의식의 노출에 대한 두려움이었겠지만 겹겹이 에워싸인 무의식의 층위는 쉽사리 노출되지 않음을 부연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우리가 입고 있는 유니폼처럼 꿈의 위장은 벌거벗은 몸의 극단적인 개인적 특성을 사라지게 하며, 설명되기 어려운 미지의 배꼽처럼 모태와 연결이 끊어진 흉터가 되어 아물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서 베일로도 감출 수 없고 위장되지 않은 꿈 자체의 부조리함까지도 끌고 온다고 설명했다.




VI. 옷, 벌거벗은 진리 앞에서


'인식과 일치하는 세계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다'라고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가 말했듯이 벌거벗은 진리를 인간이 알지 못하게 베일로 감추는 것이 신의 자비일 수 있다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수사학 또한 진리를 대면하기엔 한없이 약한 인간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벌거벗은 상태와 옷을 입은 상태로 비유한 파스칼(Blaise Pascal)은 상상력은 지식이 모자랄 땐 신화로, 통찰력이 부족할 땐 수사학으로, 질서가 부족할 땐 상상의 대리인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식으로 상상적 사실은 확산되고 인간에게 결여된 것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해 왔다고 말한다.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악령(Genius Malignus)'에 대해 데카르트와 카프카(Franz Kafka)의 대립적 시각을 바라보는 블루멘베르크는 '카프카만이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벌거벗은 사람'이었다는 카프카의 연인 밀레나의 말을 빌어 세계의 불안을 온몸으로 겪은 카프카의 실체적인 두려움에 대한 경의를 보여준다. '절대적 은유'와 같은 말인 벌거벗은 카프카는 '문학으로 이루어진' 자신에 충실했고, 그가 표현한 '절대적 형상 세계'는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사태의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역설을 통해 '벌거벗은 진리' 자체가 언어적인 구성물임을 종결지었다. 카프카가 추구하는 진실은 최소한의 피난처나 편히 쉴 집도 없이 방어해야 할  모든 위험에 노출된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기만적인 세상에서 육체의 자기부정은 아포리즘(Aphorism)》에서 탐미주의적인 에로틱한 살결을 드러내고 만다.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저 잠자코 홀로 있어라. 세상이 너에게 베일을 벗겨달라고 몸을 내밀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며, 네 앞에서 황홀해서 어쩔 줄 몰라 몸을 비비 틀 것이다."




VII. 즐거운 의복, 기교와 수사의 옷


인간본성의 정곡만 사격하는 도덕철학과 심리학은 인간의 밑바닥을 파헤친다. 블루멘베르크가 말했듯이 옷을 입는 치장, 은폐, 위장과 같은 은유의 가설은 인간행위와 상황의 실질적인 동기가 외관상의 품위와 시민으로서 사회적인 명망을 지키기 위함이다. 진리는 죽음을 가져오고 진리 스스로를 죽인다. 인식은 인식 자체를 작동하게 하는 전제조건을 파괴하기에 인식은 언제나 자기 성찰적이다. 인식은 행위를 죽이기에 행위를 하려면 환상을 통해 실상을 베일로 가려야 한다는 작가의 말을 따르면 대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본질임을 알 수 있다.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이 악타이온(Actaeon)의 어리석음에 급습당해 그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서 있다면 아르테미스는 악타이온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이 자신이 기르던 50마리의 사냥개에게 갈가리 찢겨 죽는 비극은 단순히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론가와 예술가는 수직적으로 땅굴을 파려는 사람처럼 체념된 금욕주의에 갇힌 사람이냐 아니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철학은 자신을 감추는 은폐된 진리이다. 은폐된 진리는 탐미로운 육신으로 변화하여 적나라한 역사에 맞서서 자신을 수호해야 한다.


"어떤 사물의 평판, 이름, 외양, 효용, 통상적인 양과 무게- 모든 것은 근원을 따지면 대개는 오류이고 자의적인 기준이지만 그것을 사물에 옷처럼 덮어씌우는데, 그런 옷은 사물의 본질이나 피부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런 옷을 믿고 대대로 물려줌으로써 점차 사물에 달라붙고 파고들어서 사물의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처음에 걸친 외피가 결국에는 거의 언제나 본질이 되고 본질의 효과를 발휘한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The Gay Science: 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말했듯이 위장을 즐기는 연극 배우는 위장에서 느끼는 쾌감이 힘으로 발현된다. 위장에 완전히 몰입하는 인간학에 회의적인 니체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려면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걷혀야 한다고 말한다. '의복이라는 가면극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고분고분한 동물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도덕적 의상으로 위장할 필요가 있다. 옷은 인간행동의 규제와 제도장치이며, 예술로 표현되는 아름다움의 가상은 벌거벗은 진리를 도외시하고 삶을 긍정하기 위한 기교라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의 껍질을 담고 있는 즐거운 의복에 대한 해석이다.  





VIII. 벌거벗은 생각을 담은 옷


보호색으로 자신을 감싸며 살아남기 위한 카멜레온의 위장술처럼 우리의 '옷' 또한 세상의 두려움과 허위에 맞서기 위해 신념과 인식체계로 자신을 무장시키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블루멘베르크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했다. 보호막이 회피라기보다는 세계를 인지하는 방편이 된다면 내가 공들이는 외피에 대한 탐구와 생존을 위한 지난날의 설계는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내 인생의 고통스러웠던 시기를 관통한 의상디자인은 한평생 은유학에 생을 바친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단순히 패션(fashion)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단색의 언어는 아닌 셈이다.


"생각은 결코 벌거벗은 생태가 될 수 없고, 애초부터 벌거벗은 상태가 아니었다. 언어를 통해 비로소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이미 언어적으로 옷을 입은 상태이다."


생각이 언어로 포장되지 않고 생각 홀로 존재하는 형식은 메모장에서 스냅사진처럼 단편적인 단상의 형식으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전의 나의 메모와 스냅사진들을 바라보면서 일기 형식으로 서술한 메모장은 생각이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버전이라는 작가의 비판에 수긍했다. 이전의 이야기들이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생각을 감추는 수단이라면, 이제부터 나는 어떤 서술태도를 갖춰야 할지 고민이 된다. 다만 약간의 내가 일련에 해왔던 작업들에 위안을 주는 말을 끌어와 본다.


"낱말이 마모되어 생생한 느낌을 상실하고 그저 뜻만 통하는 메모들에서 낡은 낱말들 대신에 새로운 은유를 도입하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새로운 결합으로 가능하게 하는 프로그램이 된다. 오래된 낱말을 사용하자면, 초보적인 교과서가 길을 파놓은, 이성으로 통하는 운하에서는 흔히 하나의 은유가 새로운 운하를 뚫는데, 이것은 종종 매우 효과적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가 은유의 지성과 미학적이라는 테제를 들고 들어온 리히텐베르크(Georg Christoph Lichtenberg) 이 모든 서사의 막장에 배치한 것은 그가 다른 철학자들만큼 벌거벗은 진리를 보여주지 못했어도, 벌거벗은 생각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해석과 해명의 목표로 사고해야만 하는 진리임을 다른 말로 풍자했기 때문이다.


사유는 언어를 통해서만 생성되고 전개되는 언어적 사건이라고 한다. 매번 진리를 보여주긴 어렵겠지만 의미로운 언어를 써 내려가는 것에 작가들은 마땅히 고민해야 한다. 나 또한 가장 진실한 언어를 보여주기 위해 중첩된 베일의 옷을 설계해 본다. 난 누군가 벗겨도 어느새 눈앞에 아까와는 다른 베일을 씌운 옷을 만들 것이다. 단순히 나를 보인다는 수치스러움이 아니라 발견하는 사람이 적나라한 진실에 충격받지 않도록, 당신의 눈이 나의 아름다움에 살해되지 않도록, 적나라한 진리를 발설하는 나름의 관용적인 태도를 취해본다.





[THE NAKED THOUGHT] 2024. 3. PHOTOSHOP MIXTURE COLLAGE. DESIGNED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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